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폰시우스 (?~?)

〔그〕Πιλᾶτος, Πόντιος · 〔라〕Pilatus, Pontius · 〔영〕Pilate, Pon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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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왼쪽)는 손을 씻어 자신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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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왼쪽)는 손을 씻어 자신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였다.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1437) 시대에 유대 지역에 파견되었던 제5대 총독(2636).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인물. 〔성서 이외의 자료〕 그리스-로마의 자료: 이 계통의 자료에서는 단 한 번 언급된 것이 있는데, 로마 제국의 역사가 타키투스(C.C. Tacitus, 54/55~117/120)가 쓴 『연대기(Annalis)』에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에 관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XV, 44). 전승 자료: 빌라도는 삼니움(Samnium)족의 폰시우스(Pontius) 씨족 출신으로 로마 기사 계급이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던 세야누스(Sejanus)의 도움으로 유대 총독에 임명된 빌라도는, 그의 도움만을 믿고 행동하다가 유대인들의 적개심을 사게 되었다. 그리심(Gerizim) 산에서의 사건으로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에게 고발되어 로마로 소환 명령을 받았으며, 그 후 그가 행한 잔혹 행위와 탐악 행위, 특히 적법한 재판 없이 사람들을 처형한 행위로 재판을 받았다. 4세기경에 만들어진 전승에 의하면 갈리굴라 황제(37~41)의 명령에 따라 39년에 자결하였다고도 하고, 자기 부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전승도 있다. 유대계 자료: 알렉산드리아의 율법학자 필로(Philo, 기원전 20~서기 50)는 빌라도와 관련된 사건과 그의 성품에 대해 전하고 있다(Legation to Caius 38). 본래 예루살렘 궁전에는 로마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금박 방패가 걸려 있었는데, 빌라도는 황제에게 그 방패를 걸게 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전하면서 빌라도의 인품이 무례하고 몰인정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37/38~100)는 비교적 자세히 빌라도와 관련된 내용들을 기록하였다(『유대 고대사』 XVIII, 3, 1-3 ; 4, 1 ; 『유대 전쟁사』 II, 9, 2). 빌라도는 자신의 군대를 가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면서, 의도적으로 로마 황제의 흉상이 그려진 군기를 앞세우고 입성하였다.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행위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이렇게 안하무인 격의 조치를 취한 역대 총독도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빌라도는 군대를 동원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였지만 유대인들의 죽음을 불사한 태도에 감동받아 결국 자신이 취한 조치를 철회하고 흉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에서 철수시켰다. 두 번째 사건으로 빌라도는 임의로 성전에 있는 성물을 예루살렘의 수도 공사에 사용하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은 수만 명이 모여 항의하였고, 빌라도는 모인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군인들을 위장시켜 군중 속에 들어보낸 다음 유대인들에게 진압하게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거하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세 번째 사건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났다.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만의 성소로 여기는 그리심 산에, 오래전 세 때부터 숨겨진 보물이 있다는 어떤 사람의 속임수에 빠져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산에 오르기도 전에 빌라도는 군대를 보내 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일부는 사망하고 일부는 체포되었다. 빌라도는 체포한 인사들 중에서 유죄급들은 모두 처형하고,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이들은 반드시 잡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유대인 고위 인사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빌라도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렸다는 간단한 기록도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다. 유대계 자료들은 모두 빌라도에 대해 나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정복자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나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요세푸스의 저술에서는 피정복민인 유대인을 억압하는 빌라도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연연한 자세를 견지하였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들보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신약성서〕 빌라도에 대한 신약성서의 언급은 특히 네 복음서에 집중되어 있다. 복음서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시민들은 열렬히 그를 환영하였다(마르 11, 1-11 ; 마태 21, 6-11 ; 루가 19, 37-40). 그리고 때마침 예루살렘에 몰려든 과월절 순례객들 사이에서 예수로 인해 엄청난 소요가 발생할 위험이 생겼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없앨 계획을 세웠다(마르 14, 1-2). 예수를 체포해 산헤드린에서 종교적인 불경을 트집잡아 예수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한 종교 지도자들은 곧장 예수를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다(마르 14, 33-65 ; 15, 1). 왜냐하면 피지배인들인 유대인은 누구라도 마음대로 사형시킬 권리를 가지지 못했고, 반드시 로마 총독의 선고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유대 지도자들이 고발한 대로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라고 물어 보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자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황제 외에는 하늘 아래 두 명의 왕이 존재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논박에 밀려 예수의 죄를 군중에게 물어 보고, 급기야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빌라도는 매년 명절 때마다 한 명의 죄수를 놓아 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와 바라빠를 가늠질하였지만, 결국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의 요청에 굴복하였다(마르 15, 1-15; 마태 27, 1-26; 루가 23장; 요한 18, 28-19, 16). 이러한 이야기의 기본적인 틀 외에 마태오 복음서, 루가 복음서, 요한 복음서는 빌라도의 십자가형 선고에 대해서 나름대로 수집한 자료들을 다음과 같이 첨가하였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 마침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아요. 내가 오늘 꿈에 그 사람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어요.”라고 당부하였고(마태 27, 19), 십자가형을 내린 후 빌라도는 마치 자신이 이 일을 억지로 하였다는 듯이 손을 씻으며 자신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시켰다(마태 27, 25-26)고 하였다. 루가 복음서에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은 빌라도가 예수를 로마 제국의 꼭두각시 분봉왕 헤로데에게 보냈으나, 헤로데 역시 예수에게서 그릇된 죄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루가 23, 6, 12)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요한 복음서는 기본적인 골격에서는 공관 복음서와 일치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무척 다르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처형할 생각조차 전혀 없었다. 따라서 예수를 유대인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지문했다. 그러나 죄수를 처형할 권리가 없다는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예수를 다시 불러들여 몇 가지 질문을 하였으나(요한 18, 38), 역시 죄가 될 만한 일을 발견하지 못하여 결국 군중의 판단에 맡겼다(요한 18, 28-40). 루가 복음 13장에는 빌라도가 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즉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빌라도가 회생 재물을 바치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13, 1). 사실, 매년 과월절이 되면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희생 제사를 지냈다. 빌라도가 이런 희생 제사를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살해하였다는 것인데,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떤 사건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기록들과 공통점을 찾아내기 어렵고, 주관적인 성격이 너무 강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일이 가공의 사건이라고 간주하기도 어렵다. 빌라도가 예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점이 분명하고 그의 거주지가 예루살렘이었으며, 갈릴래아 사람들은 거칠다고 소문나 있었기에 이들과 관련해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빌라도 이야기 대한 평가〕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한 내용은 ‘수난 사회에 속하는 몇몇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수난 사회와 복음서의 사회를 중에서 분량이 가장 많고 그 형성 과정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빌라도 이야기’(혹은 ‘바라빠 이야기’)만 분리해 분석하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빌라도 이야기’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사실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빌라도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은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형에 최종적인 선고를 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로마 제국 특유의 ‘십자가형’은 국가에 대한 반역 죄인을 처형하는 중범죄였다. 십자가형을 당한 또 다른 인물로는 ‘검투사의 난’을 주도하였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 기원전 73~71)가 있는데,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국가 반역죄로 고발되어 처형되었음을 뜻한다.
둘째,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복음서 전반에 언급된 내용으로, 예수의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가르침들이 유대교 회당의 기본적인 입장들과 크게 반대되었으므로 위기 의식은 그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졌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도 보면 유대인들 중 고위층 인사들이 예수를 고발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신약성서의 내용과 일치한다(『유대 고대사』 18, 3, 3). 셋째, 마태오 복음서, 루가 복음서, 요한 복음서에 각각 첨가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바탕에 깔린 서술 입장은 마르코 복음서와 일치한다. 즉, 빌라도가 실제로 십자가형을 구형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에게 가능한 관대하였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군중들이 다시 한번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었고,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처형당하였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 마태오 복음서는 빌라도 부인의 꿈 이야기를 첨가하였고, 루가 복음서는 헤로데를 등장시켰으며, 요한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에게 다시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결국 예수의 죽음에 대해 빌라도는 최소한의 책임만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우선 예수보다는 바라빠를 선택한 유대인들에게 있고, 가장 큰 책임은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빌라도의 세 번에 걸친 질문에 매번 군중을 선동하여 바라빠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마르 15, 11-14). 이에 비해서 이방인인 빌라도는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았고 오히려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묘사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마르코 복음 15장 33~41절에 나타나는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로마 백부장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참모습을 비록 유대인들은 몰랐지만 이방인들은 제대로 알아봤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반(反)유대적인 색채는 바로 유대교와 결별하였던 초대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에서 이방인들도 당당히 그리스도인에 속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초대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제시해 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 바라빠)
※ 참고문헌  J. Gnilka, Das Evangelium des Markus, 《EKK》 2-2, Neukirchen, 1979, p. 300f/ D. Lührmann, Das Markusevangelium, 《HKNt》 3, Tübingen, 1987, p. 211f/ R. Pesch, Markusevangelium II, 《HtK》 2-2, Freiburg, 1984/ 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London, 1966/ L. Schenke, Studien zur Passionsgeschichte des Markus, 《FB》 4, 1971/ I.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INC, 1978/ S. Sandmel, 《IDB》 3, p. 811f/ J. Blinzler, 《LtK》 8, p. 504f/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 분도출판사, 1991, p. 218 이하/ 《기독교 대백과 사전》 8, 기독교문사, 1980, pp. 245~248. 〔朴泰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