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생산 수단의 공유화 혹은 사회화를 경제체제의 기초로 삼아 사회적인 제관계를 건설하고자 하는사상이나 실천적인 경향.
〔개념과 역사〕 이 용어가 등장한 초기부터 현재까지사회주의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한마디로정의하기는 어렵다. 즉 민족이나 국가, 철학적인 전제,실천적인 전략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사회주의는 철학적인 전제에 따라 무신론적인 사회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 · 사회 민주주의 · 그리스도교사회주의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며, 지리적인 특성에 따라 유럽 사회주의 · 아시아 사회주의 · 아프리카 사회주의 · 아랍 사회주의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편 상대적으로 단호하고 극단적인 이념과 실천을 채택하고 있는사회주의를 '공산주의' 로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사회주의를 공산주의 · 마르크스주의(Marxism) 등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1803년에출판된 이탈리아의 한 출판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대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 프랑스 의 생 시몽주의자들이었다. 당시 사회주의는 생 시몽주의의 사상적인 특징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이후에 인권의 경제적 · 사회적인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며, 새로운 사회 질서를 지향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사회주의적인 주장이나 실천은 매우다양한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의생 시몽(H. de Saint-Simon, 1760~1825)과 푸리에(C. Fourier,1772~1837), 영국의 오언(R. Owen, 1771~1858)의 사상 등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행복과 복리를 증진시키고 경쟁적인 관계를 제거하려 하였으며 생산자 중심의 사회 통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 사회적인 측면이 적절히 조성된다면 이전의 정치 제도를 대체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평화적이며 협동적인 세계가 새롭게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 방법에대한 생각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푸리에주의자들과 오언주의자들은 지역 공동체를 건설하여 인간의 복지를 증진하고자 하였으며, 폭력이나 혁명보다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사회 구조를 대치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생 시몽주의자들은 대규모의 조직과 과학적인 기획의 효과를 이용하고자 하였으며, 국가를 과학과고도의 기술 능력에 의해 통치되는 거대한 생산 조직체로 변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계적인 기획(project)에 의해 변화된 새로운 국가들을 연결시키고자하였다. 한편 오언주의자들과 푸리에주의자들은 정치 활동을 회피한 반면에, 생 시몽주의자들은 국가와 정부의정책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으며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정부 조직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근본적인 주장은 협동의 기반 위에서 모든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실현하고, 경쟁보다는 협동적인 행위 양식을 사회적인 신념으로 정착시키고자 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외에도 자발성과 혁명적인 행동의 미덕을 강조하였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 블랑키(L.-A. Blanqui, 1805~1881)와 무정부주의(anarchism) 전통의 창시자 프루동(P-J.Proudhon, 1809~1865) 등이 있었으며, 모리스(J.F.D. Maurice,1805~1872)와 킹즐리(C. Kingsley, 1819~1875)가 이끄는'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운동'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일부의 학자들은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의 《국가》(Republic)나 모어(Thomas More, 1477~1535)의 《유토피아》(Utopia),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의《태양의 도시》(City ofthe Sun) , 그 밖에 르네상스 시대의여러 작품 등에서 기원을 찾고 있다. 또한 초대 교회와중세의 수도원 생활에서 그 기원을 찾는 학자들도 있다.
〔역사적인 발전〕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 : 마르크스(K.H. Marx, 1818~1883) 사상의 등장은 철학적인 전제와실천적인 전략에 있어 이전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제시하도록 하였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운동을 계급적인 정치 운동으로 주창하였고, 스스로를 과학적인 사회주의라지칭하여 이전의 사회주의와 구분하였다. 그에 의하면사회주의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적인 단계이며,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들이마련되는 시기이다. 이 단계에서는 공업 활동과 농업 활동, 정신 활동과 육체 활동 간의 대립이 지양되고, 상호협동과 공동 작업으로 착취 없는 사회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따라서 이 단계는 공산주의적인 전환의 완전한 토대를 구축하는 혁명적인 발전 과정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사상은 사회주의 운동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이때까지의 사회주의 운동은 고립 · 분산적으로 진행되었으나 1864년에 런던에서 시작된 제1 인터내셔널을통해 조직화하려고 하였다. 이 회의에는 단순한 노동 조합주의, 즉 생디칼라증(syndicalisme)에서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분파들이 참가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조직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하였으나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영국을제외한 유럽 대륙, 특히 독일에서 그의 사상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이후 노동 운동의 주요 이론적인 토대로 정착되었다. 마르크스 사상이 각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민족적 또는 국가적인 특수성을 반영한 다양한 유형의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였다. 독일의 사회 민주당은 경제력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를 출현시킬 것이라는 카우츠키(K. Kautsky, 1854~1938)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베른슈타인(E. Bernstein, 1850~1932)은 혁명적인 전략의 포기와 의회를 통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은 바쿠닌(M.A. Bakunin, 1814~1876)에 의해 주도된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또 프랑스의 사회주의에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는 집단과 블랑키 · 프루동 등을 수용하려는 집단 간의 갈등이일어났다. 이러한 다양성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이 단일한 지도 체제에 의해 전개될 수 없음을 의미하였고, 결과적으로 1876년에 제1 인터내셔널은 해체되었다.
20세기 초에 사회주의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의회 세력으로 전환되었다. 혁명적인 과정을 통한 체제 변혁보다는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 세력으로 정착된 것이다. 1889년에 창설된 제2 인터내셔널은 국가를 초월한 국제적인 단결보다는 의회주의에 입각한 정치 활동을강조함으로써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의 일치성과보편성, 특히 목적의 국제주의적인지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운동세력은 각 국가의 정치 체제에 편입됨으로써 다양한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들은 노동 계급의 국제적인 연대라는이념을 버리고 각 정부의 전쟁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고집하는 혁명적인 사회주의는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소수이지만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러시아의 사회주의 세력은 1917년의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러시아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 러시아 혁명은 정당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와 혁명적인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레닌(V. Lenin, 1870~1924)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노선으로 하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레닌은 1919년에 국가 권력의 전복 ·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절멸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 대중 자치에 의한 의회 민주주의의 대치 · 자본의 탈취 · 사유 재산의 철폐와생산 수단의 국유화 등을 표방한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제3 인터내셔널 1차 대회 이후에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조직되기 시작했고, 1920년에 개최된 2차 대회에서는 21개의 회원 규약을 통해사회당과 중도파를 비판하는 한편 모든 당의 강령을 공산주의 강령으로 대치하라고 요구하였다. 또 모든 사회주의 운동은 코민테른(Komintern)의 지도하에 통일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사회주의자의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의 탈퇴를 촉발하였다. 탈퇴한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노동자 국제 연맹' 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결성해 독자 노선을 구축하였으며, 코민테 른은 이들을 사회주의의 배신자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갈등은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하여금 국가적인 특성에 따른 독자 노선을 걷게 하였고, 결국 공산주의 운동과의 결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독일 · 프랑스 등의 공산당은 노동 운동에 있어 소수의 위치로 전락하고말았다.
유럽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 이후 유럽의 사회주의운동은 대부분 현 정치 체제 안에서 노동 계급의 이익을최대한 관철시키려는 정당 운동으로 남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냉전 정책과 맞물리면서 이러한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이념으로 채택하지 않았고 정권 획득을 위한 대중 정당이 되고자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통합하는 혼합경제 체제를 지향하였다. 한편 유럽의 공산주의 운동은 프랑스 · 이탈리아 · 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하였고,1970년대에는 이른바 '유로 공산주의' 라는 이름하에 소련의 정책을 비판하는 등 다른 노선을 취하였다.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국으로서 모든 것을 지도하려고 하였던 소련의 중앙집권적인 지도에 반기를 든 것이다.이들은 모스크바에 대한 각 공산당의자립성과 동등권 · 사회주의 건설을위한 비혁명적인 민주주의 노선 · 다원적이고 민주적인사회주의 모델 추구 등을 주장하였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소련의 점령하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련과의긴밀한 관계 아래에서 사회주의 정책을 편 이 나라들은1985년에 집권한 고르바초프(M.S. Gorbachyov, 1931~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과 개방 정책에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개혁 정책으로 조성된 탈냉전 분위기는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내부적인 모순들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고, 끝내 사회주의 정부는 권력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소련 또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해체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은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 아랍 · 아시아 ·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도 전파되어 일부 국가에서 혁명에 성공하는 등 저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이들 지역에서는 제국주의로부터의 탈피라는 민족 해방 운동의 성격과 결합하여 진행되었다.
〔사회주의와 가톨릭 교회〕 회칙을 통한 교회의 입장 :가톨릭 교회는 마르크스주의나 이를 자신의 이념적인 기초로 삼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거부한다. 마르크스 철학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신을 부정할 뿐만아니라 인간의 영혼 · 초월성 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적인 기초에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자연법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이에 역행한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사회주의, 특히 호전적인 사회주의가 채택하고 있는 종교 억압 · 개인의 개성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적인 정책 등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1846년에 발표된 교황 비오 9세(1846~1878)의 회칙<귀 플루리부스>(Qui Pluribus)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하느님 경배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가정과 교육에 관한 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라고비판하였다. 또 1864년에 반포된 <관타 쿠라>(QuantaCura)와 이 회칙에 첨부된 <실라부스>(Syllabus)에서 비오9세 교황은 이들의 철학이 자연법과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있으며,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권위를 공격하고 교회의 재산, 나아가서 모든 사유 재산을 약탈 · 파괴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고 비판하였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1891년에 발표한 <노동 헌장>(Rerum Novarum)에서 사회주의는 노동자에게유해하고 정의에 위반되며 사적 소유권을 반대하기 때문에 배격한다고 선언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이 그릇된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한 교황은 다음과 같이 사회주의를 비판하였다. 첫째,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폐기하고자하였다. 둘째, 명백히 실현 불가능한 해결책을 주장하였다. 즉 그들은 모든 불평등이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의 성취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는 고려하지않았다. 셋째, 계급간의 적대감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라고 가정하였다. 넷째, 모든 권리를 국가가 주관하게 하고 가족 생활에까지 정부가 관여하게 한다. 더구나 개인과 가족을 국가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이러한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노동자들을비인간적인 상태로 몰아넣는 방임주의적인 자본주의는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았다.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레오 13세의 회칙에서전제된 원리를 대부분 그대로 고수해 공산주의를 치명적인 질병으로 취급하였지만 일부 사회주의의 변화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교황은 사회주의 운동이 공산당과 사회당으로 나뉘어 전개됨에 따라 과격한 경향의 사회주의와 온건한 경향의 사회주의로 구별하였다. 전자의경우는 무자비한 계급 투쟁과 사유 재산의 완전 철폐를주장하는 사회주의로서 그리스도교 계명에 어긋나는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후자의 경우는 계급 투쟁과 재산의폐지를 주장하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근접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 즉 공동선을 위해 중요 재산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한편 비오 11세 교황은스탈린(I.V. Stalin, 1879~1953)이 전개하고 있던 대규모 숙청 사업 ·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멕시코의 내전으로 인한 사회주의의 득세 · 교회를 비판 대상으로 설정한 코민테른(1935) 등에 맞서 발표한 회칙 〈디비니 레템토리스>(Divini Redemptoris, 1937. 3. 19)를 통해 공산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교황의 비판은 주로 볼세비즘(Bolshe-vism)이 주장하고 있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원리에초점을 맞추어 이데올로기와 철학적인 원리를 비판하였다. 첫째, 공산주의는 새로운 사회상과 관련하여 잘못된
메시아적인 이상과 거짓 약속을 제시하였다. 둘째, 오직물질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신 · 영혼 · 내세에 대한 희망 등 모든 믿음을 배제한 것이다.셋째, 계급 투쟁과 그로 인한 폭력적인 증오와 파괴가 진보를 위해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넷째, 집단 앞에서는 어떠한 개인의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다. 다섯째, 공산주의는 모든 계 급 제도 · 부모의 권위를 포함하여 신성한 모든 권위를거부한다. 여섯째, 재산에 대한 자연적인 권리가 폐지된다. 일곱째, 결혼과 가족이 완전히 침식된다. 여덟째, 집 단의 지배가 물질적인 생산을 그 유일한 목표로 설정하고 개인성을 철저히 불신한다. 아홉째, 도덕이 단순한 경제 질서의 산물로 격하된다. 열 번째, 비록 공산주의는국가 권력이 소멸한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이들 국가는무제한적인 권력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비판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적인체제들은 인간의 참된 가치와 초자연적인 목적을 무시하고 사회적인 입장에서 오직 사회가 허락하는 권리만을인간에게 허용한다는 기초적인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마리탱(J. Maritain, 882~1973)도 전체주의 사회의 가장 큰모순은 인격의 왜곡과 희생이라고 하여 공산주의가 인격을 무시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변화되었다.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회칙<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에서 사회주의와그리스도교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보았지만 이들과의 대화를 제안하였으며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그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우주와 인간의 본질 · 기원 · 목적에 관한 사회주의자들의 학설로부터 경제 · 사회 · 문화 · 정치적인 계획들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즉 사회주의자들의 현실적인 정책이 올바른 지성의 원칙에 합치하고 인간의 정당한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이라면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무신론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한 단계 높은 대화와 협력의 길을 열었다. 공의회는 무신론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한편, 교회는모든 사람들,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의올바른 진보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무신론자들에게는 열린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검토해 볼 것을 촉구하였는데, 교회의 이러한 분위기는1965년에 신학자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간의 대화를가능하게 하였다. 양 진영의 철학자 350명이 잘츠부르 크(Salzburg)에서 공동 모임을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인 대화의 장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또한 소련의 스탈린주의(Stalinism)의 극복, 두브체크(Al. Dubcek, 1921~1992)가 주도하는 '인간적인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 서유럽의 신마르크스주의(Neo-Mammimim)의 등장 등으로 가능하였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회주의 국가의 급격한 해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들을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회칙 <백 주년>(Centesi-mus Annus, 1991)에 의하면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갖는비효율성, 즉 개인적인 창의성의 억제 사유 재산의 부정 · 자유에 대한 인권 침해의 결과로 사회주의의 위기가초래되었다고 하였으며,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해체는마르크스의 사회 분석과 소외론이 오류였음을 보여 주는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대화의 노력 : 최근에는 인류의 행복을 위한 사회적인실천이 그리스도교의 임무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되면서사회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등 공동 노력이 모색되었다. 대화의 노력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제3 세계에서도 양상을 달리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제3 세계에서전개되고 있는 일부 그리스도교의 해방 운동은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전개되는데, 이는 저발전과 극심한 빈부 격차 ·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탄압 등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theology ofliberation)을 들 수 있다. 해방 신학은 사회 분석의 도구로서 마르크스의 경제 분석을 받아들이며, 이론보다는 실천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채택함에 따라 사회적인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 과학적인 분석 방법을 수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신학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해방 신학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이미 여러 국가에서 실험된 형태라기보다는 불평등과 사회적인 착취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가 구현될 수있는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유럽에서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가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산업 사회의 비인간화에 대한 사회주의적인 비판과 함께 나타났는데, 복음을 세속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그리스도교적인 기초 위에 접목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과 이성의 승리를 통해 형성되는 형제애로 충만한 지상의 도덕 적인 왕국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베른슈타인,페이비언주의(Fabianism)에 의해 계승 · 발전되었으며,서유럽 사회당의 민주적 · 점진적 사회주의와 결합하였 다. 칠레의 아엔데(S. Allende, 1908~1973) 정부의 실험적인정책은 이러한 전통의 특별한 시험 무대가 되었다.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아엔데 정부는 그리스도교의 지지를받으며 탄생하였고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사회주의 정권 참여를 허용하였고, 아엔데 정부를 하느님 나라 건설의 중요한 계기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로 구성된 '80인 그룹' 은 보다 적극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였고 훗날 '사회주의를지향하는 그리스도교인'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이러한움직임은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전세계적으로 발전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러한 지향을 따랐고 네덜란드 · 벨기에 · 스페인 등지에서도 같은 내용의 그룹들이 탄생하였다. 이미친사회주의적인 그리스도교 전통이 있던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노선의 길을 걷고 있었고,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미국에서는1974년에 '사회주의를 향한 미국 그리스도교인' 이라는이름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전세계적인 호응의 결과로 1975년에 캐나다 퀘벡(Quebec)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세계 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다.이러한 경험들은 최근 사회주의권이 해체됨에 따라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리스도교인과 사회주의자들이 공동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참여한양 진영 모두를 성숙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특히 타인을 위한 헌신적인 행동은 개방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 공산주의 ; → 가톨릭 사회교리 ; 마르크스주의 ; 사회 ; 해방 신학)
※ 참고문헌 Rosemary Radford Reuther, The Radical Kingdom,Paulist Press, New York, 1970/ G.D.H. Cole,A History ofSocialist Thought,vol. 1, MacMiillan & Co., London, 1995/ Jean-Yves Calvez, S.J. The SocialChurch and Social Justice, Henry Regnery Co., Chicago, 1961/ 김춘호,《사회주의와 가톨릭 사회 교시》, 분도출판사, 1991/ 양한모, 《교회와공산주의》, 가톨릭 출판사, 1987/ Karl H. Pescheke, 유봉준 ,《그리스도교 윤리학》, 분도출판사, 1992/ A.F. 맥거번, 강문구 역, 《마르크시즘과 기독교》, 한울, 198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엮음, 《교회와 사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朴眩準]
사회주의
社會主義
〔라〕socialismus · 〔영〕soc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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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운동을 계급적인 정치 운동으로 주창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제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