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교회

私有敎會

〔라〕ecclesia propria · 〔영〕private church · 〔독〕Eigenkir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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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교회의 주인들은 마치 평신도 주교처럼 행동하였다.

사유 교회의 주인들은 마치 평신도 주교처럼 행동하였다.

영주나 개인이 설립하여 그들의 소유로 되어 있는 교회 또는 수도원. 스투츠(Ulich Stutz)는 사유 교회를 "소유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유 지배권에 종속되어 있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정의하였다. 사유 교회 제도는 교회가 특수한 자산으로, 수입에 있어서 그 소유자, 즉 왕·평신도 · 주교 · 성직자 · 교회의 단체에 귀속됨을 의미하였다.
〔발생 원인과 형태〕 발생 : 도시 주변의 시골에 본당이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경부터였다. 이 본당들은 도시 주교의 본당에 속하였으며, 이 본당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주교로부터 임명된 사제들은 처음에는 임시였고 사목 자격도 국한되어 있었지만 곧 종신직이 되었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가 선언된 후 많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조시모 교황(417~418)과 레오 1세 교황(440~461) 때부터 시골에도 성당이 세워지고 사목 구역의 경계도 확정되었다. 이로 인해 지방 교회의 수가 현저하게 늘어나 5~6세기 이후에는 갈리아와 스페인에 지방 교회가 설립되었고 본당 신부도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6세기에 게르만 민족이 개종한 이후부터는 이들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던 성당들의 재건 사업을 교회 당국자뿐만이 아니라 세속 권력자들도 거들게 되었다. 그러나 주교의 영향력이 새로운 관구나 확장된 교구 지역에까지 미치기에는 너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성당을 건축하고 사제를 초빙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유 교회의 설립은 더욱 촉진되었다.
사유 교회 제도는 로마 제국과 게르만 민족의 법률과토지 지배권에 대한 경제적 · 정치적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388년의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 XⅥ, 5, 14)이 공공 교회들(publicae ecclesiae)과 사유 교회들(privatae ecclesiae)을 구분하고 있듯이, 이미 후기 로마 제국에서는 주교가 교회 자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도 상속할 수 있는 개인 소유권으로 교회와 수도원을 나열하고 있다. 로마 제국에서 개인의 교회 설립에 관한 진술은 471년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갈리아에서는 441년의 오랑주 (Orange) 교회 회의에서, 스페인에서는 546년 레리다 (Lérida) 교회 회의에서 언급되었다.
형태 : 사유 교회 제도는 거의 전 유럽에 유포되었으며 8~9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지주들은 자기 소유지에 교회나 경당 또는 수도원을 세우면서 대지도 함께 주 어 생계를 유지하게 해준 반면에, 교회와 경당 또는 수도원과 모든 수익을 마치 자신의 독자적인 소유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회 건물과 재산을 자유로이 매매하거나 유산으로 남기기도 하고 교환하거나 선사하기까지 하였다. 또 자유 재량에 따라 당직 성직자와 관리인을 임명하고 직위와 교회록(benefcium)을 부여하였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쉽게 그를 해고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을 때에는 전부 혹은 일부를 유산으로 요구하였고, 사제 직무 수행시에는 수익을 징수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신자들의 봉헌물과 십일조 헌금을 지주 자신이 개인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카롤링거 시대에 십일조를 바치는 의무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후 사유 교회의 이익은 근본적으로 교회 소유자들이 십일조 권리를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때부터 사유 교회의 설립은 "아마도 중세 초기의 가장 이익이 남는 투자"(U. Stutz)였다.
또한 평신도인 지주나 귀족이 봉사, '교회록의 임시관리자' 또는 그에 대한 감독직을 수행하였던 성당과 수도원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사유 교회의 폐해가 드러났다. 국왕, 귀족, 주교들뿐만 아니라 수도원을 세운 이들도 사유 교회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 교회 제도는 8세기에 완전히 정착되어 제도로 인정을 받았고, 사유 교회의 수는 주교에게 속한 성당의 수보다 훨씬많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유 교회의 성직자는 사유 교회의 주인들에게 전적으로 종속된 노예에 지나지 않았고, 사유 교회의 축성권은 주교에게 있었지만 주교는 사유 교회가 충분한 설비를 갖추었을 경우 축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교회의 대응] 주교들은 영주에게 소속된 사유 교회의사제들이 양성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고 멀리 떨어져 혼자 살았기 때문에 자질과 규율이 문란해지자,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시골에 성당을 많이 세워 영주들이 그들의 영토에 성당을 많이 건축하지 못하도록 견제하였으며, 영주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 '세례 성당(Ecclesia Baptismalis) 제도' 를 도입하였다. 이는 당시 주교들이 건축한 성당보다 영주들이 세운 성당이 더 많았기 때문에 도입된 제도였다. 그래서 주교가 설립한 성당을 본당으로, 다른 성당들은 공소로 설정한 후 주일과 큰 축일에는 주교좌 성당이나 본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여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였고, 그 외의 장소에서는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본당에서만 세례성사를 집전하도록 하였으며, 공소 수입의 일부를 본당에 바칠 의무를 부과하였다.
루드비히 경건왕(814~840)은 819년에 각 본당 성직자들에 대한 보호를 규정한 '성직자법' (Capitulare Ecclesia-sticum)을 반포하였는데, 이 법에 따르면 만일 어떤 영주가 자신에게 예속된 사람을 자신의 사유 교회의 사제로서품시키려면 먼저 그를 자유로운 몸으로 만들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넉넉한 생계 유지를 위해 면세된 1후우페(mansus)를 기본 재산으로 주고 40~80에이커 정도의 경작지를 주어야 했으며, 자신과의 종속 관계에서 해방시켜 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 법을 통해 앞으로 사유 교회에서도 성직자를 주교의 동의하에서만 임명 또는 파면할 수 있게 하였으며, 사유 교회도 교구 주교의 순시와 감독을 받게 하였다. 이로써 영주 및 사유 교회 지주들의 독재로 크게 침범되었던 주교의 중심적 위치가 다시 강조되었다. 그러나 사유 교회가 본당이 아니더라도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허용되었다.
이러한 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사유 교회는 오래 존속되었다. 에우제니오 2세 교황(824~827)과 레오 4세 교황(847~855)은 826년과 853년의 로마 교회 회의에서 사유 교회를 인정한 반면, 니콜라오 1세 교황(858~867)은확실히 배척하였다. 하지만 교회와 교황의 영향력이 약했던 이 시기에 사유 교회 제도는 하급 교회로부터 상급 교회에까지, 특히 교구에까지 확장되었다. 고위 성직자들인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제후들에 의해 임명됨으로써 교회가 봉건 제도화되었고 주교와 수도원장들은 완전히 제후가 되었다. 랭스의 힌크마르(Hinkmar von Reims) 대주교는 자신의 저서 《성당들과 경당들에 대하여》(De Ecclesiis et Capellis)에서 주교의 관할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즉 왕의 국유 회(regina domina-tione), 타지방 주교의 사유 교회(episcopi immmunitate) , 수도원의 사유 교회(monasterii immunitate) , 자유인의 사유 교회(cuiuslibet liberi hominis proprietate) 등이다. 이에 따르면 힌크마르는 주교와 수도원의 사유 교회들도 알고 있었으며, '소유' (proprietas)와 '통치' (dominium)의 개념을 넓은 의미의 동의어, 즉 일반적으로 법률 관계의 특징을 나타내는 개념인 교회 소유권으로 사용하였다.
카롤링거 시대와 그 이후의 교회 회의에서는 사유 교회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849년의 파리 교회 회의를 통해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공동 상속인에게 사유 교 회를 분할해 주는 것을 허용하였지만, 동프랑크 왕국에서는 852년의 마인츠 교회 회의를 통해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반면에 909년의 트로슬리(Trosly) 교회 회의는 힌크마르의 저서에 근거하여 교회의 주인의 소유권을 명백하게 승인하였다. 850년의 파비아(Pavia) 교회 회의는 사유 교회의 주인들이 성직자들을 자신들의 재산 관리인으로 임용하지 말도록 금지시켰으며, 948년의 인겔하임(Ingelheim) 교회 회의는 사유 교회의 주인들이 자신들의 성직자들을 구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교회 회의에서는 종교적 목적이 아닌 수입도 제한하려고 하였다.
10세기의 프랑크 왕국에서는 많은 교구가 영주들의세습적인 가족 소유가 되었고 그들은 마치 평신도 주교로서 행동하였으며, 10~11세기에는 교황직도 로마의 귀족 당파에 의해 마치 그들의 사유 직책처럼 취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권위와 권한을 찾으려 한 교황이 니콜라오 2세(1058~1061)와 그레고리오 7세(1073~ 1085), 그리고 파스칼 2세(1099~1118) 등이었다. 이들 개혁 교황들은 국왕과 영주들 이른바 평신도에 의한 성직의 서임을 철저히 금지시켰지만 처음에는 이를 관철하지 못하였었다. 하지만 교황 레오 9세(1049~1054)는 프랑크왕국의 사유 교회 제도에 대해 간접적으로 개혁과 수도원에 대한 교황의 보호자적 위치를 확장함으로써 대항하였다.
〔해 결〕 평신도들의 사유 교회 지배권은 11세기까지교회법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교회의 개인 소유를 반대하는 주장은 당시만 해도 소수 의견이었다. 교회의 개혁을 주도했던 클뤼니 수도원 역시 사유 교회 제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엄청난 수도원 재산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입장에 근거한 때문이었다. 또 11세기의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도 평신도들이 하급 교회를 소유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1050년경에 개최된 프랑스의 개혁 교회 회의들도 평신도들에게 교회 재산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레고리오 개혁도 처음에는 평신도들의 교회 소유를 문제 삼지 않았었다.
주교들이 평신도들이 소유한 교회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는 자료는 850년경의 사료에서 비로소 찾을 수가있지만, 사유 교회 제도의 근본적인 몰락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평신도들이 더 이상 십일조를 갖지 못하도록한 조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평신도들에게 교회의 반환을 법률적 규범으로 부과한 것은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 때 개최된 1095년의 클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와 1096년의 니메스(Nimes) 교회 회의에서였다. 1130년에 개최된 클레르몽 교회 회의는 이러한 반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평신도들을 파문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1139년에 개최된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이 규정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에서는 평신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 재산의 소유권을 가질 수 없으며, 이에 대한 권한은 주교에게만 있다(8조)고 발표하였다. 또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고 이 재산의 침탈을 엄금(12조)함으로써 1122년의 보름스 정교 조약(Concordatum Worma-tiense)에서 결정된 사항들이 모든 교회에 유효하게 적용되도록 하였다. 사유 교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금지한 것은 제2차 라테란 공의회(1139)를 통해서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평신도가 교회를 소유하거나 그 교회의 십일조 수입을 갖는 것, 그리고 고용된 사제에게 교회를 맡기는 것을 금지시켰다(10조). 교회록의 상속을 금지시켰고(16조), 평신도가 교회록을 수여하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25조).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는 특정인이 2~3개의 교회를 혼자 맡아 관리하거나 그 교회록을 이중으로 받는 것을 금지하였고(14조), 교회록에 대한 성직자의 유언 집행이나 제3자에게 양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15조).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교회의 평신도 소유주와 사제와의 재정 관계, 십일조의 관리 및 이용(32~34조), 교회 재산의 보호에 관한 규정(41조, 44조, 45조, 61조)을 법령으로 발표하였다. 이러한 공의회의 결정으로 사유 교회로 인한 문제는 교회 내에서 더 이상 크게 작용되지 않았으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제24 회기에서 결정된 본당 제도의 재조직 결정으로 사유 교회는 본당 제도에 흡수되었다.
〔평 가〕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어 더 넓은 지역으로교세를 강화시켜 나가던 시기에 사유 교회는 도시만이 아닌 시골에도 많은 성당이 설립되는 긍정적인 역할을하였다. 또한 농업 중심의 당시 유럽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 전파를 촉진시켰으며,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사유 교회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당의 설립은 교회 질서의 전반을 변형시켰으며, 무엇보다도 사목과 교회 행정에 깊은 영향을 미침으로써 오랫동안 교회가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였고, 교회가 귀족과 국가에 예속되는 위기마저 초래하였다. 또한 사유 교회 제도와 결부된 성직 서임권 논쟁은 보름스 정교 조약 이후에도 교황청과 국가 사이의 정교 조약에서, 또는 국가 교회를 지지하는 경향에 의하여 계속 논쟁거리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교회법에서평신도의 교회에 대한 권리, 즉 사유 교회권은 '보호권'(ius patronatus)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 라테란 공의회 ; 보름스 정교 조약 ; 봉건제 ; 성직 서임권 논쟁)
※ 참고문헌  Hans Erich Feine, Ursprung, Wesen und Bedeutung des Eigenkirchenwesen, 《MIOG》 58, 1950, pp. 195~208/ P. Landau, Eigen-kirchenwesen, 9, pp. 399~4041 U. Stutz, Eigenkirche, Eigenkloster, 《RE》 23, 1913, pp. 164~177/ -, Die Eigenkirche als Element des ma.-germanichen Kirchenrechts, Berlin, 1895/ K. Bihlmeyer · H. Tuchle, Church History, trans. by V.E. Millls · F.J. Muller, Newman Press, West-minster, 1966/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최석우 역, 《교회사》,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1982)/ M.D. Knowles · D. Obolensky, Nouvelle Historie de I'Eglise : Le Moyen Age, Paris, Seuil, 1968/ 정진석, 《교회법 해설》 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Landau, Eigenkir-chenwesen, 《EKK》 1, pp. 991 ~992.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