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

景敎

글자 크기
1
대진경교유행중국비
1 / 5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중국에 전래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부정하고 마리아가 천주의 모친임을 부정한 이단으로서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리우스파는 소멸되지 않고, 그 일부가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다. 처음에는 그것이 페르시아에서 파사교(波斯敎)로 불렸으나 그 후 그 기원이 대진(大秦, 로마 제국)임이 인정되어 대진경교(大秦景敎)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 경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당나라 때인 635년, 이해에 페르시아인 알로펜(Alopen, 阿羅本) 사제가 당나라 수도인 장안(오늘의 西安)에 와서, 3년 후 태종(太宗)의 허가를 얻어, 그리스도교를 설교하고 교회를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잇따라 사제들이 와서 선교 활동을 하는 한편, 황제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경교는 꽤 성행하였다(신도 3천 명).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회원들에 의해 중국 서안(西安)에서 경교비(정확히는 大秦景教流行中國碑)가 발견됨으로써(1625) 밝혀졌다. 이 비는 781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에서 그때까지의 약 150년 간의 경교 역사를 밝히고 있다. 이 비문은 예수회원에 의해 계속 연구되었는데 트리고(Nicolas Trigault, 중국명 金尼閣) 신부는 서안에 직접 가서 비문을 조사 연구하고, 라틴어로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디아스(Emmanuel Diaz) 신부도 경교 비문을 연구하였다. 그밖에도 마태오 리치 신부와 함께 일하던 가톨릭 신자 이지조(李之藻) , 서광계(徐光啓), 고염무(顧炎武), 왕창(王昶) 등도 비문을 연구하였다.
경교는 무종(武宗)의 박해 때(845) 크게 타격을 받았다. 경교의 선교사는 이제 변방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10세기에 거의 와해되었던 경교는 몽고군의 보호로 다시 일어났다. 11세기에 몽고 왕들이 경교에 입교하였고, 그중 한 사람은 알렉산델 3세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고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음 원나라 때 경교가 다시 성행하여 각처 주요 도시마다 경교 교회가 서고 신자수도 날로 증가하자, 1281년 중국에 총대주교좌까지 설립되었다. 이때는 경교로 불리지 않고 야리가온(也里可溫)으로 불렸다. 그러나 원의 멸망과 함께 14세기에 경교와 천주교는 중국 땅에서 사라졌다.
〔경 전〕 경교의 경전은 500여 권이나 되는데 돈황(敦煌)에서 서청미시소경(序廳迷詩所經), 존경(尊經), 일신론(一神論), 삼위몽도찬(三威蒙度讚),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 대진경교선원지본경 (大秦景敎宣元至本經), 대진경교대성통진귀법천(大秦景敎大聖通眞歸法讚) 발견되었다. 이 한문 경전들은 635~700년에 장안에서 번역된 것이다. 경전을 번역한 아라본 경전 등이 모두 외국어인데, 그 이유는 경전을 번역할 수 있는 당나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문 경전은 불교와 도교적인 색채가 짙다. 경교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처음 들어와 불교 승려들의 힘을 빌려 경전을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1905년 독일 중앙아시아 학술 탐험대가 신강 고창(高昌) 부근에서 시리아문 경전을 발견하였다. 1725년 요셉 프랑스와(Joseph François, 중국명 馮秉正) 신부가 시리아문 경전을 발견하였으며 북경(北京) 오문(午門)에서 시리아문 경전이 발견되었다.
〔유물 · 유적〕 천주(泉州)에서 경교도의 묘석 20여 개, 수원성(綏遠省)에서 경교도의 묘석 30여 개, 북경 서남부 교외에서 높이가 4척, 너비가 1척이나 되는 대리석 경교도의 묘석이 발견되었다. 1919년 방산현(房山縣) 삼분산(三盆山)에서 대리석 묘석이 발견되어 북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29년 양주(揚州) 회교 사원에서 경교 묘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십자가와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원나라 때 것으로 추측된다. 신강성과 소련 경계선 이려(利黎) 지방에서 경교도의 묘석 600여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묘석들은 11~13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포두 황하(黃河) 지역 분묘(墳墓)에서도 청동 십자항패가 많이 출토되었다. 1,300여 개에 달하는 청동 십자항패는 원압식(元押式) 항패 (項牌)로 한(漢) 이래의 동인(銅印)과 비슷하다. 십자가 모양은 각기 다르며 그리스도상이 부각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원나라 때 경교도들은 십자가를 집안과 건물 밖에도 걸고 관(冠)에도 부착(附着)시키고 목에도 걸었다. 혹은 말, 낙타, 나귀에도 패대(佩帶)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하여 원나라 때는 경교를 십자교(十字敎)라고도 불렀다. 평상시에 십자패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죽으면 몸에 지닌 채로 매장하였다. 포두 일대에서 발견된 청동 십자항패
는 호부(護符), 휘장(徽章), 인장(印章)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에도 경교가 전래했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동양 전래사, 그리스도교와 불교 교류사를 연구한 영국인 고든(E.A. Gordon) 여사는 서안에서 발굴된 경교비 모조품을 1917년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경내에 세웠고 경주 석굴암 안에 있는 전실 양벽에 부각된 신상(神像) 중 두 상은 페르시아 무인상(武人像)과 같고 내벽에 부각된 십이면관음상(十二面觀音像), 십나한(十羅漢)은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56년에는 경주에서 유물로 보이는 3점(돌 십자가, 구리 십자가, 성모상)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그 유물은 출토지 및 출토 시기도 불확실할 뿐 아니라 십자가는 건축 문양, 성모상은 관음상으로 보이기도 하므로 아직 이에 대한 학계의 정설은 없다. (→ 네스토리우스주의 ; 중국 교회사)
※ 참고문헌  大秦景敎流行中國碑(781), 西安 박물관 碑林 소장 拓本/ E. Diaz(陽瑪諾), 《景教流行中國碑頌正詮》 P.Y. Saeki, The Nestorian Documents and Relics in China, Tokyo, 1937/ F.S. Drake, Nestorian monasteries of the T'ang Dynastyl H. Havret, La stele Chrétieme de Singanful H. Bernard, La Décuverte de Nestorieus Mongols aux Ordos et I'Historie an- cienne du Christianisme en Extrême-Orient, 天津, 1935/ 佐伯 好郎, 《景敎 の研究》, 東方文化學院東京研究所, 1935/ E.A. Gordon, Arian Christol-ogy and the Mayana. 〔徐良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