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포도청(捕盜廳) 및 형조(刑曹)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천주교 신자들의 진술 내용과 판결문 등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당시의 박해 상황은 물론 초기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자료. 척사(斥邪)의 입장에서 편찬하였다. 제목에서 '사학' (邪學)이란 이단의 사악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천주교를 가리키며, '징의' (懲義)란 천주교에 물든 사람들을 징계하여 바른 도리 즉 유교와 성리학의 가르침으로 다시 이끌어 들인다는 뜻이다. 본래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가르침과 다르거나 이에 어긋나는 불교나 양명학, 그 밖의 유교 논리를 이단으로 배척해 왔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주로 서학(西學) 내지는 천주교를 이
단이요 사학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종 류〕 현존하는 《사학징의》는 8 · 15 광복 직후에 김양선(金良善) 목사가 입수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기증한 '김양선본' 2책과 1971년 5월 양화진(楊花津)의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우연히 구입하여 소장한 '양화진본' 2책이 있다. 이 중에서 전자는 6 · 25 한국 전쟁 때 크게 훼손되어 극히 일부분만을 판독할 수 있을 뿐인 데 비해 후자는 완질본으로 발견되었으며, 1977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이 양화진본을 불함문화사(弗咸文化社)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양화진본이 원본인지 아니면 원본의 사본인지 알 수가 없다.
또 한 종류의 《사학징의》는 일본인 학자 히라토리(白鳥庫吉)가 중심이 되어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배鐵道株式會社)의 지원 아래 수집하여 동경대학에 기증하였다가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소실된 백산흑수 문고(白山黑水文庫, 일명 南滿蒐書), 더 자세히 설명하면 백산흑수 문고 안의 조선 야사 총서인 '총사' (叢史)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4책의 '총사본' 《사학징의》로, 그 목록만은 소실되기 전에 마에마(前間恭作)에 의해 그의 저서 《고선책보》(古鮮譜)에 수록되어 전해지게 되었으며, 이마니시(今西龍) 또한 총사본 《사학징의》를 보고 그 목록만을 수초하여 세상에 알린 적이 있었다. 이때 이마니시는 '사학' 이란 명칭을 '사교' (邪敎)라고 오기함으로써 훗날 총사본 《사학징의》의 원명이 '사교징의' 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 김양선본과 양화진본은 하나의 원자료를 토대로 필사된 이본(異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총사본《사학징의》와 양화진본은 서로 목록을 비교해 볼 때 어 느 정도 출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둘의 분량도 양화진본 2책은 11행 32자 내외로 386면이며, 마에마의 설명에 따르면 총사본 4책은 각 책당 10행 20자 내외에 70장 140면 가량으로 도합 560면 내외였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그 둘을 동일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록을 토대로 추정해 본 다면, 책수는 서로 다를지라도 그 수록 내용은 거의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총사본은 양화진본이나 김양선본과 같이 동일한 원자료의 필사 과정에서 재편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화진본의 편자와 편찬 시기〕 양화진본 《사학징의》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므로 그 저자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볼 때 척사의 입장에 섰던 인물임이 분명하며, 대부분 형조와 포도청의 자료를 이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유박해에 직 ·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었거나 박해 이후 현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된다. 한편 이기경(李基慶, 1756~1819)이 편찬한 양수본(兩水本) 《벽위편》(闢衛編)의 발문에 보면 그가 《사교징치》 (邪教懲治)를 저술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책이 《사학징의》를 말하는 것인지는 앞으로 규명해야 할 문제이다.
혹자는 앞에서 말한 '총사' 의 편찬자를 이기경으로 추정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추정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기경이 《사학징의》를 편찬하였을 가능성은 많다. 실제로 양화진본의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전교주계>(傳敎奏啓)에는 "벽위편을 보라”(見闢衛編)는 주기가 여러 곳에 달려 있는데, 이를 볼 때 《사학징의》의 편자는 《벽위편》의 편자인 이기경이거나 적어도 아주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기경이 <사학징의》의 편자라면, 그는 <전교주계>의 내용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이후에 편찬할 《벽위편》을 통해 보완해 보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벽위편》이 적어도 《사학징의》의 <전교주계> 부분보다 늦게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위와 같이 "벽위편을 보라" 고 한 내용이 때때로 현존하는 양수본 《벽위편》에는 생각만큼 자세히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기경은 같은 기호 남인의 학자로 친서계(親西系)였던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 등과 가까웠으면서도 1787년의 정미 반회 사건(丁未泮會事件) 이후 척사
에 앞장선 공서계(攻西系)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그는 1791년의 진산 사건 때 홍낙안(洪樂安)과 함께 친서계 인물들과 채제공(蔡濟恭)을 공격하다가 11월에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고, 1794년에 해배되어 이듬해 지평에 올랐다가 정랑, 정언을 거쳐 신유박해 때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척사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박해 직후에는 척사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관련 기록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벽위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사학징의》를 편찬하였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한편 양화진본의 표지에는 "추조관장"(秋曹藏)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을 추조 즉 형조에서 소장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만 여기에서 또 하나 추정이 가능한 것은 《사학징의》가 편찬된 곳이 바로 형조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포도청과 형조의 자료를 유출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 《사학징의》의 내용에는 《추관지》(秋官誌)가 인용되고 있는데, 이 책은 형조에서 편찬하여 그곳에서 보관하던 책이라는 점에서 위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사학징의》의 내용은 1801년 1월 10일(음) 대왕 대비(즉 貞純王后 金氏)가 내린 박해령에서 시작되고 있다. 또 권2의 작배죄인질(作配罪가.) 제관득(諸寬得) 조를 보 면, 제관득이 계해년(1803년) 2월에 물고하였다는 주기가 달려 있는데, 이 주기가 편자의 주기인지 혹은 훗날 다른 사람이 단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아울러 권1의 <전교주계>가 《벽위편》에 앞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사학징의》는 신유박해가 끝나기 전에 이미 편찬이 시작되어 늦어도 1803년 초까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화진본의 내용〕 현존하는 양화진본은 모두 2권으로, 그중 제1권은 전교주계 · 이문질(移文秩) · 내관질(來關秩) · 정법죄인질(正法罪人秩) 등 크게 네 부분으
로 나뉘어 있으며, 제2권은 형방질(刑放秩) · 백방질(白放秩) · 감화죄인질(感化罪人秩) · 이환송질(移還送秩) · 작배죄인질(作配罪人秩) 등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즉 제1권에 먼저 신유박해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문서와 참수된 신자들에 관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제2권에 는 백방되거나 유배를 당한 신자들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해 놓았다.
제1권의 <전교주계>는 박해령이 내려진 1월 10일부터 12월 25일 대왕 대비가 옥중에 남아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벌을 촉구할 때까지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을 연대기식으로 정리한 부분이다. 아울러 그 말미에는 류관검(柳觀儉) · 이우집(李字集) · 윤지헌(尹持憲) · 김유산(金有山) 등 전라도 신자들을 체포하여 신문한 뒤에 올 린 전주 감사의 밀계(密啓)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 내용은 조선의 지도층 신자들이 박해 이전에 추진한 성직자 영입 운동과 대박 청래(大舶請來) 계획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다음으로 <이문질>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벌과 관련하여 형조에서 다른 기관으로 발송한 공문을 수록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2월 8일부터 5월 8일까지의 공문 13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말미에는 유배된 천주교 신자들을 감시해야 할 배소의 보수(保授) 주인이 유념할 사항을 기록한 발배관문식' (發配關文式)이 첨부되어 있다. 셋째로 <내관질>은 다른 기관에서 형조로 보내 온 공문을 수록한 부분으로, 1801년 2월 6일부터 다음해 2월 26일 사이에 형조에서 접수한 공문들을 요약하여 수록
하였다.
넷째로 <정법죄인질>은 사형 판결을 받은 천주교 신자들이 포도청이나 형조에서 받은 문초 내용과 결안(結案)등을 수록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정철상(丁哲祥) · 이합규(李合逵) · 최필제(崔必悌) 등 37명에 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는데, 이들은 주로 교회의 지도층으로 활동하거나 체포된 후 배교를 거부한 신자들이었다. 아울러 그 내용은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세한 사실들을 담고 있으므로 아주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중에서 현계완(玄啓完)은 김계완(金啓完)의 오기임이 분명하다.
이 제1권의 부록으로는 신유박해와 관련된 모든 신자들의 명단이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편자가 관변기록에서 채록할 수 있는 명단 전체였던 것 같다. 여기에는 첫째로 지방 관아에서 처형한 19명을 비롯하여 의금부에서 사형 판결을 내렸거나 사사(賜死) · 장폐(杖斃)한 신자 17명, 포도청에서 장폐한 신자 4명 등 모두 40 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둘째로 형조에서 추가로 사형 판결을 내린 10명, 정배(定配)한 14명, 처음에 사형판결을 내린 37명(즉 제1권의 정법죄인질 명단) 등 61명의 명단이 수록되었다. 셋째로 형조에서 형벌을 가하거나 곤장을 쳐서 석방한 9명, 죄가 없어 석방한 15명, 스스로 감화되어 자수한 신자 5명, 지방 관아에서 형조로 이송한 경우나 형조에서 포도청으로 이송한 11명, 형조에서 정배한 67명 등 모두 107명의 명단이 있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제2권 본문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끝으로 지방 관아에서 정배한 121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이어 황사영(黃嗣永)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된 신자 7명의 명단을 수록하였다.
제2권에는 앞의 부록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다섯 가지 내용으로 분류된 107명의 문초와 진술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형방질>에는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신앙을 지키다가 뒤에 배교(즉 悔悟)하고 석방된 6명에 대한 문초 내용과 제사(題辭, 판결이나 명령)를 수록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은 경우이다. 이어 말미에는 체포된 후 배교를 천명한 뒤 가벼운 형벌을 받고 석방된 3명의 진술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로 <백방질>에는 모두 15명의 진술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일찍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었거나 천주교 신자들과 관계가 있던 경우로, 신유박해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천주교와 관련이 없었으므로 가벼운 질문만을 받고는 곧 석방되었다.
세 번째로 <감화죄인질>은 박해령이 내려지자 스스로 형조에 나아가 배교를 선언한 5명에 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네 번째로 <이환송질>에는 모두 11명의 진술 내용을 수록하였으며, 그중에는 류항검(柳恒儉)과 함께 제1권의 <전교주계>에 수록되어 있는 전라도 신자 4명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는 <백방질>에 있는 이관기(李寬基)가 다시 수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다른 관아에서 형조로 이송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섯 번째로 <작배죄인질>에 수록되어 있는 67명의 신자들은 형조에서 유배에 처한 경우이다. 이들의 각 성명 아래에는 가족 관계, 거주지, 체포 날짜, 유배 날짜, 유배지 등이 작은 글씨로 첨부되어 있으며, 수록 내용 또한 자세한 편이다. 이들은 체포된 후 배교하거나 교회 안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제2권의 부록으로는 〈추관지을사춘감결)(秋官誌乙巳春甘結)과 <요화사서소화기)(妖畫邪燒)하시 등 두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전자는 1785년의 명례방(明禮坊) 사건 즉 김범우(金範禹)가 형조에 체포되어 유배된 사건 내용으로, 《추관지》 제4편 장금부(掌禁部)법금(法禁) 금사학 조(禁邪學條)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후자는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압수하여 불태우거나 없애 버린 서적이나 천주교 성물 목록을 기록한 것으로, 이들은 한신애(韓新愛) · 정광 수(鄭光受) 등 15명에게서 압수된 것들이다.
〔사료적 가치〕 현재 완질본이 남아 있는 양화진본 《사학징의》의 가치는 우선 이기경의 《벽위편》과 함께 신유박해의 전말은 물론 초기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특히 《벽위편》에 비해 그 내용이 아주 정확하고 풍부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편찬자의 의견이 전혀 가미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순수한 1차 사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샤를르 달레(Ch. 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L'Eglise de Coree)가 대본으로 삼은 <비망기>의 저자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는 《벽위편》이나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입수할 수는 있었지만, 《사학징의》는 입수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사》나 <백서> 등 교회측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이들 자료에 단지 인명만 나타나거나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들을 보완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내용 면에서 볼 때, 《사학징의》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경우이거나 이들과 가까웠던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진술 내용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실들, 즉 출신 신분이나 배경, 탄생지와 거주지, 입교 동기와 세례 여부, 신앙 생활, 전교 활동과 교류 관계, 그리고 부록에 나타나는 당시의 교회 서적과 성물 등은 당시의 교회사를 밝히는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형조나 지방 관아에서 사형 · 장폐 등으로 죽은 신자들에 관한 기록은 그들의 순교 여부를 확인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이다. → 이기경 ; 《벽위편》)
※ 참고문헌 《사학징의》(필사본),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이기경 편, 《벽위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78/ 《달레 교회사》 상1 金良善, 〈辛酉迫害의 貴重資料 邪學懲義에 대하여>, 《숭대학보》 3호, 1957/ 趙珖, 〈邪學懲義의 史料的 價值〉, 《邪學懲義》, 弗咸文化社, 19771 崔奭祐,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初期天主敎會〉, 《敎會史 研究》 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金翰奎, 〈邪學懲義 통해서 본 初期 韓國天主教會의 몇 가지 問題〉, 《敎會史 研究》 2집, 1979/ 朱明俊, 〈白山黑水文庫本 叢史의 邪學懲義와 闢衛彙編〉, 《韓國敎會史記文集》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車基真〕
《사학징의》
邪學懲義
글자 크기
6권

《사학징의》(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