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드린

〔그〕Συνέδριον · 〔라〕Synedrium · 〔영〕Sanhed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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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드린 법정에서 대제사장 가야파에게 재판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

산헤드린 법정에서 대제사장 가야파에게 재판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교 최고 의회. 예수를 재판한 곳.산헤드린은 그리스어로 '모임' , '위원회' , '지도 집단'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 갖가지 형태의 회의를 일컫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고대 유대 문헌에이 낱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칠십인역 성서(잠언 11, 13 ;26, 26 : 2마카 14, 5 등)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20~서기 50)의 작품들(De Somniis I, 193 ; De Praemiis 28 ;Legatio Gajum. 213 등)과 요세푸스(38~100)의 작품들(《유대고대사》 16, 361 ; 《유대 전쟁사》 1, 571. 640)에서도 수시로 나타난다.
〔역 사〕 《미쉬나》의 제4부 4편에 따르면 산헤드린은모세를 돕도록 임명된 70인의 장로들로 구성되었던 회의에 그 기원을 둔다(<산헤드린 편> 1, 6 ; 민수 11, 10-24).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산헤드린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언급이고, 실제로는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587~538)이후에 처음으로 산헤드린의 모태가 될 수 있는 종교 지도자 집단이 등장하였으리라는 설이 지배적이다.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3세(기원전 223~187) 때 예루살렘에장로들의 모임인 '게루시아' (γερουσία)가 결성되었는데아마 이것이 '산헤드린'의 구체적인 기원일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사제들과 장로들)의 회의를 처음으로 '산헤드린' 이라고 부르게 된 때는 로마 제국의총독 가비니우스(Gabinius)가 시리아 속주를 다스리던 기원전 57~55년경이었다.
산헤드린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 집단으로 인정을받아 권위를 누렸으나 헤로데 대왕 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헤로데는 젊은 시절에 갈릴래아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산헤드린 법정에 서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왕이되자(기원전 37~4) 산헤드린은 유혈 사태까지 맞으면서박해를 받았고(《유대 고대사》 16, 9) 그 뒤로는 정치권의눈치를 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 체제가 시작된 서기 6년부터 제1차 유대전쟁(66~70)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발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가 산헤드린의 명령을 받아 처단되었던 일을꼽을 수 있다(《유대 고대사》 9, 1). 그러나 유대 전쟁으로예루살렘이 멸망하자 산헤드린의 예루살렘 시대는 끝나고 70년 이후에는 야브네 얌니아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유대교가 재건되었는데, 이런 영향을 반영하듯 산헤드린은 더 이상 사제들과 장로들의 집단이 아니라 오직 율법학자들로만 구성된 모임이 되었다. 이때부터 산헤드린은 단지 모세 오경과 그 해석인 할라카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종교 색 짙은 집단으로 그 성격이 규정되었다.
〔구성 및 권한〕 예루살렘 시대의 산헤드린은 71명의각각 다른 계층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산헤드린의 중심에는 의장이자 회의 소집자인 대제사장이있고, 그 주위로 대사제들(ἀρχιερεῖς)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앉아 있었다(마르 14, 53) 로마 제국의 통치 시기에는 대사제들이 산헤드린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계층이었음이 신약성서에도 잘 드러나 있다. 산헤드린에서는 회의가 있을 때 회원들이 서로 마주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앉았으며, 그들 앞에는 회의의 결정 사항을 기록하는 두 명의 서기가 서 있었다. 이를테면 서기들이 어떤 죄인의 석방에 관한 찬반 투표의 결과를 기록한다는 식이었다(<산헤드린 편> 4, 3). 중대한 기소 사건들인경우에는 규정된 절차를 밟았다(〈산헤드린 편> 4, 1 : 5,5).
《미쉬나》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외에 지방에도 산헤드린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편의상 '작은 산헤드린' 이라고 부른다. 71명으로 구성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말하자면 '큰 산헤드린' 인 셈이다. 작은 산헤드린은 23명으로 구성되며, 120명 이상의 주민이 사는 고장에서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율법학자 예훗(Jehud)에 따르면 주민이 230명은 되어야 작은 산헤드린(소법원)을 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산헤드린 편> 1, 6). 큰 산헤드린과 작은 산헤드린의 관계에 대해서는, 판결에 불복하여 상소할 수 있는 관계 즉 상 · 하급 법정으로서의질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를 수 있는 사안의 범위가 달랐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지파 · 거짓 예언자 · 대제관에 관한 사건은 오직 큰 산헤드린에서만 다룰 수 있었고(〈산해드린편> 1, 5), 모세 오경에 대한 해석에서 의견 대립이 생길때에는 큰 산헤드린이 개입할 수 있었다(〈산헤드린 편>11, 2 ; 《유대 고대사》 IV 8, 14).
산헤드린에서는 전반적인 종교 · 사회 문제를 다루었으며 법원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법정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에 열렸다. 산헤드린에서 취급했던 사안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금전 문제, 절도, 상처, 손실, 변상, 강간, 납치, 처녀성과 관련해 명예 훼손한 경우에는 판사 3명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다루어야 한다(<산헤드린 편> 1, 1). 사형은 작은 산헤드린에서 언도한다(1, 4). 한 지파, 거짓 예언자, 대제관에 관한 사건은 오직 큰 산헤드린에서만 다룬다(1, 5). 주사위 노름꾼, 이자 놀이꾼, 비둘기 사육자, 안식년에 농산물을 파는 사람은 법정의 판관이나 증인이 될 수 없다(3, 3). 사형에는돌로 쳐죽이기, 불태워 죽이기, 목잘라 죽이기, 목 졸라죽이기 등 네 종류가 있다(7, 1). 돌로 쳐죽일 죄인으로는 생모 · 계모 · 며느리 · 남자 · 짐승과 교접한 자, 짐승을 데리고 자는 여자와 교접한 자, 우상 숭배자, 마술사,안식일을 어긴 자, 부모를 모욕한 자, 다른 남자와 정혼한 처녀와 교접한 자 등이다(7, 4). 목 졸라 죽일 죄인으로는 부모를 때린 자, 동족을 노예로 팔려고 납치한 자,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율법학자, 거짓 예언자,우상의 이름으로 예언한 자, 제관의 딸을 고발한 위증자,제관의 딸과 야합한 자 등이다(11, 1). 거짓 예언자란 자신이 듣지도 않은 말, 하느님께서 일러주시지 않은 말을예언인 양 발설하는 자로 그는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예언을 숨기는 자, 예언자의 말을 변질시키는자, 자기 자신의 말을 스스로 어기는 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 시기에는 제국의 권위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산헤드린에서는 큰 문제들을 다루지 않았다고한다. 즉 산헤드린은 유대인에 의해 저질러진 종교적인문제에 국한되어 있었고, 로마 총독은 속주의 질서 유지와 관련된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쉬나가 쓰여지던 때"(200경)는 이스라엘에서 주권을 상실한 까닭에 사형 언도 집행권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였건만 율법학자들은 탁상 공론을 무척 즐겼다. 로마 총독은대제사장을 임명하고 파면시키는 권한을 행사하였는데(《유대 고대사》 XVⅢ, 2. 2), 주로 세력 있는 특정 가문에서뽑혔다.
〔신약성서의 산헤드린〕 신약성서에 '산헤드린' 이라는낱말은 모두 22번 나온다. 공관 복음서에 7번(마태 5, 22; 10, 17 ; 26, 59 : 마르 13, 9 : 14, 55 : 15, 1 : 루가 22,66), 요한 복음서에 1번(11, 47), 사도 행전에 14번(4,15 : 5, 21. 27. 34. 41 : 6, 12. 15 : 22, 30 : 23, 1. 6. 15.20. 28 : 24, 20) 등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나오는 산헤드린 : 공관 복음서에 보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할 때 두 번에 걸쳐 산헤드린을 언급하였다. 첫 번째는 예수가 제자들을 향해 "여러분은 스스로 조심하시오. 사람들이 여러분을 (지방)의회(εἰς συνέδρια)와 회당으로 넘길 것이요. 여러분은매를 맞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나 때문에 총독들과임금들 앞에 서서 그들에게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마르13, 9 ; 루가 21, 12)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종말 심판을예언한 이른바 '묵시록 소품' (마르 13장)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제자들이 장차 받게 될 박해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예수가 아직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말씀이므로 미래를 예견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마르코 복음서가 쓰여지던때, 즉 70년을 전후해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박해받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 말씀에 나오는 산헤드린은 복수형인 것으로 보아 지방에 있던 작은 산헤드린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산헤드린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예수의 말씀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며또 자기 형제더러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최고 의회(τῷ συνέδριῳ)에 넘겨질 것이고···"(마태 5, 22)이다. 이 말씀은 예수의 대립 명제(마태 5, 21-48)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살인하지 말라' 는 계명(5, 21-26)에 언급되어 있
다. 여기서는 단수형으로 쓰였으므로 예루살렘의 큰 산헤드린을 가리킨다. 하지만 형제를 두고 '바보' 라 불렀다고 해서 산헤드린에 고발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가벼운 욕설에도 형제를 증오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며, 결국 과장이 담긴 표현이다.
예수를 재판한 산헤드린 : 그리스도인들에게 산헤드린은 예수를 재판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 의 복음을 선포하고 다닐 때부터 그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고,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마르 2, 1-12. 23-28 : 7, 1-15 : 3, 6). 그러나 예수가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자 그들은 예수를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말하자면 제도권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느꼈던 위기의식이 예수를 산헤드린에 넘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것이다(마르 11-12장 ; 14, 1-2). 그들의 계획은 예수를먼저 산헤드린에 데리고 가서 메시아라는 가면을 벗겨낸 다음, 당시의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넘겨 사형을 언도하게 하는 것이었다(요한 18, 32). 왜냐하면 당시의 산헤드린에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체포되어 대사제의 집에서 개최된 산헤드린 법정에 세워지자 우선 증인들이 나와 예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만든 후 예수 자신의 입에서 스스로 '사람의아들' 이라는 말이 나오게 유도하였다(마르 14, 62).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파가 자신의옷을 찢음으로써 예수의 혐의를 신성 모독죄로 확정 지었다. 유대인이 옷을 찢는 것은 지독한 슬픔이나 하느님 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을 경우였다(마르 14, 53-65 ; 마태26, 57-68 : 루가 22, 54-55. 63-71 ; 요한 18, 12-14. 19-24). 가야파의 경우는 물론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보도된 '산헤드린의 재판' 이야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산헤드린에서는 중요한사안일 경우 주로 낮에 다루었는데(<산헤드린 편> 4, 1), 예수는 밤에 재판을 받았다. 둘째, 명절 때는 관례적으로 재판을 하지 않았으며, 사형선고일과 집행일은 통상적으로 다른날이었다(<산헤드린 편> 4, 1). 그런데유독 예수만은 이스라엘의 최고 명절인 과월절에 체포되어 당일 산헤드린의 재판을 거쳐 빌라도에 넘겨져 사형 언도를 받은 후 즉시 사형에 처해졌다. 이례적으로 체포에서사형까지 하루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 정규 재판 장소인 산헤드린 법정 건물이 아니라 대사제의 집에서 법정이 열렸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산헤드린 재판' 이야기에는 상당한 역사성도 들어 있는데,우선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적으로 예수에 대해 가졌던 위기 의식이 그의 사형에 주된 동기였음은분명하다. 사실 사도 행전 5장 35-39절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예수 같은 재야의 종교 지도자가 나타나 세력을 구축할라치면그를 제거해 세력을 궤멸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는 반드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예수 역시 산헤드린에 세워졌다는 점이나, 산헤드린에는 사형권이 없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는 보도 역시 당시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내용이다.
사도 행전의 산헤드린 : 산헤드린은 사도 행전에 가장많이 언급되어 있다. 산헤드린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두 번이나 베드로를비롯한 사도들을 불러 법정에 세웠다(사도 4, 1-22 ; 5,17-42). 그리고 매질과 더불어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발설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4, 18 : 5, 40)는 경고를 하고 풀어 주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예루살렘 모교회가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4, 23-37 : 5, 41-42). 하지만 부제였던 스테파노를산헤드린 법정에 세번째로 세웠을 때에는 결국 그를 돌로 쳐죽이는 형벌을내렸다(6, 8-7, 60). 그 후로 예루살렘 모 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받아 그리스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오직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게 되었으며(8, 1-2), 특히 그리스-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그 본거지를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옮겼다(11, 19-30).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제3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렀다가성전에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에 넘겨졌다(23, 1 이하). 사도 행전에 등장하는 '산헤드린' 은 한결같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집단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사도 행전이 쓰여지던 시기인 80~90년경에 유대교로부터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는 보도들이다.(→ 원로 ; 의회 ; → 유대교 ; 회당)
※ 참고문헌  《TDNT》 7, pp. 860~871/ H. Dandy trans. by, TheMishmah, Oxford, 1984/ A.J. Saldarini, 《ABD》5, pp. 975~980/ 《기 독교 대백과 사전》 8, 기독교문사, 1983, pp. 746~753/G. Strecker, Theologie desNeuen Testaments, Berlin, New York, 1996/ 정양모 역주, 《마르코 복음 서》, 200주년 기념 성서 1, 분도출판사, 1981/ 정 양모, <유대 교와 기독교>, 《종교 신학 연구》 7집, 서강대학교 종교 신학 연구소, 1994, pp.143~178/ J.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 I~Ⅲ, EKK 2-1~2,Benziger, Neukirchen, 1978~1979. [朴泰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