어떤 사물을 설명할 때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 성서에서는 한 가지 진리를 가르치거나 한가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서론 · 본론 · 결론을 갖춘 본격적인 이야기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였다. 성서에 사용된 수많은 비교 언어 중 '하느님 나라' 라는 신비롭고 광범위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된 예수의 비유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의 비유에 대한 해석과 연구는 초대교회 교부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서 주석가와 설교가, 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왔는데, 그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Ⅰ . 성서의 비교 언어
구약성서의 이야기들과 예언 문학, 그리고 시편을 포함한 지혜 문학 안에는 수많은 표상(表象, image)과 은유(隱喩, metaphor)나 직유(直喩, simile), 비유(比喩)와 우화(寓話), 예화(例話)들이 등장하는데, 이 비교 언어들은 이야기의 내용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표상과 은유, 직유 : 표상은 비교되는 한 단어를 말하고, 은유나 직유는 비교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한 문장을 말하며, 비유는 작은 이야기 전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모든 인생은 한낱 풀 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이사 40, 6)에서 '풀 포기' 와 '들에 핀 꽃 은 표상이며, 이 문장 전체는 은유와 직유이다. 그런데 문법적으로 은유는 '~과 같은' 또는 '~처럼' 이라는 비교 부사가 빠진 직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한낱 풀 포기"는 은유에 속하고,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는 직유이다. 은유는 직유에 비하여 좀더 분명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표상 · 은유 · 직유보다 더 긴 구조를 갖고 있는 비유는, 서론 · 본론 · 결론을 갖춘 본격적인 이야기이다. 비유의 좋은 예로는 예언자 나단이 다윗 왕의 잘못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들려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암양 이야기' (2사무 12, 1-4)를 들 수 있다.
비유와 우화 : '비유' 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라볼레' (παραβολή)는 "사물을 나란히 놓는 것"이라는 뜻으로, 어떤 것의 의미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이 '파라볼레' 는 히브리어 '마샬' (םשל)이나 아람어 '마틀라' (★)를 옮긴 것인데, 이 단어는 구약성서와 랍비 문학에서 '비유' 외에도 '잠언' , '우화' , '직유나 은유' , '수수께끼' , '속담' , '교훈적 가르침' 등 다양한 비교 언어로 옮길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우화' 라는 의미의 '알레고리아' (ἀλληγορία)는 "어떤 사물을 다른 것으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 낱말의 본디 뜻으로 보면 둘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지만 용도에서는 뚜렷이 구별되는데,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을 들 수 있다. 우선 일반적으로 비유는 한 가지 진리를 가르치거나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를 말한다. 반면에 어떤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 또는 모든 요소가 저마다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이 이야기를 우화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화에 나오는 인물, 동물, 물건, 상황 등은 저마다 다른 대상을 암시한다.
비유와 우화의 또 다른 차이는 그 메시지와 관련되어 있다. 비유가 어떤 실체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우화는 보편적인 원리나 원칙들에 관한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화의 메시지는 비유의 메시지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윤리 · 도덕의 규범을 적용시킬 것을 요구한다.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들은 대부분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므로, 이들을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비유' 라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알레고리아' 는 성서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라, 비유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주석가들이 필요하여 그리스 수사학에서 빌려 온 용어이다. 개념상으로는 이렇게 뚜렷이 구별되는 비유와 우화가 성서의 본문에는 서로 겹쳐 나타난다. 복음서에서 비유라고 일컫는 이야기들 중에는 우화적 요소들이 적지 않게 섞여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유인지 우화인지 쉽게 구별하기 힘들다. 이 우화적 요소들은 복음서의 비유들이 여러 형성 과정을 거치면서 끼여든 것들이다.
예화 : 학자들에 따라 예화(Beispielerzählung, example story)를 비유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한다. 분리시키는 경우를 감안하여 그 개념을 소개하면, 예화는 긍정적인 인물이든 부정적인 인물이든 어떤 주인공을 내세워 그의 성품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본받거나 피해야 할 본보기가 되게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명시적 또는 암시적으로 예화는 "가서 그와 같이 하여라" 하는 명령이나 "그와 같이 하지 말라"는 금령을 청중에게 전한다. 복음서의 비유들 가운데 예화로 분류되는 이야기는 루가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등 네 가지뿐이다.
이상의 비교 언어들은 성서에서 대화 형식을 취하는 내용 중 답변 부분에 주로 등장한다. 예수도 상대방 또는 청중에게 답변으로 하는 담화에서 이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한편 신구약 성서에서 이 비교 언어들은 법률문이나 순수한 정보를 전달하는 문헌, 단순한 역사나 사화(史話, 예를 들면 예수의 수난 사화) 등의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Ⅱ . 예수 비유의 형성 과정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비유들 안에는 우화적인 요소나 해석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대부분 초대 교회의 시대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하여 복음사가들이 첨부한 것이다. 비유가 복음서에 실린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예수가 어떤 자리와 어떤 때에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가운데 한 비유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의 묘사는 동시대인들에게 잘 알려지고, 당시 풍습과 실제 생활에 연결된 것이었다. 그리고 비유의 메시지는 예수의 삶과 관련되어 있었다.
둘째, 예수가 죽고 부활한 뒤에 그의 비유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곧 예수의 영에게 인도받았겠지만,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예수의 비유를 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비유를 예수의 이름으로 전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통하여 더 이상 지상에 몸담고 있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아니라 부활한 '주님' 이었다. 더구나 시대적 상황도 다르고 청중도 다르며 문화적 여건도 달랐다. 또 비유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사목적 관심도 달랐다. 그들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두고 예수의 말씀 안에서 그 답변을 찾으면서 비유의 메시지를 그들 실정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비유의 우화화와 도덕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셋째, 구전으로 전해 오던 비유들이 기록으로 옮겨지고, 이렇게 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문자화된 비유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문자화된 비유를 접하게 되면서 설교가는, 같은 유형의 구전 비유들을 대할 때마다 그것을 표준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구전으로 전달되던 시절의 유연성과 자유로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물론 문자화된 이 비유들이 아직 '거룩한 경전' 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정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 문자화된 이 비유들은 그 전달 과정에서 비할 바 없는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로, 비유들은 복음서 안에서 설화의 한 부분으로 정착한다. 이때의 비유들은 문자화된 것일수도 있고 그 당시까지도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미 비유를 포함한 《예수 어록》을 복음사가들이 입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네 번째 단계에서 비유가 보다 넓은 문맥 안에 자리잡게 되었고, 각 문맥은 다시 복음서 전체의 구조 안에 배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복음사가들이 70~80년 사이에 이 비유들에 부여한 문학적 틀은 30년경 예수의 공생활이 자리잡았던 시대적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나아가 같은 비유를 두고도 복음서마다 비유를 위해 설정한 무대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이는 복음사가들의 신학적 관심과 문학적 기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비유들은 이 네 단계의 형성 과정을 다 거치지 않은 것도 있다. 이를테면,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는 비유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여 적용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유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이 네단계의 형성 과정을 염두에 두는 것이 유익하다.
Ⅲ . 예수 비유의 해석
〔초대 교회~19세기 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19세기 말까지 예수의 비유들은 우화로 해석되었다. 우화적 해석의 가장 좋은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가 10, 29-37)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해석이다. 이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아담, 예루살렘은 천국, 예리고는 윤리적 생활, 강도들은 마귀들이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아담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윤리적 생활을 떠나 천상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다가 마귀들을 만나 윤리성을 박탈당하고 죄로 떨어지도록 강요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사제와 레위인은 구약성서의 사제직과 봉사직,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 상처를 싸맴은 죄를 억제함, 기름과 포도주는 희망의 위로와 선행의 격려, 나귀는 성자의 육화, 여관은 교회, 여관 주인은 사도 바오로, 돈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이중 계명 또는 이승의 삶과 저승의 삶이다. 곧 죄에 떨어지게 된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희망 가운데 선행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육화되신 성자의 인도로 교회에 들어와 사도의 도움을 받으며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우화적 해석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요한 그리소스토모(347~407)와 종교 개혁자 칼뱅(J. Calvin, 1509~1564)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19세기 말까지 지배적인 비유 해석 방법이었다.
〔율리허의 견해〕 예수의 비유에 대한 연구는 독일의 신약성서학자 율리허(A.Jüllicher, 1857~1938)가 1889년에 두 권으로 펴낸 《예수의 비유》(Die Gleichnisse Jesu)로 전환기를 맞았는데, 우화적 해석은 그에 의해 정면으로 부정되었다. 율리허는 예수가 우화나 우화적 요소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비유가 우화로 바뀌었거나 우화적 요소들을 지니게 된 것은 복음사가들의 편집 때문이라고 하면서, 예수의 비유는 해석이 필요 없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비교 언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비유에는 비유가 표현하려는 생각과 표현하고 있는 표상 사이에는 한 가지 비교점만 있으며, 그 비교점은 보통 보편적 종교 원리 또는 윤리적 실천 지침을 밝혀 준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율리허는 비유를 확대된 직유로 여긴 반면, 우화는 확대된 은유로 여겼다. 바꾸어 말하면, 비유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이 명백한 한 가지 진리를 분명히 밝히는 데 반하여, 우화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비유를 이용한 목적은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율리허에 따르면, 예수의 비유를 결코 우화로 바꾸어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20세기의 연구 동향〕 20세기에 들어서서 율리허의 연구는 두 가지 중요한 비판을 받았다. 첫째, 율리허는 그리스 수사학의 관점에서만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였지, 우화가 많이 등장하는 구약성서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율리허는 예수의 비유 가운데 어떤 우화나 우화적 요소도 예수에게까지 소급되는 진정한 것이 못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비유의 우화적 해석이나 요소들이 대부분 초대 교회와 복음사가들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원(原) 비유들 안에 우화적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이다. 둘째, 율리허는 비유(또는 확대된 은유)가 오로지 한 가지 종교 원리나 윤리적 실천 지침을 가르쳐 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비유 안의 우화적 요소를 인정하는 한, 맞는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한 가지 비유 안에는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역할에 따라 한 가지 이상의 메시지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판에도 율리허의 기본 연구는 1935년부터 1970년대까지 영국의 도드(C.H. Dodd, 1884~1937)와 독일의 예레미야스(J. Jeremiahs)에게 계속 영향을 미쳤다. 도드와 예레미야스는 율리허처럼 비유에서 우화적 요소들을 제거하면서도, 율리허와는 달리 비유의 메시지를 윤리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우선 도드는 예수의 메시지를 실현된 종말론으로 이해하였다. 즉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레미야스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동텄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예수는 비유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결단의 시기에 처해 있음을 알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응답할 것을 촉구하였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스의 공헌은 양식 비평과 편집 비평을 이용하여 비유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을 가능한 한 자세히 밝히고, 초대 교회와 복음사가가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 우화적 요소나 다른 편집 요소들을 골라냄으로써 예수의 원 비유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한 데에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2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외경과 《토마스 복음》(Evangelium Thomae)을 중요한 문서로 평가하고, 그곳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들을 원 비유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토마스 복음》에 대한 예레미야스의 지나친 의존과 평가는 후대 성서학자들의 비판거리가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오히려 《토마스 복음》이 공관 복음서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곳에 모아진 《예수 어록》은 예수의 본래 말씀을 탐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도드와 예레미야스 이후 1980년대까지는 여러 가지 실험적 방법론이 비유 해석에 적용된 시기이다. 비유를 예수의 실존적 삶을 민중에게 전달하는 언어로 본 '실존론적 이해' , 비유의 역사적 · 문화적 배경이나 비유를 전하는 사람의 의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비유 자체가 지닌 구조와 기능에 집착한 '구조주의적 이해' , 복음사가들이 비유를 기록하면서 사용한 문학 기법과 집필 목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문학적 이해' (이는 편집 비평의 일부 관심사이기도 하다),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 연구에 몰두하는 '심리학적 이해' 등등 수많은 방법론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관적 비유 이해는 진정한 의미에서 해석이라고 할 수 없고, 비유의 이야기들을 새로운 맥락 안에서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비유가 발설된 역사적 맥락과 발설자의 본래 의도를 살피지 않고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율리허에서 시작하여 도드와 예레미야스로 이어진 역사 비평은 아직도 비유 연구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 비평과 더불어 최근에 비유 연구에 큰 공헌을 한 분야는 유대교의 랍비 문헌에 나오는 비유들과 예수 비유들 사이의 비교이다. 펠트만(A. Feldman)은 랍비 문학의 비유들을 2,000여 개 모아 비교 연구를 더욱 용이하게 하였고, 이 비유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유대인 신약성서학자 플러서(D. Flusser)는 예수의 비유들이 상당 부분 복음사가들에 의해 재편집되었다는 율리허나 예레미야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복음서 비유 본문 그대로에 역사적 신빙성을 보다 많이 인정하였다. 그는 복음서 비유들의 역사적 맥락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였으며, 비유들의 도입부와 맺는 부분도 필요한 요소로서 일반적으로 예수에게서 나온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러한 비유의 해석에 관한 시대별 연구에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율리허의 연구가 비유에 관한 모든 현대 비평학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연구는 비유의 지나친 우화적 해석에 경종을 울렸다. 둘째, 비유를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한 도드와 예레미야스의 노력은 비유의 메시지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직결되어 있음을 밝혀 주었다. 셋째, 예레미야스가 시도하였듯이, 역사 비평을 통하여 비유의 본래 형태를 재구성하고 그 역사적 · 문화적 배경과 발설자의 의도에 접근해 들어가는 작업은 비유의 올바른 해석에 큰 도움을 준다. 넷째, 예수의 비유들에서 우화나 우화적 요소들을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역사적 예수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는 원비유만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랍비 문헌의 비유들과 예수의 비유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잘못으로 드러났다.
Ⅳ . 랍비 문헌의 비유들과 예수의 비유
예수의 말씀 가운데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비유는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도 랍비 문헌에 나오는 비유들과 유사한 요소들이 많다. 랍비 문헌에서 비유로 번역되는 '마샬' 의 구조는 다섯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요소는 '비유의 주제 또는 이야기의 초점' 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비유의 구조에 속하지 않고 비유의 문맥을 형성하는 기본 틀을 제공할 뿐이다. 두 번째 요소는 '도입 정식' 으로, 이는 일반적으로 "비유" , "비유. 그것은···과 같다" , "그들은 비유로 말한다. 그 문제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은···과 같다" 등의 표현으로 시작된다. 세 번째 요소는 '본격적인 비유' 로, 표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자체를 가리킨다. 네 번째 요소는 '비유의 적용' 인데, 랍비 문헌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비유들은 명료한 해석이나 실생활과의 연결을 이야기에 덧붙인다. 이 대목은 보통 '카카' (כָּכָה, 이와 같이)로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 요소는 '성서 인용' 으로, 보통 "말씀대로" 또는 "기록된 대로"라는 표현과 함께 성서 구절이 나온다.
이 구조에 잘 들어맞는, 탄나임 시대의 미드라쉬 문집에 있는 신명기 32장 9절의 주석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주님의 몫은 그분의 백성이다' (신명 32, 9).
비유. 그것은 땅을 소유하고 있다가 소작인들에게 주는 왕과 같다. 그들은 땅을 받았으나 주인에게서 그것을 도둑질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그들보다 더 악하였다. 그런데 아들이 왕에게 탄생되었고 그래서 왕은 그들에게 말했다. '내 소유지로부터 떠나라. 너희는 이제 다시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 내게 내 몫을 돌려달라.'
이와 같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을 때, 그가 악을 낳았는데 곧 이스마엘과 크투라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조상 이사악이 생존해 있을 때 그가 악을 낳았는데 에돔의 통치자 에사오였고 그는 이전 아브라함의 아들들보다 더 악하였다. 그러나 야곱이 생존해 있을 때 그는 악을 낳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모든 아들들이 그 자신처럼 정직하였다. 하느님은 누구를 그분의 몫이라고 부르셨는가? 야곱이 아니었던가? 왜냐하면 성서는 그리고 야곱은 천막 안에서 사는 조용한 아이였다' (창세 25, 27)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주님의 몫은 그분의 백성이요 야곱은 그분의 뽑힌 유산이다' (신명 32, 9)라는 말씀대로 야곱에게서 당신의 몫을 얻으셨다. 또 성서는 '하느님이 야곱을 당신 자신을 위해서 뽑으셨다' (시편 135, 4)고 말한다."
랍비 문헌의 이 마샬은 그 내용과 구조 면에 있어서 예수의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 (마르 12, 1-12 ; 마태 21, 33-46 ; 루가 20, 9-19)와 비슷하다. 이외에도 공관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의 비유들과 비교할 수 있는 탄나임 시대의 랍비 문헌에 나오는 마샬들은 많다. 그렇다고 예수의 비유들에 독창성과 독특한 메시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랍비 문헌의 마샬들에 비해 예수의 비유들은 문학적으로 세련되어 있고, 특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훨씬 극적이고 강렬하다. 예수의 비유들에는 공관 복음서 저자들의 편집 의도와 그들 공동체의 관심사가 첨부되었겠지만, 《토마스 복음》과의 비교와 공관 복음서 상호간의 비교를 통하여 얻어낸, 그래서 성서학자들이 예수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다(ipsissima verba, 예수자신의 말씀)고 여기는 비교적 순수한 형태의 가상적 비유 원문에도 위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복음서의 예수 비유 본문에서 도입 부분과 맺음 부분을 원 비유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잘못이다.
Ⅴ . 비유의 분류
복음서의 비유들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아직도 율리허의 분류가 현대의 성서학계에 널리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분류대로 복음서의 모든 비유를 나열하면 표 <복음서의 비유 분류>와 같다. 다만 율리허는 비유(Gleichnis), 이야기(Parabel), 예화(Beispielerzählung)로 구분하였는데, 현대 성서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율리허가 '비유' 로 분류한 것을 '은유나 직유' 로, '이야기' 로 분류한 것을 '비유 로 바꾸었다.
표에서 마르코 복음이 먼저 소개되고 이어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의 구절이 소개된 것은 '이출전설' 을 염두에 둔 배려이다. 이 표를 통하여 마르코에게서 나온 비유, 가상적 예수 어록(Q)에서 나온 비유, 마태오의 특수자료에서 나온 비유, 루가의 특수 자료에서 나온 비유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요한 복음의 비유는 보통 분리되어 다루어진다. 우선 요한 복음에서는 비유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파라볼레' 가 사용되지 않고, 대신 '파로이미아' (παροιμία)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마샬' 의 또 다른 번역어인데, 요한 복음 10장 6절에서는 '비유' 로, 16장 25절과 29절에서는 '수수께끼' 나 '알아듣기 어려운 말' 로 옮길 수 있다. 요한 복음에서 본격적인 비유는 '착한 목자의 비유' (10, 1-18)와 '참 포도나무' (15, 1-8)뿐이지만, 표상과 직유나 은유의 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사용한 표상으로, '세상의 빛' , '생명을 주는 빵' , '착한 목자' , '참 포도나무' , '양들이 드나드는 문', '길이요 진리요 생명' , '밀알' 등을 들 수 있다.
Ⅵ. 예수 비유의 특징과 메시지
〔예수 비유의 특징〕 예수의 비유들은 유대교 랍비 문헌의 비유들과 비슷한 구성과 전개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예수의 비유는 랍비 문헌의 비유들보다 문학적으로 뛰어나다. 구성이 탄탄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불필요한 묘사가 없고 문체가 간결하다.
둘째, 비유의 소재는 대중에게 친숙한 자연과 관습과 일상의 삶, 또는 근래에 일어난 사건 등에서 취하지만, 반드시 현실적이거나 진부하지 않다.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청중의 관심과 흥미를 자아낸다. 예를 들어 '무자비한 종의 비유' (마태 18, 23-35)에 나오는 1만 달란트라는 돈은, 한국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5조 원이나 된다.
셋째, 예수의 비유는 당대의 종교적 고정 관념과 상식, 청중의 예상을 뛰어넘거나 뒤집는 것이어서 청중은 생각의 극적인 전환을 강력히 요청받는다. 비유의 핵심은 이야기의 말미에 나오는데, 흔히 이야기의 정점에서 비유가 갑자기 끝나기 때문에 청중은 스스로 해답을 찾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포도원 주인과 소작인들의 비유' (마르 12, 1-11)처럼 그리스도론적인 비유도 있으나, 예수의 비유는 대부분 하느님 중심적이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모습, 인간에게 대한 하느님의 기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는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와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촉구한다.
〔비유의 메시지〕 예수의 비유 대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가 자신의 언행으로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그 당시 대중이 쉽고 또 올바로 파악할 수 있었던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성서 전통에 뿌리를 내린 매우 심오하고 풍부한 개념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신비스런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대중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비교 언어들, 곧 표상과 직유와 비유, 예화 등을 이용하여 설명하였다.
구약성서, 특히 신명기계 역사와 이사야서를 비롯한 몇몇 예언서 안에 자리잡은 하느님 나라의 개념은 공간적 개념보다는 하느님의 절대적이면서 자애로운 통치권 또는 통치 행위를 가리킨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도 이런 성서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하느님 나라는 당신의 어리고 가난한 백성에게 베푸시는 선정(善政)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선정 안에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백성을 구원하는 일도 당연히 포함된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주체인 하느님의 참모습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다. 앞의 세 가지 메시지는 하느님나라 자체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 네 가지는 하느님 나라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자세에 관한 것이다.
첫째,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데 주력한다. 하느님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에 따라 품값을 주는 고용주와는 달리, 노동 시장에서 제일 늦게 팔린 일꾼에게도 좋은 품삯을 주는 자비로운 주인이시다(포도밭 주인의 비유). 그분은 잃은 자를 찾아 친히 나서시는 분, 잃은 자를 찾았을 때 너무 기뻐 그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시다(양과 은전의 비유,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마태 5, 45)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모든 자녀를 당신 나라에 초대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둘째, 예수는 수많은 구마 행위뿐 아니라 비유를 통해서도 악의 세력이 제압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알린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마태 12, 28).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와 있는데도 왜 악이 아직도 현존하는가? 예수는 이에 대해 비유로 대답한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는 악의 한가운데에서도 계속 자랄 것이며, 결정적 심판은 미래에 닥칠 것이다(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밀과 가라지의 비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위업이지 결코 인간 노력의 결실이 아니다(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셋째,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심판과 관련된 비유들이 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책임이 맡겨진 종은 언젠가 반드시 주인 앞에서 그에 대한 셈을 바쳐야 한다(충성스럽거나 불충한 종의 비유, 달란트나 미나의 비유). 그러나 미래에 관한 비유의 초점은 종말이 언제 닥칠지에 대한 그때를 알려 주는 데에 있지 않고, 언제나 충실하고 지혜롭게 종말을 준비하도록 격려하는 데에 있다(열 처녀의 비유).
넷째,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적극성을 가르친다. 하느님 나라라는 최고의 가치를 얻어 만난 사람은 커다란 기쁨 속에 사로잡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보물과 진주의 비유).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이 단순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에 매달리는 사람의 차지이다. 예수가 선포한 기쁜 소식을 비판하고 배척한 당대의 의인 바리사이들보다는 그분을 기꺼이 받아들인 당대의 죄인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직유).
다섯째,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는, 이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은총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기를 요청한다(돈놀이꾼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무자비한 종의 비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최후 심판의 비유).
여섯째,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인간의 내적 자세인 신뢰와 겸손을 가르쳐준다. 하느님의 은총을 구할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는 아버지 이심을 확신해야 한다(간청하는 아들의 직유). 우리가 그분께 간청하는데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아버지로서의 체면에 손상을 입으실 것이다(빵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늘 겸손하고 가난한 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맡겨진 모든 책임을 다하고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루가 17, 10) 하고 자기 공로를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밭 가는 종의 비유).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이들을 고발하고 하느님 앞에서까지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일곱째, 예수의 비유는 우리의 과감한 투자와 단호한 결단을 촉구한다. 심판의 유예 기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하느님에게서 받은 삶을 정리하고 셈 바칠 때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너무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 때를 오늘에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과 여건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참모습, 곧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흘러 넘치는 분위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약은 청지기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 복음서 ; 예수 그리스도)
※ 참고문헌 J.H. Charleswort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2, Garden City, New York, 1983/ C.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35, 19783/ D. Flusser, Die rabbinischen Gleichmisse und der Gleichniserzähler Jesus ; 1 Teil, Das Wesen der Gleichmise, Bern, 1981/ J.B. Green · S. McKnight · I.H. Marshall eds., Dictionary ofJesus and the Gospels, pp. 747~751/J. Jeremiahs, Die Gleichnisse Jesu, Götingen, 1947, 1970⁸(rev.)/ ㅡ, Rediscovering the Parables, London, 1966, 19803/ A. Jülicher, Die Gleichnisreden Jesu, vol. 1,Tübingen, 1888 ; vol. 2, 1899/ I.H.Marshall . A.R. Millard eds., New Bible Dictionary, Leicester, England : Downers Grove(Ill.), 19963/ H.K. McArther . R.M. Jonston, They Also Taught in Parables, Grand Rapids, Mich., 1990/ J. 예레미야스, 허혁 역, 《예수의 비유》, 분도출판사, 19843/ 정태현, 《놀라운 발견 하느님 나라의 비유》, 바오로딸, 1996/ ㅡ, 《성서 비평 사전》, 성서와 함께, 1996. 〔丁太鉉〕
비유 比喩 〔히〕מָשָׁל 〔그〕παραβολή, παροιμία 〔라〕parabola 〔영〕parable
Ⅰ . 성서의 비교 언어 · Ⅱ . 예수 비유의 형성 과정 · Ⅲ . 예수 비유의 해석 · Ⅳ . 랍비 문헌의 비유들과 예수의 비유 · Ⅴ . 비유의 분류 · Ⅵ . 예수 비유의 특징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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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메시지는 비유의 메시지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윤리 · 도덕의 규범을 적용시킬 것을 요구한다(마태오 복음 15장 14절의 내용을 그린 브뤼겔의 <소경의 우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