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대구시 중구 삼덕동 1가 64-2소재. 1933년 10월 18일에 일본인 신자들의 사목을 위하여 삼립정(三笠町) 본당으로 설립되었다가, 광복 후지역 주민들을 위한 본당으로 전환되면서 삼덕동 본당으로 바뀌었다.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 관할 구역은 삼덕동 1 · 2가, 동인동 1 · 2가, 공평동, 동문동, 동성로,문화동, 봉산동, 사일동, 완전동 일대. 〔교 세〕 1954년2,450명, 1965년 6,473명, 1973년 7,609명, 1980년8,068명, 1986년 8,685명, 1991년 9,129명, 1996년7,880명. 〔역대 신부〕 초대 앙상(H. Anchen) 힐라리오(1933. 10~1945. 12), 2대 신순균(申順均) 바오로(1945. 12~1948. 4), 3대 유흥모(柳興模) 안드레아(1948. 6~11), 4대전석재(全碩在) 이냐시오(1948. 11~1949. 8), 5대 박상태(朴相泰) 루도비코(1949. 8~1955. 5), 6대 이철희(李哲熙)바오로(1955. 5~9) , 7대 신상도(辛尙道) 프란치스코(1955. 9~1959. 10), 8대 이명우(李明雨) 야고보(1959. 10~1961. 12), 9대 김영옥(金榮玉) 요한(1962. 1~1967. 12), 10대 강찬형(姜贊亨) 파스칼(1967. 12~1972. 10),11대 이종흥(李鍾興) 그리산도(1972. 10~1973. 10), 12대 박병원(朴炳元) 필립보(1973. 10~1978. 7), 13대 김영옥(1978. 7~1984. 1), 14대 정재완(鄭在皖) 니콜라오(1984. 1~1988.6),15대 이판석(李判石) 요셉(1988. 6~1992. 7), 16대 최봉도(崔奉道)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992. 7~1997. 9), 17대허연구(許淵九) 모이세(1997.9~현재).
〔삼립정 본당의 설립〕 1910년 한일합병이 되면서 일본인 신자들이 대구 대목구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자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는 22년 간 일본 나가사키(長崎) 교구와 도쿄(東京) 교구에서 사목한경험이 있는 페량F.Ferrand, 夫) 신부를 초청하여 일본인전담 사제로 임명하였다. 우선 부산 대청동에 거처를 정 한 페랑 신부는 1913년 봄부터 각지를 순회하면서 사목하였고, 현재의 대청동 2가 15번지의 부지 136평을 매입하여 1914년 6월 18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이어 페랑 신부는 1916년 2월 21일 대구에도 일본인 신자들을위한 집회소를 마련하기로 결정하고, 그 해 3월 5일 대구(현 桂山洞) 본당 인근에 목조 가옥을 신축하여 일본인전교 회장의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1920년에 부산 대청동의 건물과 대지를 매각하고 부민동(富民洞)에새 집회소를 마련하여 전교 회장에게 맡긴 뒤, 4월 30일거처를 대구로 이전하였다. 그러다가 페랑 신부가 1930년 10월 5일 사망하자 이듬해 3월 3일 하코다테(函館)교구에서 28년 간 사목한 앙상 신부가 그 후임으로 임명
되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대구 대목구에서는 일본인 본당을설립한다는 계획 아래 1932년경 삼립정 64번지에 500평의 부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성당 신축 공사를 위임받은 앙상 신부는 1933년 6월 11일에 이를 완공했으며,그 해 10월 18일자로 삼립정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삼립정 본당은 8 · 15광복이 될 때까지 일본인들의 사목 중심지가 되었다.
〔성장과 변모〕 광복이 되면서 삼립정 본당의 명칭은'삼덕동 본당' 으로 변경되었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지역민들을 위한 본당으로 전환되어 1945년 12월 15일에 첫 한국인 사제로 신순균 신부가 부임하였다.그러나 신순균 신부는 부임 2년 6개월여 만인 1948년 4월 10일 병사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온 3대 주임 유흥모신부 역시 7개월 만인 같은 해 11월 18일 사망함에 따라 그 해 11월 전석재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본당에서는 1952년 4월 7일 '삼덕유치원' 을 개원 데이어 소피아회(고등학생회)를 설립했으며, 1956년에는 성체회(중학생회), 1959년에는 소화 클럽(대학생회)을 조직했다. 뿐만 아니라 1960년 11월 19일에는 건평 328평의 삼덕 가톨릭 문화관을 완공함으로써 지성인 모임, 가톨릭 학생 연합, J.O.C 등에 문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 후 9대 주임 김영옥 신부는 본당 신자수가 증가하자 1963년 5월 31일 성당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12월 25일 연건평 1,00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으며1965년 10월에는 성당 내에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였다.또 김영옥 신부는 1978년에 다시 13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자 전 신자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1980년 6월에는 시장 교리반을 개설하는 등 지역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전교 활동은 1988년 6월 이판석 신부가 15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이판석 신부는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소책자를 발행하고 1990년 4월 15일 부활 대축일을 기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가두 교를 시 작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전국은 물론 해외 한인교회들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와 같이 본당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성장해 오면서1951년에 범어동 본당을 분리한 것을 비롯하여 1955년에 대봉동 본당, 1964년에 수성동 본당, 1965년에 대안동 본당, 1970년에 신천동 본당, 1973년에 동인동 본당, 1983년에 옥산 본당 등 모두 7개의 자 본당을 갖게되었다. 또 박춘택(朴春澤, 베드로) 신부와 이길준(李吉俊, 바오로) 신부를 비롯하여 20여 명의 사제들을 배출하는 등 사제 성소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본당 주변이 도심 상업 지구로 변모하면서 공동화 현상이 초래되고 있으며, 아울러 관할 주민수가 감소함에 따라 도심 속의 특수 사지로 그 능을 전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譯註,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삼덕 성당 60》, 천주교 삼덕 교회,1993/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百年史(1886- 1986)》,계산 본당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위원회, 1986/ 《教區總覽》 천주교 대구대교구, 1980/ 《빛》 138호(1994. 10), pp. 96~99/ 《가톨릭 研究》3권 7호(1936. 7). 〔金成喜〕
삼덕동 본당
三德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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