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심

敬畏心

〔라〕timor (Dei) · 〔영〕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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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심은 인간이 절대자인 신 앞에서 느끼게 되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을 뜻한다. 인간이 이러한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은, 절대자의 무한함과 전지 전능함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또 미소한 자신은 그러한 절대자로부터 존재함을 받고 그분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흠숭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이나 절대적 진리를 느끼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그 종교의 출발점에는 이 경외심이 있고, 이것은 그 종교 안에서 절대자를 향해 행해지는 모든 행위의 커다란 동기 중의 하나가 된다. 아울러 작게는 한 개인의 종교적 삶의 출발점에도 역시 경외심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경외심을 전체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종교 행위 전체를 살펴보아야 하는 큰 작업이 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주로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말하는 경외심에 국한시켜, 그에 대한 이해가 근대에 이르면서 어떻게 정립되어 가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경외심과 가르침〕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전능하고, 지극히 거룩하며, 무한히 정의롭고 선한 하느님으로부터 설명해야만 한다. 그분은 당신의 존재를 통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당신의 율법을 통해서 그것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얼마나 경외심이 필요한 것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인간에게 말해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에게 외적으로는 당신의 위대함과 심판에 대해 계시해 주고, 내적으로는 그 경외심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회개하도록 한다. 그리고 성전(聖傳) 안에서 끊임없이 경외심의 필요성을 가르치며, 아울러 교도권의 가르침과 성인들과 우리들의 체험을 통해 성령의 다양한 이끄심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경외심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는 최상의 선을 드러내 보여주는 은총이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성서에서나 교부들이 지적하는 경외심의 첫번째 역할은 인간을 회개로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경외심은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의화(義化, justification)될 수 있는 준비에 필요한 뉘우침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에는 두 종류의 이단이 생겨나 이러한 경외심의 역할에 반론을 펴게 되는데, 그 첫번째가 루터(M. Luther, 1483~1546)이다. 그는 강제에 의해 또는 정의에 대한 사랑에서가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오는 이러한 뉘우침은 죄에 대한 욕구 자체를 없앨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외심은 여전히 종교 개혁을 위한 회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회개의 원인이 오직 하느님일 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말씀은 율법을 통해 경외심을 주고 복음서 안에서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외심은 "적극적이거나 인위적이거나 강요된 회개가 아니라 수동적인 것으로, 양심의 떨림이며 마음의 참된 고통이며 죽음의 느낌" 이라고 뮐러(J.T. Müller)는 루터의 이론에 반박한다.
두번째의 이단은 얀센주의(Jansenism)이다. 얀센(C.O. Jansen, 1585~1638)은 이성적 피조물이 무엇을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탐욕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지고한 사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칙은 그로 하여금 지고한 사랑이 선행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죄악이라는 편벽된 결론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지혜의 외적인 출발점 이라고 하면서, 그것 자체가 유용하고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내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영혼 안에 경외심을 일으키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은총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그 반대되는 결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외심은 신앙을 전제로 하는 것이면서도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가 말한 것처럼 그 근원은 '인간의 본성' 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단의 주장을 반박하는 교도권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7년 1월에 열린 회의에서 의화에 관한 교령을 통해 “성인(成人)들은 자극을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께 동의하고 자유롭게 협력함으로써 의화되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1551년에 열린 14번째 회의에서는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지옥과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불완전한 회개(하등 통회)가 죄짓고자 하는 욕망을 몰아내 주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라면, 이것이 사람을 위선이나 더 큰 죄로 이끈다고 할 수 없으며, 그 또한 하느님의 선물이고 성령의 충동으로 참회하는 자에게 정의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도 알렉산더 8세(1690. 12. 7), 글레멘스 11세(1713.9.8), 비오 6세(1794. 8. 28) 등도 각각 성 아우구스티노의 정신에 따른 문서들을 통해 '좋은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유용한 것이든 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을 죄에서 멀어지게 하는 힘을 가질 수 없다' 는 얀센주의의 주장을 부인하고 두려움과 사랑과의 관계를 밝혔다.
〔경외심과 완덕〕 영혼을 완덕(完德)으로 끌어올려 주는 것은 경외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렇지만 죄로부터 보호를 받고 덕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경외심이 필요하다. 우선 경외심은 의인이 악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며, 또 자만심을 가지지 않게 해주고, 하느님의 벌을 두려워하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이 경외심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정의하
고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경외심을 '은총의 수호자' 라고 부르며, 지혜의 물이 헛된 영광의 먼지로 더렵혀지지 않게 막아주는 덮개라고 했다. 그리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영신 수련 중 지옥의 묵상을 위한 두번째 길잡이에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구함이니, 혹 내 탓으로 인해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 벼렸을지라도 적어도 내가 죄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지옥의 영혼들이 받고 있는 형벌의 맛을 절실히 느끼기를 구할 것이다"(윤양석 역,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7)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라고 한다. 또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Château intérieur)에서 세번째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이 아무리 높은 곳까지 들어올려지더라도, 이 유배 생활에서는 결코 확신해서는 안되며, 언제나 두려움을 가지고 걸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살레시오의 프란치스코는 그의 저서 《신애론》(Traité de l'Amour de Dieu) 11권에서 놀랍도록 예리하게 경외심을 분석하여 노예의 두려움과 신의 사랑을 비교해서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라고 명하지만, 또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경외심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사랑을 손상시키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망각한 바리사이파 같은 엄격주의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배치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경외심은 영혼을 덕(德)에 전념하게 함으로써 영적인 진보를 더욱 직접적으로 도와주며, 신앙에서 나오는 경외심은 더 확고한 수련을 요구하면서 도와준다. 교부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들은 경외심을 영적 상승의 첫단계라고 하여 회개를 낳고, 의식을 예민하게 하며, 겸손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경외심에 터전하고 있는 견고한 영혼들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결코 잊지 않으며, 은총에만 의지하고 은총의 인도를 따르며 악행을 삼가함으로써 완덕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때 하느님께서 그들을 비추어 주고 그들의 사랑을 순화해 준다.
〔경외심의 본질〕 하느님께서는 먼저 노예적인 경외심을 도구로 하여 영혼 안에서 덕들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머물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적인 두려움의 상태에 계속 놓아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경외심이 끌어내는 사랑 자체가 두려움을 몰아내거나, 경외심을 희망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새로운 지향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그분의 사랑에 의해 벌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두려워하게 되고, 성부를 흠숭하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어 노예의 경외심을 '자녀(子女)의 경외심' 으로 바꾸어 나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서와 성인들의 가르침은 자녀의 경외심과 함께 '신부(新婦)의 경외심' 을 갖도록 가르친다. 신부와 신랑의 관계는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한 것이고, 부부의 사랑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의 신비와, 그 사랑이 영혼 안에서 일으키는 순수한 경외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녀의 경외심이 주는 선물은 특히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닮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처럼 성부를 흠승하면서 그분 뜻에 따르게 하며, 이로써 우리를 거룩함의 정상에까지 나아가도록 한다. 또 이 선물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강생의 기름 부음으로 우리에게 내려진 성령의 충만한 강림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요한 1, 16). 또 여기에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이사 11, 1-2)고 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노예의 경외심에서 자녀의 경외심으로 옮겨가는 것은 순수한 사랑으로의 회개를 통해 일어나는 일이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사랑을 배제하는 이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건전한 경외심은 지복(至福)에 대한 욕구에서 나온다. 또 자녀와 신부의 경외심은 더 이상 자비에 대한 관심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완전한 사랑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며, 그분 안에서 모든 것들을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하나이므로 우리의 경외심도 그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가지밖에 없다. 물론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그러한 근심조차도 사라지게 된다. 자녀의 경외심은 바로 '감탄' 과 '거룩한 떨림' 이며, 피조물이 지극히 거룩한 분을 마주 대하면서 느끼는 '현기증' 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무한한 위엄, 삼위 일체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의존은 경외심과 하느님의 사랑 사이에 있는 필연적인 관계를 완결짓는 일이다.
※ 참고문헌  F. Vigouroux, Crainte de Dieu, 《DB》, t. 2, 1899/ M. Viller S.J. Martyre et perfection, Le Martyre et I'ascèse, 《RAM》, t. 6, 1925/ -, La spiritualité des premiers siècles chrétiens, Paris, 1930/ J. Farge ; M. Viller, Charité chez. les Pères, t. 2, col. 523~569/ G. Bardy, La vie spir- ituelle, d' après les Pères des trois premiers sieclces, Paris, Apatheia, t.1, 1935, col. 727~7461 Éphrem Boularand,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 Beauschenes, Paris, 1986. 〔宋炯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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