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설교. 가장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집성문으로서 예수가 가파르나움 근처의 언덕에서 군중에게 들려주었던 설교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말씀이나 사화들을 주제별로 모아 다섯 개의 집성문으로 엮었는데, 산상 설교(5-7장), 파견 설교(10장), 비유 설교(13장), 공동체 설교(18장), 심판 설교(23장은 유대교 심판 설교, 24-25장은 종말 심판 설교) 등이다. 이 중에서 산상 설교, 일명 산상 수훈(山上垂訓)은 예수가 산에서 가르쳤다 하여(마태 5, 1)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상 설교와 골격이 비슷한 설교가루가 복음 6장 20-49절에 있는데 이는 평지에서 가르쳤다 해서(루가 6, 17) '평지 설교 라고 한다. 마태오의 산상 설교와 루가의 평지 설교를 비교해 보면 산상 설교의분량이 훨씬 더 많다. 산상 설교는 평지 설교 분량을 거
의 다 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공통 요소), 평지 설교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추가 요소). 두설교의 공통 요소는 50~60년경 시리아에서 집필된 《예수 어록》에 수록된 설교집을 두 복음사가가 제각기 옮겨쓴 것들이고, 산상 설교에만 있는 추가 요소는 마태오가주로 자기 교회의 전승을 채집하여 수록한 것들이다.
〔행복 선언〕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현세의 행복을 약속한 적은 없지만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복은 수시로 약속하였다. 그렇지만 신약성서의 기록상으로는 예수가 연속적으로 행복을 약속한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이 산상 설교 및 평지 설교에 실려 있는 '행복선언' 이다. 예수가 약속한 행복은 일반적인 행복이 아니고 진짜 복인 까닭에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진복' (眞 福)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였고, 8종의 행복을 이야기했다고 하여 마태오 복음 5장 3-12절과 루가 복음 6장 20-23절을 '진복 팔단' (眞福八端)이라고 불렀다. 두 복음서에 수록된 행복 선언문의 형성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같다.
① 예수는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한 맺힌 이들을두고 복되다고 하였다. 하느님 나라가 오면, 다시 말해하느님이 친히 선정을 베푸시게 되면,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서러운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배부르게 되며 환히 웃게 되리라고 약속하였다. 저 불행한 이들이 행복한 이들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서러운 까닭에 복된 것이 결코 아니다. 현실은 비록 불행하지만 하느님 나라가 오면 그들의 불행이 상상을 넘어서는 행복으로 바뀌겠기에 복된 것이다. 앞날의 희망 때문에 그들이 복되다고 예수는 외쳤던것이다. 예수가 직접 말했을 행복 선언 형태는 루가 복음6장 20b-21절인데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복되어라,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들! 그대들은 웃게 되리니."
② 30년 5월 말경 예루살렘에서창립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한동안유대교 안의 소집단이었으나 49년경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 회의 이후부터 상당히 자주적인 길을 걷다가,마침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어서 율법학자들이얌니야에서 유대교를 재건할 무렵부터는 신흥 독립 종단이 되었다.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인들로부터 모진 박해를 겪었는데, 회당 예배 때 내쫓기기도 하고 유대교 신자 명단에서 제명 처분을 당하기까지도 하였다. 유대교인들에게내쫓기던 이 그리스도인들은 진복자들의 대열에 속하려는 생각으로 루가 복음 6장 22-23절의 산문식 행복 선언을 덧붙였다. "그대들은 복되도다. 사람들이 인자 때문에 그대들을 미워하면, 또는 그대들을 내쫓고 모욕하며 그대들의 이름을 사악하다고 내치면! 그날엔 기뻐하고 뛰노시오. 정녕 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는 많습니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꼭 그와 같이 대했
습니다."
③ 마지막으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 친히 선포한행복 선언 세 가지와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이 보탠 행복 선언 한 가지 등 도합 네 가지를 아홉 가지로 늘렸다.사람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줄이거나 반대로 늘리는경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사가는 행복선언의 수를 많이 늘렸고 또 이를 윤리적으로 각색하였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 복된 게 아니고 "영으로 가난한 이들" (겸손한 사람들)이 복되다, 그냥 굶주리는 이들이복된 게 아니고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복되다는 식으로 고쳐 썼던 것이다. 마태오의 행복 선언은 다음과 같다(5, 3-12).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상속받으리니.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그들은 자비를 받으리니.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리니. 복되어라,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것이니. 그대들은 복되도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그대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그대들을 반대하여 (거짓으로)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그대들은 기뻐하고 신명 내시오.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는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대들에 앞서간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했습니다."
〔땅의 소금, 세상의 빛, 넘치는 의로움〕 마태오 복음사가는 행복 선언(5, 3-12)과 여섯 가지 대당 명제들(5, 21-48) 사이에 땅의 소금에 관한 은유, 세상의 빛에 관한 은유,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넘치는 의로움이 있어야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삽입하였다. 그 뜻은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부패를막는 소금 구실과 세상을 두루 비추는 등불 구실을 하고,또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실천해서 더욱 큰 의로움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교회는 바깥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대조 공동체 · 대안공동체 · 대척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그리스도인들이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고 유대교인들보다 더 의로울수 있는가? 산상 설교의 교훈대로 살면 된다는 것이 마태오 복음사가의 대답이다. 앞뒤 문맥에 따라 좁혀서 말한다면 앞서 있는 행복 선언대로(5, 3-12), 특히 이어서나오는 여섯 가지 대당 명제의 요구대로(5, 21-48) 살면된다는 것이다. 아래의 대당 명제들에서 예수는 유대교율법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참뜻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있다.
〔여섯 가지 대당 명제〕 예수는 대당 명제들에서 먼저구약성서 또는 조상들의 구전에서 따온 유대교 율법을언급하고 나서 즉각 그에 대한 당신의 지론을 말한다. 유대교 율법을 명제(命題)라 한다면 예수의 반론은 반명제(反命題)이다. 그런데 예수는 결코 율법의 한 자 한 획에집착하지 않고 오직 율법의 기본 정신을 밝히고자 하였다. 유대교의 613개 항이나 되는 율법들을 예수는 결국원수 사랑(5, 43-48), 황금률(7, 12),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22, 37-40)으로 환원시켰다. 또 율법을 심화하기도하고(1~2 대당 명제) 폐기하기도 하였다(3~6 대당 명제).하느님이 알려 주신 계명이라고 해서 유대교에서 신성시한 율법을 예수가 비판한 사실에서 그분의 전권 의식을엿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대당 명제의 틀 그 자체는 예수까지 소급되기보다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상 1~2 대당 명제(5, 21-30)의 경우에는 이문(異文)이 없어 비교할 수 없지만, 3~6 대당명제(5, 31-48)의 경우에는 이문들이 있어 쉽게 비교할수 있다. 그런데 비교 연구해 보면 3~6 대당 명제의 이문에는 단 한 번도 대당 명제의 틀이 없다. 결국 "... 라고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라는 틀은 마태오가 만들었을 가능성이크다. 하지만 반명제 속에 담긴 예수의 말씀의 뜻은 변함이 없다.
성내지도 말라(5, 21-26) : 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출애 20, 13 ; 신명 5, 17)을 한결 더 심화하여 예수는 동족 형제 또는 신앙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조차 금하였다. 아울러 사람들이 분노하면 쉽게 할 수 있는 두가지 욕설도 금하였으니, 곧 형제더러 바보라고 해서도안되고 어리석은 놈이라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살인이란 극단적인 행동 이전에 분노와 욕설 같은 것도 이미 이웃 사랑에 금이 가게 하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 교회 전승에서 23-24절을 채록하여 21-22절의 대당 명제 다음에 배열해 놓았다. 그내용인즉 예루살렘 성전 번제의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려할 때에 형제에게 원한을 품게 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사를 바치라는 것이다.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만 자신도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토막 말씀(마태 6, 14-15 : 마르 11, 25), 먼저 남을 용서해 주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간청하라는 것이다(마태 6,12 = 루가 11, 4). 마태오 복음사가는 또한 25-26절을《예수 어록》에서 따와서(병행 ; 루가 12, 57-59) 첫 번째대당 명제 끝에다 배치하였다. 25-26절은 서둘러 적수와 화해해야만 투옥당하는 비극을 피할 수 있다는 은유인데, 그 뜻은 하느님의 종말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 만큼서둘러 회개하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라(5, 27-30) : 십계명 중 "간음하지 말라"는 금령(출애 20, 14 : 신명 5, 18)을 더욱 심화하여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마음, 유혹하는 눈길조차금하였다. 남의 아내를 차지하려는 흑심조차 품지 말라는 예수의 반명제 그 자체는 내용상 새로울 것이 없다.십계명 중에도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는 금령이있을 뿐더러(출애 20, 17 : 신명 5, 21) 유대교에서도 그점을 경고하였기 때문이다(읍기 31, 1 : 집회 9, 5). 그렇지만 두 번째 대당 명제 형식과 내용을 함께 볼 때, 즉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맞서 예수가 당신의 심화된견해를 당당히 내세웠던 사실을 감안할 때, 두 번째 대당명제에도 그의 전권 의식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코 복음 9장 43-47절에는 죄를 짓느니 차라리손 · 발 · 눈 따위의 지체를 잃는 편이 훨씬 낫다는 은유가 있다. 이것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18장 8-9절에 옮겨실었는데, 5장 29-30절에도 같은 내용을 수록함으로써죄의 충동을, 남의 아내를 범하고 싶은 충동으로 국한시켜 보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곧 남의 아내를 범하느니 차라리 눈과 손을 잃어 불구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들을 자의적으로 이해하지않고 죄의 유혹을 끊어 버리라는 식으로, 곧 상징적으로풀이하였다. 예수는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매우 충격적이고 과장된 표현을사용하였는데(7, 3-5 : 13, 32 : 17, 20 : 18, 6-9 ; 19, 12.24 ; 23, 24), 이는 일종의 언어 충격 요법이다.
소박하지 말라(5, 31-32) : 유대교 법전에 부부가 법적으로 이혼한다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는 것이지, 아내가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할 방법은 없었다.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려면 신명기 24장 1절의 규정에 따라서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한다. 곧 아내에게수치스러운 일이 있어야 하고, 아내에게 이혼 장을 써 주어야 한다. 무엇이 수치스러운 일이냐에 관해 율법학자들은 여러 가지 학설을 내세웠는데, 《미쉬나》 제3부의'제5편 이혼 장 (גִּטִּין) 9장 10절에 보면 세 가지 학설이있다. 삼마이(Shammai) 학파에서는 부인의 윤리적 비행을, 힐렐(Hiilel) 학파에서는 남편의 음식을 태운 실수를,율법학자 아키바(Akiba ben Joseph)는 남편의 눈에 거슬리는 부인의 모습을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하여 소박을 허용하였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고 소박할 결심을 하면 그 절차는 매우 간단하다. 이혼 장을 써서 아내에게 건네 주면 그 순간 아내는 소박데기가 된다. 이혼 장을 작성할 때 소박 사유는 전혀 쓸 필요가 없고 단지 남편 아무개가 아내 아무개를 소박하니다른 남자와 재혼해도 무방하다고 적은 다음, 남편과 두사람 이상의 증인이 서명하고 작성 장소와 날짜만 명기하면 충분하였다.
예수는 재혼은 말할 것도 없고 소박조차도 절대로 안된다고 였다. 한 번 맺은 부부 관계는 죽음이 갈라놓을때까지 유효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는 결혼 생활의곤경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부부에 대한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과 성스러운 뜻만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1세기경의 그리스도인들조차 예수의 소박 불가·재혼 불가 선언을 지키기 어려웠던 까닭에 그의 철저한요구를 완화하는 경향이 더러 보인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속한 시리아 지방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아내가 간음한 경우에 한해서만 소박하고 재혼할 권리를남편에게 인정하였다(5, 32).
예수의 소박 불가 선언에 관해서는 깊은 성찰을 하여야 한다. 만일 예수가 유대교의 소박률에 반대되는 반소박률을 제정하였다고 한다면 너무나 피상적인 풀이가 된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는 법률의 차원에서 옛 법을 폐기하고 새 법을 만든 한낱 입법자에 불과할 것이고, 율법학자보다 좀 참신한 모습은 보였다 하더라도 결국은 율법학자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기 기분에 따라 아내를 소박하던 이스라엘 남편들에게 사고 전환의 회개를 촉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즉예수는 어떤 트집을 잡아 아내를 소박할까 궁리하지 말고 "둘이 한 몸이 되는"(마르 10, 8) 부부 일신(夫婦一身)의 비결을 익히라고 예언자처럼 부르짖었던 것이다.
맹세하지 말라(5, 33-37) : 맹세에는 두 종류가 있다.우선 과거에 이러저러한 일을 했다거나 또는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상대로 하여금 자기 말을 믿게끔 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끌어들이는 맹세, 곧 과거 지향적 · 단정적 맹세가 있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5, 33a ; 레위19, 12)는 것은 지난 일을 두고 사실과 다르게 맹세를 하지 말라는 금령이다. 이와는 달리 앞으로 하느님께 사람 · 짐승 · 집 · 토지 따위를 바치겠다고 맹세하거나 무슨 선행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맹세, 곧 미래 지향적 · 서약적 맹세이다. "네 맹세대로 주님께 해드려라"( 33b ;신명 23, 22-24 ; 민수 30, 3 ; 시편 50, 14)는 명령이 이러한 맹세이다. 지난날의 사실과 다른 "거짓 맹세를 하지말라"는 금령과 하느님께 해드리기로 맹세한 것은 꼭 지키라는 명령은 구약의 계율들로서, 마태오 복음사가는그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명제로 만들었다.
야고보서 5장 12절에도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는 명제는 없고 오직 예수의 말씀, 곧반명제만 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 맹세하지마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에 어떤 것을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시오. 이렇게 해야 여러분은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마태오 복음5장 34-37절에 수록된 말씀보다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야고보서 5장 12절의 예수 말씀은 과거 지향적 · 단정적 맹세를 금한 것일 것이다. 즉 지난 일을 두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만이지 하느님을 들먹거리지는 말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고 무엄하게도 하느님을증인으로 내세우는 짓거리는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 사회의 소행이라는 것이고, 제자들은 전혀 맹세가 필요 없을 만큼 참되게 처신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됨을 심는 진인(眞人)이 되라는 요구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무척 두려워한 나머지 '하느님'이란 말을 발설하기조차 꺼려 하였다.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표현 대신 '하늘'' 또는 '땅' 등을 두고 맹세하였는데, 하늘 · 땅 등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우회적 표상들이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분은 땅을 지으시고다스리신다는 믿음에 따라 하느님 대신 하늘 또는 땅을두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보복하지 말라(마태 5, 38-42 = 루가 6, 29-30) : 근동아열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혈질이라 복수심이 강하다. 구약 시대의 입법자들과 율사들은 불타는 복수심을가라앉힐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복수를 허용하였다. 다만 지나친 복수에 제동을 걸어 당한 만큼 복수하는것, 당한 모양대로 복수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를 격언식으로 압축한 계율이 이른바 동태 복수법으로서 "눈에 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함무라비 법전 200조 : 출애 21,24 ; 레위 24, 20 ; 신명 19, 21)이다. 동태 복수법인 명제와 이를 폐기하는 예수의 말씀인 반명제는 마태오 복음5장 38절에만 있고 병행문인 루가 복음에는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명제와 반명제를 합친 대당 명제 양식(5, 38-39a)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가필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당 명제에 이어서 나오는 예수의 구체적 지침들은대체로 《예수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마태 5, 39b-42 ; 루가 6, 29-30). 구체적 지침들을 눈여겨보면, 악한 자에게복수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무리하게 가하고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잘해 주라고 한다. 악을 선으로갚으라는 식이다(로마 12, 17-21). 마태오 복음 5장 39b-42절에 나오는 구체적 지침 네 가지는 예수가 본래 따로따로 말한 것인데, 아마도 어록 작가가 지금처럼 한자리에 모아 놓았을 것이다.
첫 번째 지침 :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 뺨마저 돌려 대시오" (5, 39b) 병행문인 루가 복음 6장 29b절에서는 오른쪽 뺨, 왼쪽 뺨 구별 없이그냥 "당신의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편 뺨마저 내미시오"라고 하였다.
두 번째 지침 : "당신을 재판에 걸어 당신의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마저 내주시오"(5, 40). 채권자가빌려 준 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소송을 걸어 돈 대신 채무자의 속옷이라도 저당 잡으려 하거든 겉옷마저 얹어주라는 말씀이다. 값으로 따진다면 속옷보다 겉옷이 훨씬 비싸서 저당 잡기에 안성맞춤이었으나 겉옷을 담보로잡으면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빈자 보호법이 있어(출애 22, 25-26) 법적으로 겉옷을 아주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별 값어치 없는 속옷이나마저당 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불이 따로 없어 밤에 겉옷을 입고 잤으니 겉옷은 이불 구실도 하였던 것이다. 병행문인 루가 복음 6장 29b절에서는 소송을 걸어 속옷을 담보 잡는 상황이 아니고 강도에게 겉옷을 빼앗기는 상황을 전제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당신의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마시오."
세 번째 지침 : "누가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5, 41). 로마 군인들이나 관리들은 짐꾼이나 길잡이로 유대인들을 강제로 징발하였다. 일례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타 형장으로 간 키레네 출신 시몬 역시 강제로 징발되었던 것이다(마르 15, 21 : 마태 27, 32).
네 번째 지침 :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은 물리치지 마시오" (5, 42) . 이상 소개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침 네 가지는 "악한자에게 맞서지 마시오" (5, 39a)라는 반복 수령으로 환원되고, 반복 수령은 결국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환원된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즉 충격적인 네 가지 지침은 이웃 사랑이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인지를 알려 주는 극적인 사례들이라 하겠다.
원수도 사랑하라(마태 5, 43-48 ; 루가 6, 27-28. 32-36) : 이 단락은 마태오 복음사가와 루가 복음사가가 제각기 《예수 어록》에서 옮겨 쓴 것이다. 그런데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고 말씀하신 것을여러분은 들었습니다" 라는 명제는 병행문인 루가 복음 6장 27-28절과 32-36절에는 없다. 이는 《예수 어록》에도 없던 것으로 마태오 복음사가의 가필이다. 구약성서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레위 19, 18)는 계명은 있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 는 계명은 없다. 이는 "여러분의원수들을 사랑하시오" (5, 44)라는 반명제와 반대되는 명제로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지어낸 말이다.
예수의 반명제(마태 5, 44-48 ; 루가 6, 27-28. 32-36)는《예수 어록》에 있던 단구 집성문(短句集成文)을 옮겨 쓴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단구가 모여 있는데,즉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단구(5, 44-45),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아무런 보수도 없다는 단구(5, 46-47), 하느님을 본받으라는 단구(5, 48)이다. 병행문인 루가 복음의 경우 단구들의 내용은 비슷하지만 순서와 표현은 제 법 다르다. 마태오와 루가가 《예수 어록》을 베끼면서 제각기 고쳐 썼기 때문에 순서와 표현에 차이점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첫 번째 단구 :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오"(5, 44). 여기서 말하는 원수들은 개인적인 악감으로 덤비는 원수들이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들로 곧 종교적 차원의 원수들이다. 복음사가는 이어서 박해자 원수들에 대한 사랑을 뒷받침하려고 창조주 하느님의 한없는 선하심을 보여 주는 두 가지 사례를 꼽는다. "그분은 악한 사람 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5, 45). 창조주의 선하신 성품을 이스라엘 지혜 문학계에서 곧잘 논하였음을 유념할필요가 있다(시편 145, 9 ; 욥기 5, 10-11 : 지혜 11, 23-24: 집회 18, 11).
두 번째 단구 : "사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보수를 받겠습니까? 세리들도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더 낫게 한단 말입니까?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 (5, 46-47) 끼리끼리 사랑하고 인사하는 것은 어느 집단에서고 볼 수 있는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직업상의 죄인들인 세리들,그리고 인종상의 죄인들인 이방인들조차도 서로만 사랑하고 인사도 건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사람들과도 사랑과 인사를나누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낫게 하는 일이다"(5, 47).이런 삶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넘치는의로움이다"(5, 20).
5장 46-47절에는 직업상의 죄인들인 세리들과 인종상의 죄인들인 이방인들을 몹시 경멸하는 자세가 엿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종종 이방인들에게 혜택을 베풀고, 세리들 및 죄인들과는 친구로 어울렸다(마태 11, 19 ; 루가 7, 34). 본래 유대교에는 직업이나 인종 차별 이념이 있었는데, 유대계 그리스도교가 이런 이념을 물려받았고(18, 17) 그것이 《예수 어록》을 거
쳐 마태오 복음 5장 46-47절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단구 : "그러니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원수 사랑 대당 명제의 결론이며, 여섯 가지 대당 명제전체(5, 21-47)의 결론이다. 병행문인 루가 복음 6장 36절에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라고 되어 있는데 이 형태가 《예수 어록》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한 것이다. 여기에는하느님 모방 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 사상의원류는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레위 19, 2)는 명령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루가 복음이 잘 보존한 《예수 어록》의 말씀을 옮겨 쓰면서 5장 48절처럼 개작하였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덕을 많이 닦아 완덕(完德)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여섯 가지대당 명제에서 밝힌 하느님의 뜻과 관련해서 '완전하다'의 뜻을 풀이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스러운뜻을 꼭 관철하시는 까닭에 늘 완전하시고, 그리스도인 들은 예수가 밝혀 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지킬 때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
〔자선 · 기도 · 단식에 대한 가르침〕 마태오는 자선(6,2-4), 기도(6, 5-6) 및 단식(6, 16-18)에 관한 훈계 집성문을 고유 전승에서 수집하여 옮겨 썼다. 세 가지 훈계의내용은 한결같다. 위선자들처럼 신행(信行)을 드러내지말라. 그러면 공이 없어진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신행을 숨겨라. 그래야만 숨은 것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세 가지 신행을 옮겨 쓰는 기 회에 표제가 될 만한 말씀을 만들어 맨 앞줄 1절에 덧붙여 놓았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의로움을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을 일컬어 '의로움' 이라고 하였다(3, 15 : 5, 20). 6장 1절에서는 문맥상 자선과 기도와단식 등의 세 가지 신행을 가리킨다.
몰래 자선을 베풀라 : 자선을 베풀 때는 나팔을 불지말고,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다. 자선 행위를 자랑하려고 회당과 골목에서 실제로 나팔을 불었다는 고사는 없다. 인간의 과시벽을 빗대어 예수는 당신 특유의 과장법을 사용한것 같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훈계 역시 자선 행위를 되도록 숨기라고 간곡히 타이르는말씀이다. 몰래 자선을 행해야만 "숨겨진 일도 보시는 당신의 아버지께서당신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6, 4).어떻게 갚아 주실까? 자선은 자비를베푸는 선행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는 자비로 갚아 주신다. "복되어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받으리니"(5, 7). 몰래 기도하라 :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어 계시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말씀하신다(6, 5-6). 이는 엘리사 예언자가 홀로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여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는 일화를 연상하게 한다(2열왕 4,33). 이 말씀은 기도하는 장소를 한정하여 오직 골방에서만 기도하라는 훈계가 아니라 기도한다고 남들 앞에서뽐내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는 이방인들처럼 수다를 떨지 마시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6, 7). 구약에서 바알 신의제관들이 바친 기도(1열왕 18, 20-29)는 몹시 수다스럽다. 조용히 기도하지 않고 수다를 떠는 것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해서라도 소원을 성취하겠다는 것이며(6, 7), 하느님이 우리의 소원을 모르실 것 같아 그분께 가르쳐 드리겠다는 것이다(6, 8).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께 청하기도 전에 그분은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6, 8). 이것은우리가 청원 기도를 바치기 전에 하느님은 이미 우리의소원을 알고 있으니 청원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드리도록 우리에게 명하셨다(7, 7-8). 그리고 그분 친히 찬양과 감사의기도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11, 25-26) 게쎄마니에서는간절히 청원 기도를 바쳤다. 예수는 게쎄마니에서 청원기도를 드릴 때 죽음의 잔을 면하게 해주십사고 빌었으나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잔을 받아들이겠다는 단서를덧붙였다(마르 14, 36 : 마태 26, 39). 이처럼 청원 기도를바칠 때면 필요한 것들을 간구해도 좋지만, 게쎄마니의예수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소원보다는 하느님의 뜻을앞세우겠다는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
몰래 단식하라 :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단식을 하였다. 그런데 이 단락에서의 단식은 속죄의 날 단식이 아니고 열심한 사람들의 사사로운 단식이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단식한 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단식하였다(《디다케) 8, 1). 여기서 예수의 말씀은 단식할때 고통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말씀을 듣고 실행하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마태 7,21-23 ; 루가 6, 46 ; 13, 25-27) : 산상 설교는 실천을강조하는 두 가지 말씀으로 끝맺고 있다. 산상 설교로써밝혀 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 뜻대로 살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산상 설교의 결어이다. 삶이 없는 앎, 실천이 없는 신앙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 예수의 지론이요, 마태오 복음의 결론이다.
7장 21-23절의 뜻은 지금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신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범법을 일삼는 자들"로서(7, 23), 즉 산상 설교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자들로서 종말 심판관인 주 예수에게서 쫓겨날 것이다. "주님,주님, 우리가 당신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당신 이름으로귀신들을 쫓아내고, 당신 이름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과 구마와 기적을행한 예언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가 천명한 하느님의뜻을 실천하지 않았으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신앙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마태 7, 24-27 ; 루가 6, 47-49):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와 루가 복음의 평지 설교는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제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비가내려 큰물이 닥치고 또 바람이 불어 그 집을 들이쳤으나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유대교에서는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 율법 공부와 율법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는 달리 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에서는 산상 설교에 있는 예수의 말씀들을 듣고 행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은 종말의위기에서 구원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멸망하리라는 것이 비유의 골자이다(24, 45-51 : 25, 1-12).(⇦ 진복 팔단 ; → 마태오의 복음서 ; 《예수 어록》)
※ 참고문헌 L. 라가츠, 신요섭 역, 《산상 수훈》,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1994/ G. 로핑크, 정한교 역, 《산상 설교는 누구에게?, 분도출판사, 1990/ 박영식,《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하여》, 바오로딸, 1995/ J. Jeremias, 박상래 역, 《산상 설교》, 분도출판사, 1973/ 정양모, <산상 수훈의 주석사 이야기〉, 《공동선》 15호(1996. 5~6), pp.26~31/ 정 양모, <예수님의 참, 세상의 거짓>, 《성서와 함께》 133호(1987. 4), pp. 13~18/ 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 1985/ 정양모 역주, 《마태오 복음서》, 200주년 신약성서 1,분도출판사, 1990. 〔鄭良謨〕
산상 설교
山上說敎
〔라〕sermo in monte · 〔영〕sermon on the m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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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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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산상 설교를 했던 언덕 위에 세워진 산상 수훈 기념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