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렘, 니콜라 조제프 마리 Wilhelm, Nicolas Joseph Marie(1860~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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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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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 례명은 요셉. 한국명 은 홍석구(洪錫九) 1860년 1월 24일 프 랑스 메스(Metz) 교 구 알자스로렌 지방 의 슈파이헤른(Speic- hern)에서 태어나서 1881년 9월 6일 차 부제로 파리 외방전 교회 신학교에 입학 하였으며, 1883년 2 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같은 해 3월 28일 페낭(Penang) 신학교에 파견되어 약 5년 동안 신학 생 양성에 전념하다가 1888년 말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 되어 이듬해 2월 한국에 입국한 빌렘 신부는, 서울 주교 관에 머무르면서 한국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7월 1일 제물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 다. 곧바로 성당 신축을 계획하고 현 성당 부지 3 200여 평을 매입한 후 정초식을 갖는 등 본당 기틀을 다지기 위 해 노력하던 빌렘 신부는, 1890년 11월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어 활동하다가 프랑스 국적 취득 문제로 1893년 8월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 해 말 본국 으로 돌아갔다. 그의 고향 알자스로렌이 1871년 독일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국적상 독일 국민이었던 빌렘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국적 취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1년 반 만에 다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5년 9 월 12일 제물포에 도착한 빌렘 신부는 건강이 악화된 경 기도 갓등이(현 旺林) 본당의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 부를 대신하여 10월 16일에 임시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미리내[美里川] 공소 강당에 거처를 정한 후 그 해 10월 28일부터 약 4개월 동안 경기도 일대의 31개 공소 를 순방한 빌렘 신부는, 무리한 사목 활동과 장티푸스로 병자성사까지 받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기도 하였었다. 한편 1896년 4월에 있은 성직자 연례 피정 때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사목 분할이 결정됨에 따라, 평안도는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계속 담당하였고, 황 해도는 빌렘 신부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에 빌렘 신부는 같은 해 8월 1일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文山面)의 마렴(麻簾)공소에 부임하여 마렴 본당을 설립한 후 안흘(安 屹 · 은율(殷栗)을 비롯한 10개 공소와 500여 명의 신 자들을 돌보는 한편, 10월 4일에는 임시 초가 성당을 지 어 봉헌하였으며, 신자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해 소규모 의 학당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1897년 여름에는 마렴과 머내[遠川] 사이에 있는 기와집 한 채 를 매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고 이전한 뒤 본 당 이름을 매화동(玫花洞)으로 바꾸었으며, 1897년 진 남포(鎮南浦)가 개항되자 그곳에 공소를 개설하였고, 얼 마 후에는 용정리(龍井里)에 성당 부지를 마련하고 본당 분리를 추진하였다.
그 무렵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淸溪洞) 일대에서는 빌 렘 신부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황해도 지역의 유지인 안 태훈(安泰勳, 베드로) 일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개종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매화동 본당에서 약 1년 8개월 동안 사목하던 빌렘 신부는 1898년 4월 말 청계 동으로 옮겨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 써, 매화동 본당은 우도(P. Oudot, 吳保祿) 신부가 담당 하게 되었다. 청계동에 부임한 즉시 해주 읍내에 공소를 개설하기 위하여 노력한 빌렘 신부는, 대아골 · 먹방이 · 염촌 등지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신자들의 도움으 로 그 해 10월 사제관 신축과 성당 증축 공사를 실시했 으며, 교세가 급성장하자 1899년 5월 재령(載寧) 공소 를 본당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이를 르 각(Le Gac, 郭元 良) 신부에게 인계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의 활발한 개종 운동을 우려하던 지방 관리들이 신자들의 비행과 월권 행위를 트집잡아 천주교 단속령을 시행하였으며, 부당한 처분으로 피해를 입는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빌렘 신부는 치외 법권이 있는 선교사였으므로 교회측과 관리들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여 직접 항의 서한을 작성 하거나,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 또는 주한 프랑스 공사관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신천(信 川), 장연(長淵) 등 여러 고을 주민들이 그의 편지와 명령을 받은 신자들로부터 행패를 당했다는 고소를 관가에 제기하면서 '해서교안' (海西敎案)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교안은 점차 해주(海州) · 안악(安岳) · 옹진(甕津)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 신자들까지 천주교 신자들을 핍박하는 등 1903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빌렘 신부는 때로는 소송을 통해, 때로는 목사들에게 항의함 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가 1903년 11월 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 면서 겨우 타결을 보게 되었다.
해서교안을 겪은 뒤에도 계속 청계동에서 활동한 빌렘 신부는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安重根, 토마스)과 함께 선교 활동을 하면서 구국 교육에도 앞장섰으며, 뮈텔 주 교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다. 대부 분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족 운동과 독립 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그는 안중근으 로 인해 인식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 또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순(旅順) 감옥으 로 그를 찾아가 격려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이에 그는 장상(長上)의 허락 없이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뮈텔 주 교로부터 2개월 간의 성무(聖務) 정지 처분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밀고로 체포된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 근(安明根, 야고보)이 1910년에 조작된 '데라우치(寺 內) 총독 암살 음모 사건' (일명 105인 사건)에 연루되자 이듬해 2월 그를 면회하고 1913년 7월에 총독부에 그의 사면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1912년 9월 8일, 해주 공소의 종 축복식을 계기로 해주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 대 주임으로 부임한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일가와 관련된 사건으로 뮈텔 주교와 불화가 계속되어 1914년 4월 본 국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고향 알자 스(Alsace)에서 사목하면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 을 버리지 않았다. 1919년 베르사유 협상이 진행될 당 시 파리를 방문한 한국측 대표들을 도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던 빌렘 신부는, 1938년 5월 6일 알자스 에서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홍석구 ; → 매화 동 본당 ; 안악 사건 ; 안중근 ; 진남포 본당 ; 청계동 본 당 ; 해서교안)
※ 참고문헌 《교회사 연구》 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1 한국 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Ⅰ~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 · 1993/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서울교구 연보》 I · Ⅱ 천주 교 명동 교회, 1984 · 1987/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 교회, 《답동 대성 당 100년사》, 1989/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 양교구 사》, 분도출판사, 198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黃海道天主教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崔奭祐, 《韓國天主教會의 歷 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ㅡ, 〈海西敎案의 研究>, 《韓國敎會 史의 探究》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pp. 413~461/ 一,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 운동>, <교회사 연구》 11집, 1996, pp. 37~42/ 윤선자, <'한일합방'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 신부>, 《한국 근 현대사 연구》 4집, 1996, pp. 107~131. [李裕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