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원 본당
沙里院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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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사리원시 북리 103 소재. 1916년 6월 매화동(玫花洞) 본당 관할 공소 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50년 11월에 폐쇄되었다. 〔교 세〕 1916년 870여 명, 1922년 1,356명, 1937 년 1,300여 명, 1944년 1,284명. 〔역대 신부〕 초대 이 기준(李起俊) 토마스(1916. 6~1923. 7), 2대 백남희(白南 熙) 베드로(1923. 7~1933.6), 3대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193. 6~1936. 5), 4대 김명제(金命濟) 베드로(1936. 5~ 1942. 1), 5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1942. 1~1950. 11)
〔전사 및 공소 시대〕 황해도 출신으로 가장 먼저 천주 교 신앙을 받아들인 신자는 신유박해 때인 1801년 5월 27~28일경 참수된 평산(平山) 출신의 고광성(高光晟) 으로 추정되며, 그의 딸이자 성 박종원(朴宗源, 아우구 스티노)의 처인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역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봉산(鳳山) 출신의 황(黃) 포수도 배교를 거부하다가 1801년 박해 때 순교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황해도 지역에 는 이미 1790년대에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일찍부터 순교자를 배출한 봉산군과 평산군 지 역은 훗날 사리원 본당 관할이 되었지만, 그에 앞서 이 지역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97년 11월 8일이었다. 당 시 평안도 중화군 해압면 목재리(睦齋里)의 영진(永津) 공소를 거쳐 황해도를 방문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 가 매화동 본당 주임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의 요청 에 의해 사리원을 방문하고 예비 신자 10여 명에게 세례 를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사리원 공소가 설립된 것이다. 그 후 1901년 5월에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가 산 수면 용현리 검수동(劍水洞)에 검수 본당을 설립하면서 사리원 공소는 이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이때 사리원 공 소의 교세는 신자 90여 명에 예비 신자가 500명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한편 검수 본당의 4대 주임 이기 준 신부는 1915년 9월에 신자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서흥(瑞興)으로 본당을 이전하였으나 신자들 사이에 불 화가 있자 9개월 만인 1916년 6월에 사리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본당 승격과 정착〕 사리원 공소는 이기준 신부의 정 착을 계기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이기준 신 부는 곧 이전의 공소 강당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하 는 한편 인근에 집 몇 채를 매입하여 본당 회장과 복사들 이 기거하도록 하였다. 1920년에 경편 철도(輕便鐵道 사리원~재령)가 부설되면서 사리원은 교통의 요지가 되 었으나 1921년 초 신자들이 생활고로 인하여 평양이나 진남포 등지로 이주함에 따라 한때 교세가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1936년 5월에 황해도 감목 대리인 김명제 신 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황해도 교회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가 독립 교구 로 승격될 것에 대비하여 사리원에 신축 중인 고딕 양식 의 2층 벽돌 성당을 미래의 주교좌 성당으로 설계하였고 아울러 사제관과 수녀원도 건립하였다. 또 교육 사업에 도 남다른 열정을 가져 1937년 11월 28일에 봉화(鳳 和)유치원을 개원한 데 이어 4년제 여자 초등학교인 명 성학원(明星學園)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2년 1월에 서울 대목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황 해도 감목 대리구를 폐지함에 따라 김명제 신부는 감목 대리직에서 자동 해임되어 강원도 원주(현 園洞) 본당으 로 전임되었고 박우철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시련과 폐쇄〕 8 · 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 박우철 신부의 보좌로 전덕표(全德杓,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1946년 12월 11일 사제로 서품된 후 첫 임지였던 이곳에서, 연로한 주임 신부를 대신해 본당 사목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79위 복자반 학생회, 소화 데 레사회, 예수 성심 청년회, 성모 성심 부인회, 요셉 노년 회 등 여러 평신도 사도직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무렵 사리원 본당은 공산 정권에 의해 폐쇄된 덕원 성 베네딕 도 수도원과 신학교의 수사 · 신학생을 비롯해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남하하는 신자들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는데, 전덕표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적극 도 와 주었다. 그러면서 끝까지 본당을 지키고 있던 전덕표 신부는 사리원 시내에 폭격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중 순경 행방 불명되었다가 공산군에 의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3일 박우철 신부가 몇몇 신자 가족과 함께 월남함으로써 사리원 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 침묵의 교회 ; 황해도 감목 대리구 ; 매화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달레 교회사》 中 · 下/ 한국교회사 연구소 역주,《뮈텔 주교 일기》 Ⅱ , 천주교 명동 교회, 1993/ 韓國教會 史研究所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黃海道天主教會史刊行事業會 , 1984. 〔金成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