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아빠스 주교.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초대 원산교구장. 초대 덕원 면속구장. 세례명은 보니파시오. 한국명은 신상원(辛上院) 1877년 1월 10일에 독 일 헤센(Hessen) 주(州) 풀다(Fulda) 교구 북부의 오버우프하우젠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풀다의 김나지움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마쳤으나 부친의 건강 악화로 더 이상 학업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Innsbruck)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그곳에서 선교에 대한 열망과 주위의 권유로 22세 때인 1899년 2월 초에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약 1년 동안의 수련기를 거쳐 1900년 2월 4일 수도 서원을 하였으며, 그 해 가을 베스트팔렌(Westalen) 주의 뮌스터(Munster)에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통과한 후 3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였다. 1903년 7월 26일 딜링겐(Dillingen)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그곳에 있는 성 오틸리엔 수도원 부속 성 보니파시오 기숙사의 사감으로 임명된 그는, 학생들의 생활과 영성 지도 신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전개할 수도회를 찾기 위해 유럽을 순방 중이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1908년 9월 15일 수도원을 방문하여 선교사 파견을 간청하자 이를 수락하고 한국 진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사우어 신부는 엔쇼프(D. Enshof) 신부와 함께 한국 진출 책임자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11일 독일을 떠나 일본을 거쳐 2월 2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수도원 부지를 물색하던 그들은 그 해 7월 말 뒤텔 주교의 도움으로 동소문(東小門) 부근의 백동(柏洞, 현 혜화동) 낙산(駱山) 아래(현 가톨릭대학교 성신 교정)에 위치한 약 3만 평의 대지를 매입하였다.
그런 다음 사우어 신부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사는 수도 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선교라고 생각하고 수도원 건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같은 해 12월 6일 임시 수도원 건물이 완공된 데 이어 1910년 1월 8일에는 서울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원장좌 자립 수도원(prioratus conventualis)으로 승격되면서 사우어 신부는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우어 아빠스는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목적이 교육 사업에 있음을 감안하여 1910년에 실업 교육을 위한 4년제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담당할 교원을 양성할 목적으로 2년제 사범 학교인 승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였다. 이어 계속해서 몇 명의 선교사가 더 파견되어 수도원의 규모가 커지자 1913년 5월 5일에는 서울 수도원이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되었고, 사우어 원장은 그 해 6월 8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 성당에서 아빠스로 성성되었다.
사우어 아빠스는 한일합병 이래 한국의 정치적 · 사회적 형세가 변화되어 서울 수도원의 활동 영역이 급격히 축소되고, 일제의 탄압 정책으로 교육 환경이 악화되면서 선교사들이 점차 본당 사목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그는 1914년에 베버(N. Weber) 총아빠스에게 전교 지역이 필요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하고 뮈텔 주교와도 이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결과 베네딕도회는 1920년 8월 5일 교황청으로부터 새로 설정된 원산대목구(元山代牧區)의 사목권을 위임받게 되었으며, 사우어 아빠스는 그 해 8월 25일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일 서울 대목구 보좌 주교로 임명된 드브레(E.A.J. Devred, 俞世竣 주교와 함께 주교로
성성되었다.
이어 베네딕도회에서는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함경도 지역의 원산 본당과 내평 본당을 비롯하여 간도 지방의 삼원봉 본당, 팔도구 본당, 용정 본당 등 5개 본당의사목권을 인수받았다. 사우어 주교는 임시로 원산 본당과 서울 수도원을 맡아 교구장으로서의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선교 지역과 수도원 본원과의 거리상의 문제와 기타 다른 몇 가지 이유들로 인해 수도원과 신학교를 원산 인근의 덕원(德源)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즉시 수도원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27년에 덕원 수도원을 완공한 사우어 주교는, 1928년에는 연길 지목구를 분할 독립시켰으며, 함경도 지역의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신고산 · 덕원 · 고원 · 영흥 · 함흥 · 서호진 · 북청 ·성진 · 청진 · 회령 · 경흥 등에 본당을 신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본당에 해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사우어 주교는 특히 수도원 내에 있던 덕원 신학교의 운영과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수도원을 비롯한 여러 본당에 병원을 세워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고, 신학교 내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교리 문답》, 《미사 경본》《가톨릭 성가》 등 각종 교회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또한 1925년 11월에는 본당 사목과 특수 사목을 보다 원활히 추진하기 위하여 투칭(Tutzing)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를 초청하였으며 아울러 원산 대목구의 교세가 계속 성장하자 중국 땅에 속해 있는 간도와 의란(依蘭) 지역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하여 이 지역의 독립을 교황청에 건의하였다. 그 결과 1928년 7월 3일자로 의란 지역이 독립 포교지로 설정됨과 동시에 임시로 사우어 주교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또 같은 해 7월 19일에는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간도 지역의 사목권이 새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주교에게 이관되었다.
사우어 주교는 덕원으로 이전한 후 "십자가 밑에 구원이 있다"를 기치로 삼아 활발한 대내외적인 활동을 통해 교구 정착과 발전을 모색하였다. 그는 1931년에 개최된 조선 대목구 설정 한국 천주교회 공의회와 1933년에 개최된 한국 5교구 주교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28년 1월부터 1929년 2월까지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 총아빠스의 은경축 행사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데 이어, 1933년 11월부터 1935년 4월까지 오틸리엔 총회 참석차 다시 독일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광대한 함경도 전역을 자주 순방하면서 성무를 집행하였고, 재정 궁핍 속에서도 본당 신설과 학교 건립을 꾸준히 추진하여 교세 확장에 기여했다. 그 후 1940년 1월 13일 원산 대목구가 '덕원 면속구 와 '함흥 대목구 로 분리 · 설정되자 사우어 주교는 다시 덕원 면속구장 겸 함흥 대목구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5월 13일 수도원 성당 내에서 덕원 면속구 설정식과 함께 착좌식이 거행됨으로써 사우어 주교는 교회법적으로 자치 수도원구의 정식 초대 교구장이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다.
8 · 15 광복 후 사우어 주교는 북한 공산 정권이 종교 탄압의 일환으로 시행한 '토지 개혁령' (土地改革令)으로 인해 1946년에 수도원의 토지를 모두 몰수당하는 등 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49년 5월 9일 밤에 수도원장 로트(L. Roth, 洪泰華) 신부, 부원장 슐라이허(A.Schleicher, 安世明) 신부, 신학교 교수 클링사이즈(R. Kling-seis, 吉世東) 신부 등과 함께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이후 사우어 주교는 72세의 노구로 지병인 천식이 악화된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겹쳐 1950년 2월 7일 옥사하였다. 얼마 후 베네딕도회 소속 수사들과 수녀들에 의해 시신이 발굴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 옆에 묻혔다. (→ 덕원 면속구 ; 덕원성 베네딕도 수도원 ; 베네딕도회)
※ 참고문헌 최석우, <한국 분도회의 초기 수도 생활과 교육 사업>, 《사학 연구》 36집, 한국 사학회, 1983/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옛 등걸에 새순이》, 분도출판사, 1981/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Hwan Gab 60 Jahre(e(還甲, Munsterschwarzach, 1973/ Der fuenfarmige Leuchter Ⅱ, EOS Verlag Erzabtei St. Ottilien, 1971. 〔宣智勳〕
사우어, 보니파시오 Sauer, Bomiltmus(187~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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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