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 본당

社倉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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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수안군 대오면 사창리(遂安郡 大梧面 社倉里) 소재. 1925년 5월 강원도 이천의 포내(浦內)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당시의 관할 구역은 수안군과 곡산군이었으나 후에 서흥군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다. 〔역대 신부〕 초대 박정렬(朴貞烈) 바오로(1925. 5~1928. 5), 2대 이보환(李普煥) 요셉(1939~1941. 6), 3대 임종구(林鍾求) 바오로(1941.6~1943.5), 4대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1948. 9~1949)
〔공소 시대〕 수안 지역에 널리 복음을 전파한 수안군 무송동(茂松洞) 출신의 김기호(金起浩, 요한)는 1856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V. 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전교하였다. 그 후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이곳 출신 이길준(요한)이 참수형으로 순교하기도 하였지만, 근근이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883년부터 파리 외방전교회의 푸아넬(V.Poisnel, 朴道行) 신부, 쿠데르(V. Couderc, 具瑪瑟) 신부,로(J. Rault, 盧若望) 신부,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신부 등이 차례로 이 지역에 파견되어 수안 땅의 진고개와 인근의 덕골(蘇村里)에 머무르면서 전교하게 되었다. 그 후 1895년에 르 장드르 신부가 평양 외성(外城)으로 옮겨 가면서 수안 지역은 황해도의 곡산(谷山) · 신계(新溪) 등지와 함께 지리적으로 인접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삼포리(樂壤面 三浦里)의 포내 본당 관할이 되었다. 당시 수안 지역에는 사창 가마올(大千面 大釜洞), 굴우물(大坪面 上烏池雲井洞), 들무정(大梧面 楠亭里), 오리올(泉谷面 五柳里) 등의 공소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교세 면에서나 교회 사업 또는 신앙 생활에 있어 가장 돋보인 공소는 서로 이웃에 위치한 가마올과 들무정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포내 성당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고 길이 험해 주일은 물론 대축일 미사에도 참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이곳 신자들은 기금을 모아 1918년에 제대 · 제의 ·성작 등을 마련한 후 본당 신부를 초청하여 미사를 드리는 한편, 성당 건립 기성회를 결성하여 본당 승격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5년 5월 사창 본당이 신설되고 6월 25일 박정렬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및 폐쇄〕 기존의 공소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하던 박정렬 신부는, 부임 직후인 그 해 8월 수안읍 북쪽 30리 지점에 위치한 사창 장거리에 임시 성당을 건립하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장래의 교회 발전을 위하여 굳이 사창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박정렬 신부는 1928년 5월에 본당을 곡산군 곡산면 장림리(長林里)로 이전하고 이듬해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로써 사창 본당은 곡산(谷山) 본당의 관할 공소로 전락하게 되었고, 사창의 공소였던 곡산이 수안과 곡산 지방 전체를 본당 관할 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200여명의 사창 공소 신자들은 기존의 성당 건립 기성회를 중심으로 강당 건립 계획을 꾸준히 추진하여 1935년 9월 19일 이를 완공하고 황해도 감목 대리 김명제 신부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본당이 폐지된 지 11년 만인 1939년에 사창 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어 2대 주임으로 사창리 출신의 이보환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환 신부는 2년 만인 1941년에 송화(松禾)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종구 신부 역시 2년 동안 전교하다가 1943년에 강릉(江陵) 본당으로 전임되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곡산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가 평남 안주(安州) 본당에서 사목하던 김충무 신부가 8 · 15 광복 후인 1948년 9월에 4대 주임으로 부임함과 동시에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였다. 그러나 1948년에 북한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종교 탄압이 시작되면서 사창 본당도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 해 5월 김충무 신부가 해주(海州) 본당 주임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의 반공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수안읍 내무서에 연행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공산 정권의 감시와 심문이 계속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충무 신부는 본당을 떠나 황주의 정방산(正方山)과 평남만성(萬城)에 은신하였다. 그리고 1951년 1 · 4 후퇴 때 김충무 신부가 월남함으로써 사창 본당은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다. (→ 침묵의 교회 ; 포내 본당 ; 곡산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 《서울敎區年報》 Ⅱ , 明洞天主敎會, 1987/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경향잡지》 815호(1935. 10. 12), p. 60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