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노, 페타비오의 Victorinus Petavinus(?~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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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순교자. 주교. 라틴어로 성서 주석 작품을 최초로 저술한 인물. 축일은 11월 2일. 빅토리노가 주교로 재직하였던 페타비오(Petabio)는 현재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Steiermark)의 페타우(Pettau)로, 로마 제국의 속 주인 판노니아(Pannonia)의 도시였는데, 그리스도교가 일찍부터 전해져 빅토리노가 살던 당시에는 그 지역 각 계층의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많았다고 한다(Victorinus, In apoc., CSEL 49, p. 42, 6-11 ; 40, 11-12). 빅토리노가 성서 주석학 작품들을 많이 저술하였다는 사실도, 그 도시에 많은 교육을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생애와 순교〕 빅토리노의 생애에 대해서는 성 예로니모가 전해 준 내용이 전부이다. 그에 따르면, 빅토리노는 체계적으로 고전적인 수사학을 교육받지는 못하였지만 (Jerome, Epist. 70, 5),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더 주교가 설립한 도서관을 자주 방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CSEL, 49, p. 23). 그는 이곳에서 유스티노와 이레네오의 작품들을 읽었고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를 알게 되었으며, 마침내 히폴리토와 오리제네스의 작품에 매우 정통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라틴어권의 테르툴리아노와 미누치오 펠릭스, 치프리아노의 작품들을 읽은 것도 이 도서관에서였다.
예로니모는 빅토리노의 생애 연대를 치프리아노와 락탄시오 사이에 두었는데(Epist., 49, 19 ; 58, 10), 치프리아노가 작품을 작성하던 시기에 빅토리노 역시 작품을 쓴 것은 분명하지만 치프리아노보다 더 젊었던 것 같다. 9세기경에 발견된 《우수아르(Usuard)와 아도(Ado)의 순교록》(J. Dubois, Le Martyrologe d'Usuard, Bruxelles, 1965, p.334 ; PL 123, 389)에는 빅토리노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박해 시기에 순교하였다고 한 반면, 예로니모는 어느 박해 때였는지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283~309년 사이에 분명히 순교하였다고 하였다(De uir.il. 74). 일부 문헌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이전에 순교한 것으로, 또 어떤 성인전에서는 누메리아누스 황제(283~284)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Acta Ecclesiastica Sloveniae 8,p. 361 ;P. Allard, Les dernières persécutions du Ⅲᵉ siècle, Paris, 1907, pp. 322~324). 《우수아르와 아도의 순교록》에서는 빅토리노의 축일이 11월 2일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유해가 로마로 옮겨진 날로 여겨진다(AS, nov. 2,p. 442 ; R. Bratoz, Viktorin ptujski., p. 283, n. 27). 빅토리노에 대한 공경은 1768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기전까지 페타비오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거행되지 않았다.
〔저 서〕 빅토리노의 작품은 그다지 학적이지는 않다. 예로니모는 빅토리노가 학식이 부족하다고는 하였지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사실, 빅토리노의 라틴어 실력은 그리스어 실력보다 많이 부족하였으며, 그 자신도 다재다능하지 못하고 노련미가 부족한 것에 많이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유실된 작품 : 예로니모는 자신이 전하는 빅토리노의 작품 목록이 정확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이사야서, 에제키엘서, 하바꾹서, 전도서, 아가서, 요한 묵시록 등의 주석서와 《제이단 반박론》(Contre toutes les hérésies)을 포함한 10개의 저서명을 전하고 있으나(De uir ill. 74), 이 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빅토리노의 《창세기 주석서》(Commentaire sur la Genèse)는 예로니모가 '이사야의 축복' 을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Epist. 36, 16), 세빌랴의 이시도로(560?~636)는 《구약성서의 문제들》(Questions sur I'Ancien Testa-ment)에서 빅토리노의 창세기 주석을 여러 번 인용했으며(PL 83, 264), 《전도서 주석서》(Commentaire sur I'Ecclé-siaste)는 예로니모가 자신의 작품에서 재인용하였다(meccl. 4, 13-16 CCL 72, p. 290, 218s).
빅토리노가 쓴 《마태오 복음 주석서》(Commentaire sur Matthieu)를 자주 언급했던 예로니모가 바울라(Paula)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에게 그 사본을 보냈다(In Mt. Praef., CCL 77, p.4, 92~98)고 하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이 주석서는 먼저 마태오 복음에 대해 주석한 후 영성적으로 해석하였으며(CSEL 49, p. 8, 24~25), 상징적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주 삽입하였고 그 말들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였다(p. 22, 12). 《제이단 반박론》이라는 개론서 역시 유실되었지만, 테르툴리아노의 작품으로 그리스어로 쓰여진 《이교들의 규정에 관하여》(De praescrip-tione Haereticum)를 빅토리노가 번역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예로니모가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테르툴리아노의 작품과는 중요한 문체의 차이, 동일하지 않은 성서 본문의 인용, 주제 등에서 차이점이 많다.
단편들과 소논문들 : 빅토리노의 《연대기 단편》(Frag-ment chronologique)이 무라토리(L.A. Muratori, 1672~1750)에 의해 9세기경 봅비오(Bobbio)의 사본들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오래된 연표 중 하나로 초기 전례력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소논문 《열 처녀》(De decem virginibus)는 빅토리노의 강론중 하나로, 후에 《질문》(Quaestiones)이라는 작품 속에 삽입된 마태오 복음 주석의 단편으로 여겨진다. 또한 《세상의 창조》(De fabrica mund)는 세상의 최초 7일 간에 대한 유형학적인 의미를 전개하면서 701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숫자라고 언급하였다. 또 이 숫자는 모든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검인과도 같으며, 육화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책에서부터 그의 천년 왕국설 경향이 드러난다.
《묵시록 주석서》(Commentaire sur l'Apocalypse) : 이 작품의 원문은 15세기경 바티칸 도서관에서 하우슬라이터(J. Haussleiter)에 의해 발견되어 1916년 이후에 출판되었다. 이 사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예로니모가 398년에 아나톨리우스(Anatolius)의 요청으로 개정 · 보충한 것이 사용되었었다. 예로니모는 편집 과정에서 빅토리노의 천년 왕국설의 종말론 대신 다른 주석들을 삽입시켰고, 빅토리노가 언급한 성서 본문들을 바꾸었는데, 이러한 편집본은 5세기 말에 다시 보충되었고 6세기 초에도 개정되었다. 이중의 의미로 전해진 구절들이 삭제됨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읽게 되었으며, 천년 왕국설에 반대하는 예로니모의 종말론 부분 대신에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한 부분이 요약되어 대체되었다. 빅토리노에게 있어서 묵시록은 이전의 모든 예언들을 요 약하며 성서의 의미를 열어 주는 것이었다. 또한 묵시록은 마지막 종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해 성서의 의미가 완전히 계시되는 것이었다. 그는, 묵시록이 천년 왕국을 건설하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승리가 일어나기 전에, 교회와 다시 살아난 네로라고 간주되는 반그리스도와 마지막으로 대결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였다.
〔사 상〕 천년 왕국설 : 빅토리노의 천년 왕국설은 수정되고 영성화된 것으로, 그에게 있어서 천년 왕국의 약속된 선물은 본질적으로 영성적인 것으로 하느님의 현현과 '천상의 복' 이었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약속의 땅을 소유하게 됨, 종말론적인 향연 등의 구체적인 성서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예언들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 땅위에 천년 왕국의 건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이레네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또한 빅토리노에게 있어서 천년 왕국의 예루살렘은 이 땅에 실재하는 도시인 반면, 영성적인 것으로 어떠한 흠도 티도 없는 세상 종말에 나타날 교회라고 하였다.
성서 :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써 전해진 유일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는 두 성서에서 서로 부합하는 세밀한 짜임새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신약에 대한 예언이며, "십계명은 진리의 계시를 준비한 것"이고,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를 "앞서서 온"자들이며, 그들의 증언은 사도들의 증언과 같은 것이다. 또 그리스도는 성서의 열쇠이며, 그리스도는 육화를 통해 성서를 완성하였고, 그분은 그때까지 닫혀 있던 성서의 의미를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는 가려진 "모세의 장막"을 열었으며, 여전히 교회에 "성서의 순수한 영성적인 뜻" 을 드러내면서 성서의 의미를 열어 주고 있다. 성서의 해석은 사도들의 설교에서 함께 나타나는 징표나 기적들과 같은 은사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성서 주석가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예언자이다. 따라서 성서 주석가는 서로 분리될 수없는 두 가지 조건 즉 성령으로 가득 채워질 것과 성서 연구를 필요로 한다.
복습 이론 : 그는 묵시록이 장차 도래할 사건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가지 형상들로써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다고 하였다. 빅토리노의 이러한 복습 이론의 근거는, 성령이 하느님의 메시지를 인간의 언어 속에서 충만히 흐르게 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의 유일한 현실' 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을 이용한다는 사상이다(CSEL 49, p. 104, 2). 따라서 빅토리노는 예언을 왜곡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p. 102, 192 ; 104, 7), 묵시록에서 더 이상 연대기적인 전개 흐름을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예언서의 문체에 대하여 고찰한 유스티노, 이레네오, 테르툴리아노 등의 연구를 기초로 복습 이론을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빅토리노보다 먼저 묵시록의 구조가 복습적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으므로, 빅토리노를 이 원리의 창시자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세례 : 빅토리노는 세례 때에 성령이 세례자에게 전해진다고 하였다(CSEL 49, p. 24, 18 ; 66, 9). 그에 따르면, '성령 칠은' (p. 18, 3)이 세례자의 마음을 열어 주어서 성서를 알아듣도록 하며(p. 8, 10), 하느님의 생명을 얻게한다(p. 46, 5-11). 성령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인간을 양육하는 빵이다(p. 30, 5-6). 또한 빅토리노는 성령이 거룩하게 하고 정화시키는 능력으로 그 사람을 가장 충만된 생활로 이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 구원된 사람들은 교회, 즉 새로운 노아의 방주 안에 하나로 모이므로, 세례는 신앙인들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과 부활을 통해 얻어진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p. 66, 5-11). 그러나 이 '불멸의 선물' 은 죄로 인해 상실될 수 있다(p. 96, 9 ; 56, 18). 구체적으로 박해의 시기에는 배교, 선행을 하지 않음, 신앙의 미지근함 등으로 공동체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p. 42, 17 ; 96, 15-16 : 40, 3)고 하였다.
신앙 : 빅토리노에게 신앙이란 영성적인 빛이요 환시였지만(p. 68, 12 17, 7 ; 154, 14), 선행이 없는 신앙, 즉 자비와 사랑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었다(p. 32, 9-11 ; 34, 5 ; 40, 1-4). 신앙은 복음을 실천하는 것인데, 복음적인 가르침의 실천은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안약과도 같은 것이다(p. 44, 1-3). 신앙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세례 때에 받은 은총을 보존하도록 노력하며(p. 81, 4),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끈기와 불굴의 자세를 전제한다(p. 40, 13). 또한 복음서는 쓴맛과 단맛을 지닌 작은 책으로, 입에 단 것은 그 가르침이 좋기 때문이며, 입에 쓴 것은 복음의 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p. 92, 10-13)이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박해와 순교의 상황이 항상 전제되어 있었는데, 빅토리노는 다른 고대 교부들처럼(Clement de Rome, Epist. ad Cor., 41, 4 : Pseudo-Barnab Epist. 4, 9b) 박해를 경계하고 조심할 것을 지시하였다(p. 34, 3-6).
〔영 향〕 《젤라시아노 규정집》은 천년 왕국설을 제기한 그의 작품을 비난하였지만, 라틴어로만 작품을 남긴 빅토리노의 저서들은 초기 교회 때 많이 읽혀졌다. 코모디오, 그리고 락탄시오와 힐라리오가 빅토리노의 영향을 받았으며, 빅토리노의 주석서 중 일부가 제논,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이시도로에게 알려졌다. 또한 빅토리노의 작품은 중세 시기까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의 작품에 재인용되었다. (→ 성서 연구 방법론)
※ 참고문헌  M. Dulaey, 《DSp》 16, PP. 552~558/ P.W. Lawler, 《NCE》 14, p. 651/ J. Quasten, 《LThK》 10, pp. 775~7761 F. Cross, The Early Christian Fathers, London, 1960, p. 187/ G. Bardy, (DTC) 15-2, pp.2882~2887/ J. Quasten, Patrology Ⅱ Newman Press, Westminster, 1953, pp. 411~41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