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愛
Ⅰ. 성서에서의 사랑 · Ⅱ. 윤리 신학에서의 사랑 · 〔라〕amor · 〔영〕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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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확증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 나. 사랑은 하느님의 인간과의 관계,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연관시켜 서술하는 데 사용되는 공통어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따 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며 또한 그 이웃을 사 랑해야 한다. 즉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사랑 의 근거가 된다. 성서의 사랑은 하느님의 속성이나 인간 의 본성에 자리잡은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사랑은 관념적 사상 체계에 속하는 것 이 아니라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 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 성을 어떻게 대하였는지에서,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 스도의 삶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성령 의 역사(役事)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새 생명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확인하는 데서 드러난다. Ⅰ . 성서에서의 사랑
〔의 미〕 공관 복음서에서는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 자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마태 22, 37-40 ; 마르 12, 28-34 : 루가 10, 25-28)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 수 그리스도가 준 새 계명이라고 하였고(요한 13, 34 ; 15, 12 ; 1요한 3, 11. 23 ; 4, 21),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근본 동기는 하느님의 사랑에 있다고 하였다(요한 3, 16 ; 1요한 4, 9). 요한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 다"(1요한 4, 8. 16)라는 신학적인 선언을 하였다. 바오로 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 의 확증이라고 하였으며(로마 5, 8),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하였다(로마 13, 8-10). 또 바오로는 그 리스도인이 서로에게 실천하는 사랑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좋은 삶의 길로 추천하였으며(1고 린 12, 31b : 갈라 5, 6),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 길이 남 을 가치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이며(1고린 13, 13)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그리 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의 종합으로 제시하였다(2고린 13, 13).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근본 동기인 동시에 동력이며 구원사의 목표이다. 사랑은 하 느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람직한 궁극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베드로와 부활한 예수 사이에 이 룩되어야 할 궁극적인 관계를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 여 표현하였다(요한 21, 15-17). 예수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거듭해서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하고 물었 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예" 하고 대답하면서 "제가 주 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는 말을 덧붙 였으며, 예수는 이 답변에 대하여 "내 양을 먹여 기르시 오" (두 번째에는 "내 양을 지켜 돌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사랑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 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의 여부는 그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의 인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사랑한다는 말은 감정적 차원 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 떤 가시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만 그 실체가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사 랑이라는 개념은 신구약 성서 내용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하나 의 주요한 열쇠의 기능을 하지만, 그 것은 모든 신학적 진술을 마무리짓는 마지막 낱말(last word)로 머무를 수는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또다시 다 른 말로 해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용 어〕 신약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명사와 동사로는 각각 거의 대부분 '아가페' (αγάπη ; 약 113회)와 '아가파 오' (ἀγαπάω ; 약 135회)가 사용되었다. 신약성서 이전의 그리스어에서는 이 단어가 전혀 통용되지 않았었는데, 신약성서 저자들이 칠십인역 성서에서 이 용어를 채용했 다. 그리스어 '에로스' (ˈɛrɒs, 사랑)와 '에라오' (ἐράω, 사랑하다)는 주로 남녀 사이의 사랑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 었으므로,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 았다. 반면에 주로 친구 사이의 사랑을 뜻한 '필레오' (φιλέω, 사랑하다)는 신약성서에 22회 등장하는데, '필레 오' 는 '아가파오' 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하바' (אַהֲבָה) 혹은 '아해브' (אָהֵב)이다. 이것은 남녀, 부부, 부모와 자녀, 친구와 친구, 종과 주인, 신하와 왕, 하느님과 인간 등등 의 모든 인격적 존재 사이의 사랑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칠십인역 성 서에서는 주로 '아가페' 혹은 '아가파오' 로 번역하였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 랑을 표시하는 중요한 낱말로 '헤셋' (חסד)이 있다. 칠 십인역 성서에서는 이 단어를 주로 '엘레오스' (ελεος, 자 비)로 번역하였으며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거의 '사랑' 으로 번역하였다. 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 하는 경우에 '라하밈' (רַחֲמִים) 혹은 '라함' (רַחוּם)이 사용 되었는데 '라함' 은 칠십인역 성서에서 '아가파오' 로 5 번, '엘레에오' (ἐλεέω, 불쌍히 여기다)로 26번, '오이크테 이로' (οἰκτείρω, 가엽게 여기다)로 5번 번역되었다. 또한, '하난' (חנן)라는 동사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표현한 낱말이다(출애 33, 19 : 2사무 12, 22 ; 2열왕 13, 23 ; 2역대 30, 9 ; 시편 77, 10 등).
〔사랑의 현상학〕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랑이 나타나는 현상을 4가지 범주로 나누면, 첫째는 자연적 현상으로서 인간의 본능적 사랑 이며, 둘째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신적 · 초월적 사랑 이다. 그리고 셋째는 하느님에 대한 의무로서 인간의 종 교적 사랑이며, 넷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무로서의 윤리적 사랑이다. 성서가 인간에게 참된 삶의 길로 제시 하는 사랑은 둘째 · 셋째 · 넷째 사랑이다. 이 세 가지 사 랑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 의 본능적 사랑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데 반하여, 성서가 제시하는 사랑은 '하느님-인간-인간' 이라는 세 극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중에서 하느님 은 기본이 되는 중심 축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 신 사랑이 나머지 두 가지 사랑의 대전제이자 근거요 근 원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사랑보다 선행(先行) 하며,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윤리적 사랑은 하느님의 사 랑에 대한 응답일 따름이다. 성서는 첫째 범주에 속하는 인간 본래의 본능적 사랑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토대로 삼지도 않는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세리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이방인들과 죄인들도 그렇게는 한다고 말하였다(마태 5, 46-47 ; 루가 6, 32).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이야기에 나타나는 사랑의 행위는 자연적 인간으로서 본연의 사랑의 가능성 을 전제한 것이다(루가 10, 30-37). 멜리데 섬 사람들이 바오로 일행에게 베풀어 준 인정도 자연적 인간의 사랑 의 행위이다(사도 28, 2). 그러나 성서의 사랑은 스토아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유적 존엄성에 근거 한 어떤 이상(理想)이 절대로 아니다. 또한 하느님의 존 재론적 본성에서 유추한 어떤 가치도 아니다. 성서가 하 느님의 사랑을 말할 때에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통해 서 이룩된 새로운 세계 현실과 인간의 새로운 삶의 관계 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어떤 감정 이나 사랑이라고 하는 어떤 사상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 라 역사 속에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를 증언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해진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며,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한다. 따라서 사랑에 관한 성서의 언어는 사상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적 범주에 속한다. 결국 인간적 사랑과 성서적 사랑은 질 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질적 으로 철저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완전히 분리해서 다룰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서적 사랑만을 표현하는 데 사용 되는 특별한 용어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 히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적 사랑과 신적 사랑을 표현하는 용어가 완전히 겹친다.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에서 남 녀 사이의 감성적 사랑을 나타내는 낱말인 '에로스' 나 '에라오' 를 완전히 배제한 채 신적 사랑을 표현하는 특 수한 용어인 '아가페' 혹은 '아가파오' 를 도입 · 사용하 였지만, 이 단어는 신적 사랑만을 배타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사랑을 표현하는 데도 사 용되었다(마태 6, 24 ; 루가 6, 32 ; 7, 5. 42. 47 ; 요한 3, 19 ; 12, 43 ; 2디모 4, 10 ; 2베드 2, 15 ; 1요한 2, 15). 성 서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서 부모와 자 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인간적 사랑을 비유 또는 상징으 로 사용하였다(시편 103, 13 ; 이사 49, 15 ; 66, 13 ; 예레 31, 20 ; 호세 1-14장 ; 마태 7, 9-11).
〔구약성서〕 구약성서에서는 '아하바' 나 '아헤브' 를 사 용하여 인간의 자연적 사랑을 광범위하게 묘사하였다. 이 사랑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평 가될 수도 있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사랑한 것 (창세 24, 67), 종이 자기 처자와 상전을 사랑하는 것(출 애 21, 5), 사울이 다윗을 사랑한 것(1사무 16, 21), 요나 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1사무 18, 1. 3 ; 20, 17 ; 2사무 1, 26), 히람이 다윗을 사랑한 것(1열왕 5, 1)은 정당한 것이 다. 반면에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사랑한 것(2사무 13, 1), 솔로몬 왕이 많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한 것(1열왕 11, 1), 여호사밧 왕이 야훼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 것(2역 대 19, 2), 이방 신을 사랑하는 것(예레 2, 25), 우상을 사 랑하는 것(예레 8, 2 ; 호세 9, 10)은 부당한 것이다. 정의 를 사랑하는 것(시편 45, 7)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시 편 122, 6)은 정당하나 죽음(잠언 8, 36)과 은(전도 5, 10) 과 뇌물(이사 1, 23)과 사방으로 쏘다니기(예레 14, 10)를 사랑하는 것은 부당하다.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 것(1사무 18, 20. 28), 아가서에 묘사된 남녀의 사랑은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며,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 것(판관 16, 4) 은 중립적으로 보인다. "사랑은 온갖 허물을 덮어 준다" (잠언 10, 12 ; 17, 9)와 "사랑이 한결같은 것이 친구다" (잠언 17, 17)에서 '아하바' 와 '아헤브' 는 절대적 용법으 로 사용되었으며 긍정적인 가치를 표시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사랑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사랑의 근본이다. 구약성서 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특수한 사랑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 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마음속의 어떤 심리적 현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어떤 가시적인 행위로 표출되었 다. 하느님의 사랑은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을 만민 중에 서 선택하시는 데서 드러났으며(신명 10, 15 ; 시편 47, 4), 둘째로 이스라엘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데서 드러났다(신명 7, 8 ; 시편 60, 5 ; 이사 43, 4 ; 63, 9 ; 호세 11, 1. 4). 그리고 셋째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복을 내리시는 데서 드러났다(신명 7, 13 ; 33, 3. 12 : 예레 31, 3 ; 호세 11, 4).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계약' 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하느님은 계 약을 맺은 백성의 구성원에게 '헤셋' (사랑)을 베푸신다 고 약속하셨다(출애 20, 6 ; 신명 5, 10 ; 7, 9. 12 ; 이사 54, 8. 10 ; 미가 7, 20).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헤 셋' 으로 인도하시며(출애 15, 13 : 예레 31, 3) 하느님은 '헤셋' 이 크시어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요엘 2, 13 ; 미가 7, 18). 하느님은 택하신 백성을 '라함' (불쌍히 여기다)하 시기에 계약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며(출애 33, 19 ; 신명 13, 17 ; 33, 3 ; 2열왕 13장 ; 23장 ; 이사 14, 1 : 49, 13 ; 54, 8 ; 55, 7 ; 예레 30, 18 ; 31, 20 ; 42, 12 ; 에스 39, 25 ; 호세 2, 23 ; 14, 3 ; 미가 7, 19 ; 스가 10, 6), 하느님은 '라훔' (רַחוּם, 자비)을 베푸셔서 구원하신다(2사무 24, 14 ; 2역대 30, 9 ; 느헤 9, 19. 27-28. 31). 또 하느님이 은혜 를 베푸시는 것을 '하난' 이라는 동사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비롭고(라훔) 은혜롭고(하눈)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헤셋)과 진실이 많은 하느님"이라고 부르거나(시편 103, 8 ; 145, 8 ; 요엘 2, 13 ; 요나 4, 2 ; 참조 : 시편 86, 15), "은혜로우시고(하 눈) 자비하신(라훔)” 분이라고 불렀다(시편 111, 4 ; 참조 : 느헤 9, 17).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헤셋' (사랑)을 간구 하였고(시편 6, 4 ; 17, 7 ; 25, 7 ; 31, 6 ; 33, 18 ; 36, 10 : 40, 11 : 44, 26 ; 51, 1 ; 61, 7 ; 69, 13. 16 ; 85, 7 ; 90, 14 ; 119, 41. 88. 149. 159 ; 143, 12), 하느님의 '헤셋' 을 찬양하였다(시편 18, 50 : 21, 7 ; 23, 5 ; 26, 3 ; 31, 7. 21 ; 32, 10 : 33, 5 ; 36, 5. 7 ; 40, 10 ; 42, 8 ; 48, 9 ; 57, 3 ; 59, 10. 16 ; 62, 12 ; 63, 3 ; 66, 20 ; 86, 13. 15 ; 89, 1-2. 14. 24 94, 18 ; 98, 3 ; 100, 5 101, 1 ; 103, 4. 8. 11. 17 ; 106, 1. 7. 45 ; 107, 1. 8. 15. 21. 31. 43 ; 108, 4 ; 117, 2 ; 118, 1-4). 특히 시편 136편에서는 하 느님이 행하신 일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절마다 하느님의 '헤셋' 을 찬양하였다. 하느님은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 로우시다. 하느님이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 의지에 속하며, 그것은 하느님의 고유한 품성 에 근거한다.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 사회적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를 밝히면 하느님의 사랑의 특성이 드 러난다.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 주시고 떠 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 는 분이시며(신명 10, 18), 옳고 바른 일을 사랑하시며(시 편 33, 5 ; 37, 28),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묶인 자들을 풀어 주시 고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거꾸러진 자들을 일 으켜 주시며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 어 주신다(시편 146, 7-9).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푼다"(출애 20, 6 ; 신명 5, 10 ; 7, 9)고 하 는 하느님의 약속은 자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조건을 나 타내셨다기보다는 하느님이 이미 이룩한 사랑의 관계 속 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 느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올바른 삶의 지침으로 율법과 계명을 주셨다. 그런데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느님을 사랑하라" (신명 6, 5 ; 30, 6)는 명령은 모든 율법과 계명의 요구를 요약한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 마음속의 심리적 상태만을 뜻하지 않으며, 다른 가시적인 행위로 표출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공 경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나란히 언급된다(신명 10, 15 ; 11, 1. 13. 22 ; 19, 9 ; 30, 16. 20 ; 여호 22, 5).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미워해야 한다(시편 97, 10).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시절 하 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좇았는지에 서 드러난다(예레 2, 2).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응답만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또한 사랑해야 하며(레위 19, 18)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명 10, 19). 인간 사이의 윤리적 사랑도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 적 사랑과 마찬가지로 인간 마음속의 심리적 현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윤리적 사랑은 "동족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되고" (레위 19, 18), 함께 사는 외국인을 같은 동포처럼 대접하라(레위 19, 34) 는 명령과 결합해서 제시된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께 대한 종교적 사랑에 대한 명령이 극히 적지만, 인간에 대 한 윤리적 사랑의 명령도 2~3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 은 종교적 사랑과 윤리적 사랑을 중요하지 않게 다루었 기 때문이 아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는 율법 안에 모두 규정되 어 있어서 이러한 관계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규제하기보다는 정의 · 공의 · 계약 따위의 법적 개념을 이용해서 서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간주하였기 때문 이다.
〔신약성서〕 공관 복음서 : 예수가 '아가페' 나 '아가파 오' 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사랑을 가르친 경우는 극히 적 다. '사랑' 이라는 명사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 에서 각각 한 번만 사용되었으며 '사랑하다' 라는 동사도 공관 복음서에 병행 구절까지 합해서 25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여 인간 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서술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다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루가 6, 35)라는 말씀이 한 번 있을 뿐이다. 공관 복음서 에 사랑이라는 낱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예 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주요한 주제가 아니었 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의 삶 전체가 하느님 의 사랑을 증언한 것이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죄 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등의 예수의 모든 활동과 가르침이 곧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 사랑의 표현이다.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의 비유(루가 15, 11-32),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 자의 비유(루가 15, 4-7),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마태 20, 1-15), 큰 잔치의 비유(루가 14, 16-24),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 23-35)는 하느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 다. 특히 산상 설교에서는 들꽃도 아름답게 입히시고 새 들도 먹이시는 하느님이 하물며 사람을 돌보시지 않겠느 냐는 교훈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설명한다(마태 6, 2532). 그리고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리신다는 사례를 들어서 모든 사람 에 대한 하느님의 무차별적인 사랑을 강조하였다(마태 5, 43-48).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한 논쟁과 안식일 논쟁과 결부해서 호세아서 6장 6절을 인용하여 하 느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분임을 역설하였으며 (마태 9, 13 ; 12, 7),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 36)라는 가르 침에는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이 부각되어 있다. 이 두 경우 히브리어적 관점에서 판단하면 '자비' 는 '사 랑' 과 동의어이다. 예수의 전체 활동과 가르침은 하느님 의 사랑을 잘 반영한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 한 것은 그 사랑이 내용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를 잘 드러내 준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이른바 이중 계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어떤 것이 냐? 는 물음에 예수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비슷합 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마태 22, 37-40)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 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 모든 계명의 요구가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각각의 계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사랑의 정신이 그 동기와 추진력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그 실천은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푸성귀의 10분의 1을 바 치는 데 이르기까지 율법의 사소한 조문까지도 철저하게 준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정의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고 책망하였던 것이다(루가 11, 42).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사람이 두 주 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애착을 동일한 수준에 놓아서는 안된다(마태 6, 24).
인간의 윤리적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우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 19, 19 : 22, 39 ; 마 르 12, 31. 33)라는 계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웃 사랑 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인 이웃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여러분의 원 수들을 사랑하시오"(마태 5, 44 : 루가 6, 27. 35)라는 과격성에 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며(마태 5, 44)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며(루가 6, 27) 일체의 보복을 단념하는 일(마태 5, 38-42)은 인간 관계에서 최대의 장애물을 철폐하는 것이 며,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의 존재가 소멸되고 다 같 이 이웃으로 만나는 사랑의 공동체는 인류 역사의 궁극 적 목표점이다.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 성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근 거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 사랑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식의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존재론적인 명제에 서 추론한 어떤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한 행위를 가리킨다. 인간은 이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며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의 무를 지게 된다. 이 사실은 다음 두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 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들이 갚을 길이 없자 돈놀이꾼은 두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들 중에 누 가 그를 더 사랑하겠습니까?" (루가 7, 41-42) 이 비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드러 낸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왕으로부터 탕감 받은 어떤 종이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밖에 안되는 작 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는 비유(마태 18, 23-35)는, 하느님의 사랑 을 체험한 사람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실증한 분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활동 속에서 바야흐로 하느 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마태 12, 28 ; 루가 11, 20). 이웃 사랑 또는 원수 사랑에 대한 의무는 바야흐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 속에 나타 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요한 복음서 : 요한의 첫째 편지를 제외하고 신약성서 의 다른 모든 경전에 비해 '사랑/사랑하다' 라는 낱말이 월등하게 여기서 많이 사용되었다( '아가파오' 는 37회, '아 가페' 는 7회, '필레오' 는 13회). 요한 복음서는 '사랑의 복 음서' 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사랑이라는 개념은 요한의 신학을 전개하는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요한 복음 3장 16절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구원 사의 동기, 방법, 목적을 서술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동기)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방법)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 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목적)." 즉 하느 님의 구원사는 사랑에서 출발하여 예수의 전체 삶을 거 쳐서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다. 예수는 생명의 빵이시며 생명이시다(6, 35. 48 ; 11, 25 ; 14, 6). 요한 복음서는 바로 이 구원사의 대주제를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세하게 전개하였다. 이 사랑의 서사시에는 아버지(하느님), 아들(예수), 제자들이 라는 세 극이 설정되어 있다. 이 세 극을 기초로 하여 "하느님의 아버지와 그 아들, 그 아들과 제자들, 제자들 과 제자들, 제자들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 상호 관계 가 성립되는데, 그 관계는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다. 이 모든 관계들 중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기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셨으며(3, 35 : 5, 20 ; 10, 17 ; 15, 9-10 ; 17, 23-24. 26)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 한다(14, 31). 또 아들은 제자들을 사랑한다(13, 1. 34 ; 15, 9).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제자들에 대한 아 들의 사랑의 원동력이다(15, 9 : 17, 36). 아들이 제자들 을 사랑하였으므로 제자들은 아들을 사랑해야 하며(14, 15. 21. 23-24 ; 16, 27) 또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13, 34-35 : 15, 12. 17 ; 17, 23 ; 21, 15-17).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아들에 대한 제자들의 사 랑 여부에 따라 결정이 된다. 즉 제자들이 아들을 사랑하 면 아버지께서도 제자들을 사랑하신다(14, 21. 23 ; 16, 21). 요한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표 현은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사랑을 통해서 하 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예수 를 사랑함으로써만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의 첫째 편지 : 요한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사랑' 또는 '사랑하다' 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여 사랑의 신학 을 전개하였다( '사랑' 은 18회, '사랑하다' 는 28회). 그러나 이 서간과 요한 복음서의 사랑의 신학은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 다" (4, 8. 16) 또는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 다" (4, 7)라고 선언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부각시킨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이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신 데서 나타났으며(4, 9. 10)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실에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3, 16). 그러나 이 서간에는 요한 복음서와는 달리 아버지 와 아들 사이의 사랑, 즉 예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요 한 복음서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은 오 직 예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을 매개로 해서 계시될 따름인데, 요한의 첫째 편지 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이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하느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사랑 하셨다(4, 10-11. 19 : 이 밖에도 3, 17 ; 4, 9. 12의 '사랑' 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뜻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4, 19-21 : 5, 1-2).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결실을 맺어야 하며(3, 9-14. 23 : 4, 7. 11 ; 5, 2),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 형제들을 사랑하는 데서 구현되며 입증되어야 한다(3, 17 ; 4, 8. 12. 16. 20-21).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또한 하 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입증되는데,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동의어이다(5, 3 ; 참조 : 2, 7-11). 왜냐하면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하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3, 23). 이 서간에는 예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대하여 명시 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서간의 저자가 이 사랑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숙지된 사실로 전제하였 기 때문이다. 저자가 역점을 두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 서로 사이의 사랑에서 그 목표에 도달 한다는 사실이다.
바오로의 서간 : 바오로는 하느님의 구원사를 사랑이 라는 개념으로 진술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로 마서 5장 8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인간에 대 한 하느님 사랑의 확실한 증거로 간주하였다. 뿐만 아니 라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을 사랑해 주신 사건으 로 체험하였다(갈라 2, 20).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 랑을 받은 사람들이며(로마 1, 7 ; 5, 5 ; 8, 37. 39 ; 1데살 1, 4 ; 에페 2, 4 ; 2데살 2, 16 : 디도 3, 4) 하느님을 사랑 하는 사람들이다(로마 8, 28 : 1고린 2, 9 ; 8, 3 ; 16, 22 ; 에페 6, 24). 이제 하느님의 사랑 또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라도 극복할 수 있 는 힘이 된다(로마 8, 35. 37. 39).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 에게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현실로 구현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보았다(로마 5, 5 : 15, 30 ; 골로 1, 8 : 2 데살 3, 5). 그는 자신의 서간의 훈계 부분에서 그리스도 인들 서로의 사랑 실천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였다. 그는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촉구하며(로마 12, 10 : 13, 8. 10 ; 갈라 5, 13-14 ; 에페 5, 2)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로마 13, 8. 10 ; 갈라 5, 14). 그는 특히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은사를 예언 · 언어 · 지식 · 기 적 등의 놀라운 능력보다도 더 고귀하며 길이 남을 가장 좋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길로 추천하였으며, 이러한 사랑을 성령의 열매 중 으뜸이라고 지적하였다(갈라 5, 22). (↔ 미움)
※ 참고문헌 J. Becker, Feindesliebe-Nächstenliebe-Bruderliebe : Exegetische Betrachtungen als Anfrage an einen ethisches Problemfeld, 《ZEE》 25, 1981, pp. 34~371 G. Bornkamm, Das Doppelgebot der Liebe, Studien zurAntike und Urchristentum, Gesammelte Aufsätze Ⅱ , Miinchen, 1970, pp. 69~921 J.P. Hyatt, The God of Love in the Old Testament, To Do and to Teach, ed. R.M. Pierson, Lexington, 1953, pp. 15~26/ W. Klassen, Love in the New Testament, Supplementary Volume, pp. 557~558/ J. Moffat, Love in the New Testament, London, 1929/ A. Nygren, Agape and Eros, trans. by P.S. Watson, London, 1953/ J. Piper, Love Your Enemies : Jesus' Love Command in the Synoptic Gospels and in the Early Christian Paranesis, 《SNTSMS》 38,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79/ K.D. Sakenfeld, The Meaning ofHesed in the Hebrew Bible : A New Inquiry, HSM 17, Missoula, 1978/ C. Spicq, Agape in the New Testament, vol. 1~3, St Louis, 1966/ V. Warnach, Agape : Die Liebe als Grundmotiv der neutestamentlichen Theologie, Düsseldorf, 1951. 〔金昌洛〕
Ⅱ . 윤리 신학에서의 사랑
〔의 미〕 그리스도교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경 험 세계 안에서 어떤 개별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체적인 것이 우수하고 완벽하게 되기 위하여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 면 구원과 의화(義化), 즉 인간의 총체는 그리스도교적 으로는 사랑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구원과 의화는 사 랑을 통하여 주어졌으며 사랑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구약성서는 이스라 엘 백성들이 자신과 계약을 맺은 하느님과 함께 경험하 였던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 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사랑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여 준다. "마음을 다 기 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 를 사랑하여라"(신명 6, 5). 이와 같이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듯이 백성들도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 을 우선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느님 사랑뿐만 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역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써 구약성서의 윤리는 더욱더 성숙해져 간다. "너는 동 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네 이웃 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레위 19, 18). 이것은 후 에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 (토비 4, 15 : 참조 : 마태 7, 12)라는 황금률로 발전하였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이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는 레위기와 신명기에 요 구되어 있는 계명들을 결합시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 랑의 이중 계명을 윤리의 기본 계명으로 만들었다(마태 22, 34-40). 이 사랑은 단순히 상호간의 균형으로 머무르 는 것이 아니라 원수 사랑의 요구로까지 발전하였다(마태 5, 44-47). 여기서 이웃 사랑의 계명은, 구약성서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사랑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하느님 사랑의 계명에 기인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랑의 계명의 척도가 된다(요한 13, 34 참조).
사랑의 계명은 절대적으로 준수되어야 할 의무였으므로, 그것을 위하여 사랑의 계명이 침해받을 수 있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의 계명은 멋진 말로써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써 보여질 때에 비로 소 완성되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 사랑의 기본적인 행위는 인간 정신의 초월적인 구조에 상응하게 항상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서 근본적으로 무한한 미래를 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 랑은 모든 한계를 지닌 대상을 넘어선 절대적인 실재, 다 시 말해서 선(善)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진실한 인간적인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께서 자신 의 계시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시는 사랑에 대한 응답을 말하는데, 이것은 윤리적으로 좋은 모든 행위에 관한 초 월적인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구원의 역사와 모든 개개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명확하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 사랑은 인간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지만 아울 러 새로운 방법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여기 서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찾기 때문이 아니 라 하느님을 긍정하기 때문에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다. 사랑은 상대방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만드 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를 자신과 같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 사랑도 역시 그러하여야 한다. 다른 한편 으로는 인간이 하느님께로 향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충만함과 존엄성을 경험하게 한다.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해도 좋다는 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존엄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가장 웅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전인적(全人 的)인 헌신을 요구한다.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 로, 네 온 힘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 을 사랑하라"(루가 10, 27).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 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사랑하고 그 뜻을 실현 하기 위해 모든 능력과 수단을 다하여 노력한다는 뜻이 다.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은 한편으로는 기도, 묵상, 예 배 그리고 감사와 신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하 느님의 체험 등의 신심 생활을 통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 는 형제애의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 의 좋으심을 아름다운 말로써 찬미하는 것으로 하느님 사랑을 행하였다고 여기거나 형제애의 실천을 위한 현세 적인 노력만으로 하느님 사랑을 완수하였다고 생각하여 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형제애를 위한 사업이나 봉사 활 동은 기도와 예배를 대신할 수 없으며, 이와 반대로 신심 생활은 개인의 현세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행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모든 법, 즉 기도와 예배에 의한 하느님께 대한 신심과 활동적 인 애덕 사업에 의한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포함하고 있다.
"어린 (친구) 여러분, 우리는 말과 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행실과 진실로써 사랑합시다"(1요한 3, 18). 이 성 서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실천이 없는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며 거짓 사랑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의 내적 정 신이 결여된 외적인 행동과 자선 사업도 올바른 사랑이 아니다. 자기 개인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외적 선행은 하 느님이나 이웃을 위한 사랑이 아니고 이기적인 자기 사 랑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선을 자신 이 칭찬과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 버지의 영광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마태 6, 2-4).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 하느님 사랑과 인 간 사랑은 서로 독립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양하게 제시하는 하느님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이웃 사랑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자아를 향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의 일치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 을 하나로 결합시키는데, 분명하게 인간이 행해야 할 유일한 척도로 이웃 사랑을 제시하였다(마태 25, 34-46). 만 일 사랑을 율법의 완성으로 이해한다면(로마 13, 10 ; 갈 라 5, 14) 이웃 사랑 안에는 하느님 사랑도 포함되어 있 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의 일치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일방적인 오해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의 실천과 더불어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요구가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 사랑이 적절하게 이웃 사랑과 그에 상응하 는 지향을 통해서 효력을 발생시킬 때에만 하나의 의미 를 가지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웃이 자아 실현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처럼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위한 수단 이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인간은 이웃을 그 자체로 스 스로 존재하는 인격체로서 긍정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 게 된다. 이와는 달리 이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한 단 순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곳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도 실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의 중재 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대화적인 관련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웃 사랑〕 사랑은 시간적인 한계뿐만이 아니라 상대 방이 호의를 거부하거나 과오를 범함으로써 생겨나는 한계도 역시 넘어선다. 이러한 사랑의 초월성은 이웃 사람 의 인격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무조건적인 이해로서 응답이 없거나 심지어는 거 부와 적대감이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도 실행되어야 한 다. 이와 같이 상대방을 절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임 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모든 사랑을 받아들이며, 또한 하느님 사랑도 실 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이웃 사랑을 하느님의 포괄적인 사랑(루가 6, 36)과 스스로의 봉사(마르 10, 44 이하 ; 루가 22, 26 ; 요한 13, 14 이하)를 통하여 설정하고 있다.
이웃 사랑은 우선 다양한 삶 중에 일어나는 곤경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 주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것 은 일반적으로 윤리적인 행위의 최상의 형태로 인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웃이며, 다시 말해서 가장 급하게 도움과 애정의 징표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이며 이웃 사랑은 어디까지 실행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남는다. 구약성서에서 이웃은 우선 동족들에게 국한되며 (레위 19, 18)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확대 적용되었다(레위 19, 34).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창조주이 시므로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이웃은 단순히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만나 는 구체적인 사람이며, 도움을 필요로 하고 요구를 제기 하는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다(루가 10, 25-37) 물론 예수 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 인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 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루가 10, 37)라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 는 모든 사람에 대한 추상적인 사랑 대신 이웃에 대한 구 체적인 행위를 요구하였다.
타인의 곤경에 대한 봉사로서의 이웃 사랑은 많은 경 우 이러한 곤경이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욕구들을 포함하 고 있기 때문에 사랑은 외면적이고 본능적인 사실도 역 시 참작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웃 사랑이 윤리적인 사랑 이 되기 위해서는 아울러 타인의 윤리적인 인격 개발에 도 기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타인이 자신의 봉사 정신 이나 자신의 인격을 악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이웃 사 랑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참된 이웃 사랑은 보답에 대한 요구와 자신의 인격과 자신의 권리 존중에 대한 요구를 포함하여야 한다. 만약 타인이 자신을 악용하거나 자신의 근본적이고 필요한 권리의 요구들을 침해하는 것 을 허용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이기주의적 으로나 윤리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행동하는 기회를 제공 하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가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할 때만이 만족스러운 혼인 생 활이 될 수 있지, 만약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무조건 복종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성과 상호간의 인격적인 교환이라는 관점에서 후자에게 손실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현재는 타인이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처럼 보이 지만 결국에 가서는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효과를 갖는 이웃 사랑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은 오로 지 역사 속에서 해석된다. 따라서 인격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현재의 모습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와도 관계를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우선 과거의 공통적인 경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회상을 통하여 자신의 결합을 더욱더 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부당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 용서하는 관용도 아울러 보 여 주어야 한다. 과거에 생겼던 아픔의 극복은 솔직하고 충심에서 나오는 사랑의 능력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미래와도 역시 관련되어 있 다. 그는 지금 미리 신뢰를 보내어 그를 분발하게 하며 시간의 제한이 없이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해야 한다.
호의로서의 이웃 사랑은 타인에게 좋은 것을 바란다. 하지만 타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그것에 기인하는 관 용은 사랑의 기본적인 요구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 문에 이웃 사랑은 항상 타인이 지니고 있는 욕구의 종류 와 특성을 향해, 그리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 능성을 향해 방향을 잡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적절하지 못한 가까움에 대한 포기는 고 통을 수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고통을 사전에 예 방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상 대방을 단순히 자기에게 얽어 매기 위한 욕심 때문에 원 하지도 않는 결혼을 하는 경우 또는 자녀가 결혼이나 직 업에 따른 필요 때문에 어머니를 떠나고자 할 때 자녀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 때문에 자녀와의 이별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를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웃 사랑의 다른 형태〕 자기 사랑 : 윤리적인 전형 (典型)으로서의 이타심(利他心)은 개개인이 자기 사랑 에 의하여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웃 사랑의 모든 행 위에는 자기 사랑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 체화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자신 을 존중할 줄 모른다면 이웃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 질 수 없으며, 참된 자기 사랑은 이기심이나 아욕(我慾) 과는 달리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이 해 관계가 서로 상충할 경우 단지 자신의 욕구만을 만족 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게 되는데, 그는 이 해결책에 의하여 가능한 한 쌍방의 이익을 동등하게 추구하거나 좀더 상위의 동인(動因)에 의하여 다른 사람 에게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이익까지도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원수 사랑 :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마태 22, 39)는 말은 이웃 사랑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철폐하였음을 의미한 다. 의심할 이유 없이 사랑의 계명은 차별 없이 모든 사 람에게 실행되어야 하는데, 심지어 예수는 원수 사랑(마 태 5, 43-48)을 이웃 사랑에 없어서는 안될 구성 요소로 보았고, 그 실천에 있어서 민족이나 종교의 소속에 의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에게 있어서 이웃과 형제 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기 때문이다(마태 5, 46-47).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레위 19, 18)는 구 절에 대한 반명제로서 예수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 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마태 5, 44) 라고 요청하였다. 원수 사랑은 그리스도교적인 이웃 사 랑의 특별한 형태인데, 이로써 사람들은 원수를 배척하 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수를 용서해 주며 그가 외적인 위 험에 처했을 때 도와 줄 수 있게 된다. 원수 사랑은 단순 히 소극적으로 적개심이나 증오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 라, 원수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체로 다시 불러들이도록 시도하는 창조적인 사랑을 의미 한다.
형제 사랑 : 예수는 스스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 들이 되셨으므로(로마 8, 29)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겨야 한다(마태 5, 47)는 것은, 가깝지 아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 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의무를 지우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인을 우연히 만나는 경우에 발생하는 관계와 혈연 관계에 속하는 형제 또는 자매에 대한 사랑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단지 이웃을 위해 어떤 무엇을 실천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아 니하고 더 나아가 요구를 제기하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 를 맺는 일까지도 포함된다.
이웃 사랑과 형제 사랑의 구분에는 시간이라는 요인이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알고 지낸다는 것은 그를 더 깊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으 며, 적어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더 잘 처신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의미에서 어떤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사실은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과 형제 사랑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시간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는 인간적인 가까움과 깊은 관계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익명성과 고립감 에 사로잡혀 사는 현대인들이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도 록 교회는 형제적인 관계가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을 창조 해야 할 특별한 과제를 안고 있다.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 에는 무관심, 증오, 질투, 시기심 등이 있다. (⇦ 애덕 ; ↔ 미움)
※ 참고문헌 Karl H. Peschke, Christian Ethics. 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Ⅱ , vol. 2, Dublin, 1986 (김창훈 역, 《그리스도 윤리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의한 가톨릭 윤리학》 2, 분도출판사, 1992)/ Hans Rotter, Grundgebot Liebe. Mitmenschliche Begegnung als Grundsatz, der Moral, Innsbruck, 1983(안명옥 역, 《사랑의 기본 계명》, 분도출판사, 1989/ Hans Rotter, B. Stoeckle Hg., Wörterbuch christlicher Ethik, Freiburg, 1983/ Josef Pieper, Über die Liebe, Miinchen, 1972/ G. Holzherr, Nächstenliebe, 《LThK》7, pp. 765~771. 〔九經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