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룸 전례 - 典禮

〔라〕ritus Sarum · 〔영〕Sarum 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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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룸 전례의 중심지였던 솔즈베리 교구 주교좌 성당.

사룸 전례의 중심지였던 솔즈베리 교구 주교좌 성당.


영국 솔즈베리(Salisbury) 교구 주교좌 성당을 중심으 로 영국에서 발전된 전례.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 604)이 전례를 확립하면서 서방 전례는 7세기 초부터 급 속히 전 서방 교회로 확산되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각 나라나 지방, 또 교회적으로는 교구나 관구에 따라 조금 씩 변형 적용이 허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에도 인정되고 있는 암브로시오 전례이다. 사룸 전례는 영국에서 발달된 로마 전례의 여러 변형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전례이다. 사룸 전례의 중심지는 캔터베리(Canterbury) 관구 산하 의 솔즈베리 교구 주교좌 성당이었다. 캔터베리 관구는 중 · 남부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에 걸쳐서 18개의 교 구를 산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 캔터베리의 주교좌는 베 네딕도 수도원 소속이었기 때문에 그 전례는 교구 성직 자들이 이끄는 다른 교구들에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례와 전례 음악에 앞장 서 나가던 솔즈베리 교구는 전 관구 내에서 당장 유명해 졌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다른 관구들에도 영향을 끼 쳤다. 기록에 의하면 1385년에는 포르투갈에도 전해져 브라가(Braga)에서 실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솔즈베리 교구는 셔본(Sherborne)과 램스버리(Ramsbury)를 합쳐서 1075년에 설정되었는데, 이 당시의 도시 이름이 '사룸' (Sarum)이었다. 1078년에 교구장으로 임 명된 오스몬드(Osmund) 주교에 관한 전설에 의하면, 성 오스몬드가 로마 전례서를 변형하여 《사룸 전례서》(Use of Sarum)를 편찬하였다고 하지만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그보다는 1210년으로 확인되는 솔즈베리 교구의 주교 푸레(Richard Poore, 1198~1228) 시대의 《관례서》(Consuetudinary)와 《예식서》(Oridinal)라는 책이 더 신빙성이 있다. 13세기에 더 보강된 후 1350년경에는 《새 예식서》 (New Ordinal)로 발전한 이 예식서는, 15세기에는 캔터베 리 관구를 비롯하여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및 웨일스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1487년에는 그 내용을 축소 · 정 리하여 사용하기 편리하게 편집되었는데, 《사제 지침서》 (Directorium Sacerdotum)가 바로 그것이다. '피카' (Pica)라 는 약칭으로 불린 이 책을 일반인들은 '피에' (Pye)라고 불렀다.
이 책은 헨리 8세 왕이 성공회를 분리하기 전까지는 매우 많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가 분리된 이 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공동 기도서 제1권》(First Book ofCommon Prayer)이 출판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사룸 전례서가 사라졌다. 왜냐하면 이때 사룸 전례 · 링컨 전 례 · 요크 전례 등을 모두 흡수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밀리에 거행된 가톨릭 전례에서는 계속 라틴 어로 된 사룸 전례가 사용되다가 트리엔트 공의회(1545~ 1563) 이후 전례를 재정리할 때 아주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위령 미사곡(레퀴엠)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 는데 연송(tractus)이 로마 전례서의 내용과는 달리 시편 42편의 "암사슴이 시냇물을" (sicut cervus)이 나오거나 혹은 독서 후 화답송(graduale)이 시편 23편의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si ambulem)가 나타나는 경우, 또는 부속가(sequentia)인 '디에스 이레' (Dies irae)가 빠졌다거나 봉헌송(offetomim)의 중간 가사가 변형되는 등의 경우는 바로 사룸 전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 가톨 릭 음악 ; 서방 전례)
※ 참고문헌  《Ivan Moody의 음반 해설》(Gimell 017), 1988/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Bärenreiter, 1989. 〔白南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