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나롤라, 지롤라모 Savonarola, Girolamo(1452~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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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사보나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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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이탈리아 교회 개혁자.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자. 설교가. 1452년 9월 21일 페라라(Ferrara)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사보나롤라의 가문은 본래 파도바(Padova) 출신이었으나 페라라로 이주하였다-의사가 되고자 17세까지 인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래 세속과 교회 모두 도덕적 부패에 만연해 있는 것이 안타까워 수도자가 될 결심을 하고 부모 몰래 1475년 4월 24일볼로냐(Bologn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입회하면서 가장 비천한 소임을 원하였던 그는 처음에는사제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으나 장상의 권유로 볼로냐와페라라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활 동〕 1482년에 사보나롤라는 피렌체(Firenze)에 있는 성 마르코(SanMarco) 수도원에서 신학 강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그의 모범적인 삶을 본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1485~1486년 사순 시기에성 지미냐노(S. Gimignano) 성당에서의 설교에서 소위 그의 '예언자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1491년 7월 성 마르코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된 후 1491~1492년에 행한 설교에서 그는, 교회가 곧 아주 무서운 징벌을받은 후 새롭게 될 것이며, 외국 군대가 침공하여 도시가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성 마르코 수도원을 초대 교회 정신이 충만한 수도 생활의 이상적인 모형으로 삼으려 했고, 피렌체를 이탈리아 교회 혁신의 심장으로 만들어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에까지 확산시키려 하였다. 그 후 연속적으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 즉 메디치(Medici) 정부의 붕괴와 1494년에 일어난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 등은 피렌체 멸망에 관한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494년 가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후 그 군대가 피렌체 성문에 도달하자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Piero)는 도주하고 말았는데, 시민들은 이 난국의 타결을 사보나롤라에게 기대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샤를 8세를 '주님의 검(劍)' (gladius Domini)이며 '새로운 치루스(Cyus, 기원전 6세기경의 페르시아 왕)' 라고 칭송하였다.
피렌체에서 그의 영향력은 1495년에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그 해 중엽에는 그의 설교의 힘이 온 피렌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대중적' 정부가 사보나롤라의 이상으로 고무되어 신정 정치(神政政治)를 시행하면서부터 저속한 오락은 금지되었고, 대성당은 그의 예언적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하였으며, 성 마르코 수도원은 젊은 도미니코회 회원들로 가득 찼다. 한편 사보나롤라는 교회 쇄신 운동이 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로마의 부패가 근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로마를 비판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 당시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는 정략적인 수완에는 뛰어났지만 성직 매매 혐의를 받는 등 윤리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교 최고 지도자로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1495년 7월 21일 교황은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금지시키고 로마로 소환하여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공 언한 계시를 설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같은 해 7월 31일에 자신이 여행하기에는 너무 병이 깊고 도중에 살해될 수 있는 위험도 있으며, 또 피렌체에서 그 자신을 아주 필요로 하고 "지금 바로 자신이 떠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출두할 수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리고는 계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내용들을 담아 출판한 《계시의 개요》(Compendium Revelationum)를 교황에게 보냈지만 이에 대해 교황은 직접적으로 아무런 해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 북부에서 퇴각한 후인 그 해 9월 8일에 교황은 '하느님의 영감' 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주장을 강력히 단죄하고 그의 설교를 중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사건을 심사하도록 하는 소칙서를 발표하였다.
1495년 겨울부터 설교를 그만두었다가 이듬해 2월 16일 설교를 다시 시작한 사보나롤라는 사순 시기 동안 로마 교황청에 대항하여 점점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1497년 5월 13일 소칙서 <쿰 새페누메로>(Cum Saepenumero)를 발표하여 정치적인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그를 성급하게 파문하였다. 피렌체에서 파문이 발표된 것은 6월 18일이었는데, 사보나롤라는 이를 허위에 근거한 고발이라며 즉시 그 유효성을 부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연말까지 설교는 하지 못하였으며, 10월 13일에는 교황에게 용서를 청하는 편지를 썼지만 어떤 특정 사항에 대해 복종할 것임을 명시하지는 않았다.
사보나롤라는 점차 자신의 쇄신 운동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의 반대와 추방되었던 메디치 가(家)의 피렌체 복귀 공작으로 인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이, 그를 침묵시키지 않는다면 피렌체 전체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자 반대자들의 위협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교회의 개혁과 교황의 면직을 위한 공의회를 소집하기 위해 유럽의 군주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편 그의 제자인 도미니코 다 페시아(Domenico da Pescia)는 성 십자가의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fS. Croce) 수사로부터 불에 의한 시련 대결을 통해 사보나롤라와 그의 적들 사이에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도록 하자는 도전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하였다. 4월 7일에 있은 이 대결이 사보나롤라의 대실패로 끝나자 그에 대한 군중들의 기대가 무너지면서 군중들은 성 마르코 수도원을 침입하는 등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투옥되어 잔인한 고문과 반복되는 심문으로 죄목이 위조되었으며, 사보나롤라는 '이단자, 이교자, 성청을 모독한 자 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교황의 허가로 사보나롤라는 평신도 재판관에게서 재판을 받기 시작하였지만 교황의 두 심사원이 로마로부터 파견되기 전에 판결이 내려지고 말았다. 마침내 사보나롤라는 1498년 5월 23일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준비한 화형의 장작더미 위에 오르기 전에 경건하게 고해성사를 받고 성체를 영하며 자신을 주님께 맡겼다. 두 동료1 함께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피렌체의 시뇨리아(Sig-noria) 광장에서 매달려 화형을 당하였다. 훗날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자신의 실수가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평가와 의의〕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개인적인 부도덕성을 비난하였지만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직 자체를 멸시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교회 쇄신을 촉구하면서 교회가 거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뿐이지 교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직무와 사람을 구별한 점에서 피렌체의 수도자 사보나롤라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수도자 루터 (M. Luther)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사보나롤라는 부당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인간 알렉산데르 때문에n거룩한 교회가 불경스럽게 짓밟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고 확실히 순교자였다. 따라서 그 시대의 법적 판단에 의한 그의 객관적인 죄목은 다각적으로 재검토를 요하고 있다. 1499년부터 사보나롤라는 지역적으로 성인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1955년 이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복 수속을 밟고 있다. (→ 르네상스 교황 ; 설교)

※ 참고문헌  N. D'Aroma, Borgia dalle dieci anime, Edizioni Paoline, 1957/ M. Charles ed., 100 punti caldi della storia della Chiesa, Edizioni Paoline, 1985, pp. 196~ 199/ R. Ridolfi, 《EC》 10, 1986~ 1996/ 一, Vita di Gerolamo Savonarola, Sansoni, Firenze, 1974/ G. Scaltriti, L'ultimo Scwona-rola, Edizioni Paoline, 1977/ㅡ, Piergiordgio Frassati e il suo Savonarola, Edizioni Paoline, 1979. 〔金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