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부평구 산곡1동 5-3 소재. 1970년 11월 1일 부평1동(富平一洞, 현 부평4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가정. 관할 구역은 산곡1동, 청천1동 전 지역과 산곡2동,청천2동 일부 지역. 〔교 세〕 1971년 1,150명, 1976년2,014명, 1981년 3,056명, 1987년 4,246명, 1992년4,701명, 1996년 4,586명. 〔역대 신부〕 초대 킨(A.V.Keane, 김원선) 빈천시오(1970. 10~1977. 8), 2대 펠리니(R. Pellini, 방인이) 로베르토(1977.8 6) , 3대 나모스키(J. Najmowski, 나현철) 야고보(1983.6~11), 4대 송병섭(宋秉燮) 아우구스티노(1983. 11~1985. 4), 5대 슈미트(P.Schmidt, 심재성) 바오로(1985. 4~1988. 12), 6대 송병섭(1988. 12~1996.2) , 7대 장희성(張希聖) 프란치스코(1996.2~현재).
〔공소 시대〕 이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공주(公州, 현 공주 중동) 본당 신자였던 김석태(金碩泰, 마티아)가 1942년 초에 인천시 백마장(白馬場, 현 산곡동)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공소가 없었으므로 그는 백마장 일대에 거주하던 7~8가구의 신자들을 모아모임을 가졌다. 이에 답동(沓洞) 본당 임종국(林鍾國, 바오로) 신부는 1942년 8월 15일자로 백마장 공소를 설립하면서 김석태를 초대 공소 회장으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50여 명의 신자들이 홍규석(요한)의 집에서 판공 성사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정이 여의치 않아 8 · 15 광복이 될 때까지 공소를 치르지 못하다가 1946년부터 다시 봄가을로 판공 성사가 있게 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공소 모임은 일시 중지되고말았다. 그러다가 1951년 가을부터는 부평의 미군 군종윌리스(프란치스코) 신부가 부대 안의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아울러 산곡초등학교 뒤의부지 90평을 매입할 수 있도록 주선함으로써 백마장 공소의 강당 건립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 후 윌리스 신부의 자재 지원과 답동 본당에서의 건축비 지원으로 1952년 1월 12일 10평 규모의 강당을 완공하여 축성하였다.이어 같은 해 3월 부평(현 부평2동) 본당이 신설되면서 백마장 공소는 이 본당 관할이 되었다가 1964년 7월 14일부평1동 본당이 신설되면서 새 본당 소속이 되었다.
1968년 1월 부평1동 본당 테이슨(Theisen, 太義善) 신부는 신자수가 증가하자 백마장 공소 즉 산곡동 공소를본당으로 승격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공소 신자들과 이문제를 협의한 후, 현 본당 소재지의 부지 1,200평을 매입하였다. 같은 해 7월 20일 우선 수녀원을 건립한 데이어 이듬해 8월 15일에는 242평 규모의 성당과 회의실및 교리실을 완공하였는데, 베네딕도회의 슈미트(A.Schmid, 安) 신부가 설계한 이 성당은 국내 최초로 분해식 벽을 건축 기법에 도입하여 벽을 제거하면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봉헌식은 1970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며, 그 해11월 1일에는 산곡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초대 주임으로 킨 신부가 부임하여 산곡1 · 2동, 청천동,효성동 일대를 비롯한 서곳 · 백석 · 심곡 · 석남 · 청라도공소를 관할하게 되었다.
〔성장과 발전〕 초대 주임 킨 신부와 신자들은 1972년1월에 사제관을 건립하고 곧 이어 본당 신용 협동 조합을 창립하였는데, 이 신용 협동 조합은 1977년에 자체회관을 건립함과 동시에 본당에서 독립하였다. 2대 주임펠리니 신부 때인 1980년 1월에는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이듬해 2월 3일에는 효성동(曉星洞) 본당을 분리·신설하면서 428명의 교적을 이관하였고, 4월에는 교육관을 신축한 데 이어 1982년 2월 16일에는 부평3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52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한편 1983년 11월 21일자로 본당 사목권이 마리아회에 위임되어 이 수도회 소속의 송병섭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송병섭 신부는 1984년 5월 옛 사제관자리에 마리아회의 '샤미나드 피정의 집' 을 준공하였고,교구 지원으로 총 건평 180평 규모의 사제관, 수녀원유치원 등을 증축하였다. 이후에도 신자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1986년 9월 20일에는 산곡2동(현 산곡3동) 본당을 세 번째 자 본당으로 분리함과 동시에 786명의 교적을 이관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심 강화를 위해구역 · 반 모임을 강화하였고, 각종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1988년 12월 말에는 설립 이후부터 본당 사목을 도왔던 '예수 성심 시녀회' 의 분원이 철수되고 대신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 가 본당에 진출하였다. 아울러본당에서는 관할 구역 내의 불우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지급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로서의 기반을확고히 다졌다. 이어 1997년 3월에는 성당 건물과 각종시설물들을 보수 · 교체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성체조배실(12평)을 마련한 것을 계기로 성령 기도회를 발족시켰으며, 1998년에 들어와서는 신자 한 사람이 한 사람 이상을 입교시키도록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전교 활동에 나서고 있다. (→ 인천교구 ; 부평4동 본당)
※ 참고문헌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부평4동 본당 30년사》, 천주교 인천교구 부평4동 교회, 1995. [편찬실]
산곡동 본당
山谷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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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