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립

〔히〕סַנְחֵרִיב · 〔라 · 영〕Sennache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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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시리아 제국의 왕이었던 산헤립(왼쪽)과 그의 연대기를 기록한 각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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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시리아 제국의 왕이었던 산헤립(왼쪽)과 그의 연대기를 기록한 각기둥.

신(新)아시리아 제국의 왕(기원전 705~681). 산헤립은유대 왕국의 히즈키야 왕(기원전 727~698) 때 유대 땅을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으나 기적이 일어나 많은아시리아 군인이 죽고 남은 군대는 그들의 수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관련된 인물인데(2열왕 18, 13-19, 37 ;이사 36-37장 ; 2역대 32, 1-23), 그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히즈키야가 이집트와 연합 전선을펴고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대 근동을 제압하고 있던 아시리아 제국에 변방 국가의 왕인히즈키야가 반격할 수 있었던 배후는 아시리아의 숙적인바빌론의 왕 메로다크 발라단(Merodach-Baladan)의 외교전술이 큰 성과를 거둔 것에 있었다.
왕위 계승과 바빌론 함락 : 왕위를 찬탈한 산헤립의 아버지 사르곤 2세(기원전 722~705)는 아시리아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원정 길에 올라 서쪽으로는 팔레스티나를거쳐 이집트 인근 지역까지 침공하고 공물을 받아 갔는데, 구약성서에는 사르곤이 그의 장군을 아스돗으로 보내 그곳을 정복하였다고 전하면서 사르곤이라는 이름을한 번 언급하였다(이사 20, 1). 그 당시의 원정은 아시리
아의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스돗 외에도 다른두 도시를 함락한 사르곤은 주민들을 아시리아로 이주시키고 그곳에 동쪽의 민족을 이주시켰는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아시리아로 유배 간 것이 아마도 이때일것이고 사마리아에 이민족이 대거 이주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사르곤 2세는 바빌론으로 침입하여 당시의 왕메로다크 발라단을 유프라테스 강 하류 삼각주까지 몰아내고 바빌론의 연합군을 격퇴하였으며, 기원전 710년에는 바빌론의 왕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사르곤이 북쪽전선에서 전사하자 왕권은 셋째 아들인 산헤립에게 넘겨졌으며, 이러한 혼란기에 바빌론의 왕 메로다크 발라단은 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유대의 왕 히즈키야에게 사절단을 보내 위로의 편지와 예물을 보냈다(2열왕 20, 12-19). 아시리아가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면, 아시리아 군대는 팔레스티나쪽으로 원정을 가게 될 것이고 그 틈에 아시리아의 수도를 침공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산헤립은 왕위에 오른 후 곧 남쪽으로 진군하여 메로다크 발라단의 연합군인 엘람Elam)군을 격퇴했고, 메로다크 발라단은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연못 숲으로 도망갔으며 바빌론 왕궁은 약탈되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산헤립의 문헌에 의하면, 75개의 바빌론 제국의 성곽 도시와 420개의 작은 마을을 함락시키고 20만 8,000명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산헤립은 아시리아의 고관들을 바빌론 제국 도시의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히즈키야의 항쟁은 이보다 2년 후인 기원전 701년에 일어났지만 이미 메로다크 발라단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아시리아 군대의 압력으로 메로다크 발라단은 기원전 700년에 가족들은 버린 채 오직 조상의 유골과 수호신 상들을 가지고 배를 타고 도망갔다.
유대 왕국 침공 : 산헤립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로 원정을 떠나 유대 왕국의 영토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공물을 받아 갔다. 열왕기 하 18장 13절부터 19장 37절에 의하면 히즈키야는 이집트와 공동 전선을 폈으며, 산헤립이 라기스를 포위하자 히즈키야는 산헤립에게 많은 예물을 받쳐 아시리아의 침공을 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산헤립은 자신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내
포위하게 하였고, 산헤립의 시종 장관은 포위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히즈키야와 그의 연합군인 이집트의 구원을 믿지 말고 아시리아에 투항하라고 종용하였다. 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다른 도시들이 이미 아시리아의 위력에 버티지 못하고 굴복하였으니 이집트 군대는 한줌의힘도 되지 못한다고 역설하였다. 리브나를 포위하고 있던 산헤립에게 시종 장관이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상황을보고할 때에는 에티오피아 군대가 아시리아 군대에 대항하여 진격하고 있을 때였다. 산헤립은 시종 장관을 히즈키야에게 다시 보내 투항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히즈키야는 예언자 이사야에게 그에 대한 대답을 물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투항하지 말 것이며 아시리아 군대는 스스로 퇴진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그날 밤 하느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군대에 내려와 18만 5,000명을 죽였고,산헤립은 다음날 니느웨(Nineveh)로 돌아갔다.
아시리아의 실록 가운데 산헤립 왕 부분에 의하면, 산헤립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로 원정을 간 것은 기원전701년에 있은 세 번째 원정 길이었다고 한다. 즉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을 때였다. 산헤립이 시돈과 아슈켈론(Ashkelon) 등을 무력으로 함락하자 많은 소도시들은 항쟁 없이 그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자신들의 왕인 아시리아 집정관을 예루살렘의 히즈키야에게포로로 보낸 에크론(Ekron)의 주민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 도움을 청하였고, 그들은 에크론에서 연합하여 아시리아와 전투를 벌였다. 산헤립의실록에는 이 전쟁에서 아시리아가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집정관인 에크론의 왕을 풀어 주었으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주변의 많은소도시들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시리아의 실록에는 예루살렘의 포위 이후의 사건에 대해 기록되어있지 않고 다만 히즈키야가 많은 예물과 공물을 니느웨에 있는 산헤립에게 바쳤다고만 되어 있다. 산헤립의 팔레스티나 원정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는 현재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라기스 함락을 조각한 부조품이 있다.
산헤립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바빌론의 실록에는 기원전 681년에 자신의 아들 중 하나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열왕기 하 19장 37절에 보면, 산헤립이 니스록(Nisroch)의 신전에서 예배하고있을 때 그의 아들 아드라멜렉(Adrammelelect)과 사레셀(Sharezer)이 그를 암살하고는 아라랏(Ararat) 지방으로 도망쳤고, 그의 아들 에사르하돈(Esarhaddon, 기원전 680~669)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 사르곤 ; 아시리아)
※ 참고문헌  M. Cogan · H. Tadmor, 2 Kings, 《AB》. 〔曺哲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