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베리오, 프란치스코 Xaverius, Franciscus(1506~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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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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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
가톨릭 선교 활동의 수호 성인. 축일은 12월 3일. 스 페인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하비에르(Francisco de Yasu y Javier)이고 한자 이름은 방제각 사물(方濟各 沙勿)이다. 1534년에 성 이냐시오(lgntius de Loyola) 등과 함께 예수 회를 창설하였는데, 특히 인도와 극동 지역의 선교를 개 척함으로써 '인도 및 일본의 사도' 로도 불린다. 〔출생과 서품]〕 1506년 4월 7일 스페인 북부 나바라 (Navarra) 주(州) 인근에 위치한 하비에르(Javier) 성의 성 주(城主)인 야수(Juan de Jassu)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아 버지는 볼로냐 대학의 법학 박사로 추밀원(樞密院) 의장 을 역임하였었고, 어머니는 그 지방의 귀족 출신이었다. 사베리오가 6세 되던 해 스페인 통일의 야심을 갖고 있 던 카스틸랴(Castilla)가 나바라를 침공하였는데, 이때 그 의 아버지 야수는 프랑스 편에 서서 이에 대항하다가 패 하였으며, 그의 형들도 1524년에 자유 회복을 위한 전 쟁에서 패하여 낙향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듬해부터 성직의 길을 택해 파리 생트 바르브(SainteBarbe)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그는 1526년에 그 곳에서 사보야르(Savoyad)와 파브르(Piere Fabre), 그리 고 훗날 함께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를 만나게 되었다. 1530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문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베리오는 파리 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철학을 강의하였다. 그 후 1534년 8월 15일에는 예수회 의 초창기 회원인 이냐시오를 비롯하여 파브르, 라이네 스(Laynez) , 살메온(Salmeron) , 보바디야(Bobadilla), ,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z) 등과 함께 파리 근교에 있 는 치명자의 언덕인 몽마르트르(Montmarrtre)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평생 헌신할 것을 허원하였다. 이것 이 바로 예수회를 창설한 직접적인 계기였다. 이후 영신 생활을 스스로 체험한 그는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37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로마에 도착하여 6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539년 9월 3일 에는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의해 구두로 예수회 가 인가되었다. 〔선교 활동〕 인도와 말레이(Malay) 반도 : 그 무렵 동 인도 제국을 식민지로 다스리던 포르투갈 왕 주앙 3세 (João Ⅲ)는 교황에게 예수회원들을 인도에 파견해 달라 고 간청하였고, 교황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예수회에 이 를 요청하였다.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냐시오는 처 음에 시몬 로드리게스와 보바디야를 선교사로 선정하였 으나 병 때문에 갈 수 없게 되자 대신 1540년 3월 15일 사베리오 신부를 동양의 선교사로 선정했다. 교황에 의 해 인도 교황 특사로 임명된 사베리오가 리스본(Lisbon) 항을 출발하여 희망봉을 돌아서 목적지인 동인도의 수도 고아(Gôa)에 도착한 것은 1542년 5월 6일이었다. 곧바 로 사베리오는 당시 포르투갈인들의 활동 중심지였던 고 아의 주교를 교황 특사 자격으로 알현한 뒤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교황은 그에게 네 번에 걸쳐 친서를 보 내 동방의 모든 지역과 섬들을 방문하고, 그곳의 윤리 적 · 영성적인 현황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고아에 도착한 후 7개월이 되었을 때 이냐시오 총장은 사베리오를 인도 남부 파라바스(Paravas)로 파견하였고, 이후 약 3년 간 그는 인도의 남동부 해안에서 파라바인 들과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특히 어린아이, 젊은이, 하인들, 어부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파라바인 들 중에는 포르투갈의 원조를 얻기 위해 7년 전에 형식 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2만 명 정도나 되었다. 사 베리오는 그들을 진정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타 밀어로 번역한 조그만 교리 문답서를 가지고 온종일 마 을을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였고, 그 결과 마을 사람 들은 그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울 러 그는 인근의 코친(Cochin)과 세일론(Ceylon) 섬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으며, 트라방코레(Travancore)에서는 한 달 동안에 1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다.
1545년부터 사베리오는 말레이 반도에 있는 상업 중 심지 말라카(Malacca)에서 냉담자들의 회두를 위하여 열 심히 노력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몰루카(Moluccas) 제도 로 가서 말레이 사람들과 식인 야만족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한편 이 무렵 그가 최초로 필리핀에도 복음을 전함으로써 '필리핀의 사도' 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증거는 희박하다.
1548년 이후에는 더 많은 예수회 수사들이 인도 선교 를 위해 모여들었다. 한편 예수회는 여러 해 전에 고아의 성신 대학을 인수하였는데, 사베리오 신부는 이 대학을 고아 교구를 위해 인도인 사제들과 교리 교사들을 양성 하는 터전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르 투갈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평신도 유급 교 리 교사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훗날 이 대학의 영향 력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서부터 중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일본 : 1546년에 말라카에서 일본인 고아 야지로(彌 次郎)를 만나 교리를 가르친 후 이듬해 7월 '성부의 바 오로' 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준 사베리오는, 1549년 4 월 15일 야지로를 비롯하여 몰루카에서 만난 재속 사제 고스마 토레스(Cosmas de Torres)와 코르도바(Cordova)의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 평수사 등과 함께 일본 선교를 목적으로 고아를 떠나 그 해 8월 15일 야지로의 고향인 규슈(九州) 남쪽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였 다. 그 후 사베리오는 일본어를 배운 뒤 야지로와 함께 그곳 전교에 노력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규슈 북쪽 섬인 히라도(平戶)에까지 천주교 신앙을 전하였다. 이처럼 그 가 첫 일본 선교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곳 영주들이 장차 있게 될 유럽과의 교역에서 상권(商權)을 얻고자 그를 환대한 데 있었다.
사베리오는 이후 1551년까지 약 2년 반 동안 일본에 서 활동하면서 야마구치(山口)를 비롯하여 교토(京都), 분고(豊後) 등 혼슈(本州)의 서부 지역에까지 진출하였 다. 그 동안 일본인들이 그를 천축승(天竺僧) 또는 천축 의 성주로 이해하게 되자 그는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 여 교리를 전하였으며,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면 서 영주와 무사들로부터 많은 환심을 얻게 되었다. 그러 면서 기존의 가난한 생활을 포기하고 학자의 모습으로 변신하였는데, 그의 가난한 생활이 파라바인들과 말레이 사람들에게 전교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일본인들에 게는 거리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1551년 3월에는 인도 태수 및 주교의 소개장과 진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전년에 방문한 적이 있던 야마구치의 오우치 요 시타카(大內義隆)를 다시 방문하여 환영을 받았고, 같은 해 9월에는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鎭)에게 분고로 초 대받기도 하였다. 한편 야마구치에 있을 때 입교하여 천 주교 수사가 된 라우렌시오(일본명은 琵琶法師)는 훗날 일 본 전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베리오 신부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과 일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일본 기리시탄(切支丹) 교회의 정착에 지 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은 그가 일본에서 1549년 11 월에 쓴 첫 번째 편지에서 일본인들을 가리켜 '지금까지 발견한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민족' 이라고 격찬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는데, 이 편지는 그 세기가 끝나기 전에 30판 이상이 인쇄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한 이 래 인도로부터 전혀 답장을 받지 못해 궁금해 하던 차에 오토모가 선교사의 파견을 허락하였고, 동시에 인도 태 수와의 우호 조약 체결을 약속하면서 그는 인도로 돌아 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1551년 말에 그곳 에서 입교한 베르나르도와 마태오와 함께 인도로 건너갔 는데, 베르나르도는 유럽 땅을 밟는 최초의 일본인이 되 었다. 중국 : 일본을 떠나기에 앞서 사베리오는 그곳의 전교 를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데스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그 러나 그가 탄 배가 인도로 가던 도중에 심한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廣東) 근처의 상치안(上川) 섬에 표착하게 되 었다. 이 섬은 포르투갈 상인들이 광동 상인들과 밀무역 을 해오던 곳으로, 여기에서 그는 뜻하지 않게 코친에서 알고 지내던 페레이라(Diogo Pereira) 사절을 만나 중국 사정과 그곳에 억류되어 있는 포르투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화가 중국 에서 건너간 사실을 알고는 '중국 사람을 개종시키는 것 이 일본 사람들의 개종에 큰 도움이 된다' 는 것을 깨닫 고 중국 선교를 결심하였다.
고아로 돌아온 후 사베리오 신부는 예수회의 초대 인 도 관구장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이에 그는 몇 가지 급한 문제들을 먼저 해결한 다음 이곳의 책임을 베르세 (Kaspar Berse)에게 위임한 뒤 1552년 4월 17일 중국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3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중국에 합 법적으로 입국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자 이후 상치안 섬에 머무르면서 아이들과 병든 이들에게 선교 활동을 하는 한편, 여러 차례 중국 내지로의 진출을 계획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고, 기력이 쇠진하여 정 신을 잃고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1552년 12월 2일 46 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임시로 그곳에 묻 혔다가 1553년 봄에 말라카로, 그리고 그 해 겨울에는 고아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영성과 특징〕 사베리오는 인도 선교 중에 모두 세 권 의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그중 제1권 《그리스도교 교리》 (La Dottrina Cristiana, 1542)는 기도와 신경, 계명을 설명한 것으로 포르투갈어로 저술되었으나 곧 타밀어와 말레이 어로 번역되었으며, 훗날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다. 이어 제2권 《신앙의 신조 해설》(Dichiarazione del Simbolo della Fede, 1546)도 제1권과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번역되었 고, 다시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반면에 제3권 《예수회 교리 교사들을 위한 교육》(Instructio pro Catechistis Societatis Iesu, 1545)은 말라카에서 라틴어로 간행되었다.
사베리오는 여느 학자들처럼 영성적인 교의를 체계화 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활동적인 선교 사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서한과 글들을 보면, 그의 신 앙 생활과 개인적인 영적 체험에서 오는 은총의 표징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첫 번째로, 사베리오의 영성 생활에 서 드러나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하느님께 대한 조건 없는 신뢰이다. 이러한 신뢰는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죄 에 기울어지는 자신의 성향을 자각하는 데서 나온 것이 지만,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대한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의지이기도 하였다. 두 번째로는 사베리오의 글들(sentirla pasion de Christo, padecer por Christo)에서 증명되는 특징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사랑을 들 수 있다. 또 사베리오는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남 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특징은 장상에 대한 순명과 사랑으로, 그는 언제나 장상인 로욜라의 이냐시 오에 대한 경의와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네 번째로 그는 선교사로서 헌신적인 영혼과 정열적인 신앙을 간직한 사도였다. 그는 '하느님의 모상' 인 영혼 들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였 으며, 그의 열린 마음과 기쁨, 헌신과 깊은 초자연적인 정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주께서 하신 것처럼 영혼들을 섬기고 그에 봉사하고자 한 사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적 의미는 박해받고 무시당하는 시 련의 체험' 과 분리될 수 없는 것(시몬 로드리게스에게 보낸 1552년 1월 30일자 서한)이라고 하면서 동료들에게 했던 조언이나, '이교도들의 개종' 을 위한 그의 기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사베리오의 사도적 의미를 가장 잘 드 러내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 스도의 신부' 인 교회에 대한 자녀로서의 일치로 표현되 었다. 다섯 번째로 사베리오는 기도와 관상의 수도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항상 낮은 이웃을 위해, 밤은 하느님을 위 해 내주었다" (Antoine de Quadros). 특히 알렉산드르 발리냐 노(Alexandre Valignano)는 사베리오에 대해 두 가지를 높 이 평가하였는데,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였 고, 또 하나는 모든 활동 가운데서 항상 하느님과 일치하 도록 해주었던 높은 단계의 기도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베리오는 은총의 선물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미사 중에 풍성한 위로를 받곤 하였다. 이에 대해 지우베르 (Joseph de Giubert)는 사베리오가 선천적으로 관상을 누릴 줄 알았던 신비가였다고까지 하였다. 물론 사베리오의 이런 영성적인 성향은 그의 자연적인 기질과 대비되면서 도 조화를 이룬 것이었다. 관상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는 자주 화를 내면서 다혈질적인 성향을 드러내곤 하였 다. 이에 대해 헤이만스(Heymans)와 이리아르테(Iriarte) 는 사베리오의 기질이 다소 정감적이고 활동적이며 열정 적이었다고 하였다. 〔시성과 영향〕 사베리오는 극동의 첫 번째 선교사로서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 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1542년 이래 10년 6개월 동안 약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이교도들을 개종시 켰다. 특히 동양 선교 당시에 그가 쓴 편지들은 유럽 전 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선교에 대한 관심을 이끌 어 냈는데, 1614년에 예수회의 총장 클라우디오 아콰비바(Claudio Acquaviva)가 사베리오의 오른손을 로마에 있 는 예수(Gesi) 성당에 안치하도록 한 이유도 바로 이 때 문이었다. 동시에 그가 인도와 그 인근 지역에서 보여 준 가난의 신앙 생활과 일본 선교에서 보여 준 태도는, 그 지역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선교 적응주의(適應主義) 의 초기 단계로 훗날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베리오는 사망한 지 67년 만인 1619년에 시복되었 으며,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1623)에 의 해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이냐시오와 함께 시성되었다. 또 1748년에는 '희망봉에서부터 인 도 · 중국 · 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 성인' 으로, 그리고 1927년에는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성녀 리지외의 데레사(Thérèse deLisieux)와 함께 '가톨릭 선교 활동의 수호 성인' 으로 선포되었다. 그 결과 지금 까지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사도적 · 영성적인 영향 은 전세계 교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그가 선교한 인도와 인근 지역들은 여전히 가톨릭 지역으로 남아 있 으며, 몰루카 제도에 세운 교회들은 이후의 박해로 순교 자들을 낸 뒤 무너진 반면에, 일본의 교회는 얼마 안되어 재생되었다.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 예수회 ; 인 도 ; 일본)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Léon Pagés, 吉田小五郎 역, 《日本切 支丹宗門史》, 東京, 岩波書店, 1939/ 上智大學 편, 《カ 卜 リ ソ 7 大辭 典》 4, 東京, 富山房, 1954/ A. Ravier, 엘렌 르브렝 · 김지수 공역,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가톨릭출판사, 1987/ Albert Jou, 박금 옥 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바오로출판사, 1992/ 최정오 편, 《가톨릭 성인 사전》, 계성출판사, pp. 930~931/ Robert Ellsberg, All Saints : Daily Reflections on Saints, Prophets, and Witnesses for Our Time, New York, 1997, pp. 528~529/ 《DSp》 5, pp. 1099~1100, 1105/ J. Wicki, 《NCE》 14, pp. 1059~1060/ Enzo Lodi, Saints ofthe Roman Calendar, trans. by Jordan Aumann, O.P., New York, 1992/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New York, 1987, pp. 449~450/ Gerald H. Anderson,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ristian Missions, New York, 1998, p. 751/ J.P. Brodrick, 《EB》 23, pp. 840~842/ P. Louis Pfister, S.J.,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Jésuites de L' Anciene Mission de Chine 1552~1773, Chang-Hai, 1932, p. 1 〔邊熙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