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소속 본당.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외송동416 소재. 1930년에 권영조 신부가 명례(明禮) 본당을삼랑진으로 이전함으로써 본당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이후 밀양(密陽)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가 1957년 3월에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관할 구역은 삼랑진읍 우곡리, 율동리, 행곡리, 안태리,검세리, 송지리, 미전리, 삼랑리 전 지역과 김해군 생림면 도요리 양지 마을(루가원). 〔교 세〕 설정 당시 900명, ,1963년 716명, 1971년 614명, 1977년 652명, 1982년 788명, 1987년 876명, 1991년 1,116명, 1996년1,181명. 〔역대 신부〕 초대 권영조(權永兆) 마르코(1930. 1~12), 2대 민정호(閔正鎬) 마르코(1930. 12~1931.5), 3대 파르트네(M. Parthenay, 朴德老) 테오필로(1931.5~1935. 6), 4대 페네(C. Peynet, 裴嘉祿) 가롤로(1935.6~1938. 6), 5대 유흥모(柳興模) 안드레아(1938. 6~1940.6), 삼랑진 공소 시기(1940. 6~1957. 3), 6대 유선이(柳善伊) 요셉(1957. 3~1958. 12), 공소 시기(1958. 12~1962. 7),7대 정수길(鄭水吉) 요셉(1962. 7~1965. 12), 8대 한영일(韓永日) 니콜라오(1965. 12~1970. 7), 임시 장병룡(張丙龍) 요한(1970. 7~1971.2), 9대 이상호(李尙護) 라이문도(1971. 5~7), 10대 정행만(鄭行萬) 프란치스코(1971.7~10), 11대 안달원(安達遠) 베드로(1971. 10~1972. 1),12대 이돈우(李敦雨) 레오(1972. 1~11), 13대 귈레르모(S.J. Guillermo, 徐再善) 요셉(1972. 11~1973. 11), 14대 손덕만(孫德萬) 토마스(1973. 11~1976. 11), 15대 양덕배(梁德培) 요한(1976. 1~1978.6), 16대 송기인(宋基寅) 베드로(1978. 6~1983. 2), 17대 장병보(張昞普) 야고보(1983.
2~7), 18대 허성(許城) 야고보(1983. 7~1984. 2), 19대 장병룡(1984. 2~1986. 2), 20대 정영한(鄭永漢) 루도비코(1986. 2~1988. 2), 21대 박유식(朴裕植) 안드레아(1988. 2~1990. 2), 22대 김계춘(金啓春) 도미니코(1990. 2~1992.2) , 23대 이시찬(李時贊) 다니엘(1992. 2~1996. 8), , 24대염봉덕(廉鳳德) 프란치스코(1996. 8~1998. 2) 25대 김용환(金容煥) 요한(1998. 2~현재).
〔공소와 본당 설립〕 밀양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인 김범우(金範禹, 토마스)가1785년에 경상도 밀양의 단장(丹場, 단장면 법귀리)으 유배된 후 배소 일대에 신앙을 전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천주교 신자가 몇 명이나 탄생하였는지 ,그리고 그 신앙이 후대까지 이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없다. 기록에 보면 이후 박해가 계속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이곳 산간 지대로 피신해 오게 되었고, 그중 양산읍의호계리(범실)를 비롯하여 밀양군의 부북면 · 무안면 · 상 남면 · 동면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1850년대에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그 후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와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이들 교우촌을 순방하였으며, 이어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한편 이 무렵에 김사범이 가족과 함께 밀양군 상웁실(현 삼랑진읍 우곡리)에 정착하여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인근 하읍실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박 후인 1888년에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 의하여 명례 공소(하남읍 명례리, 현 마산교구 지역)가 설정되었고,1892년에는 부산의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에 의해읍실 공소(삼랑진읍 우곡리)가 설립되었다. 이들 공소는1898년 1월경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 신부가 명례에 정착하여 임시 본당을 설립하면서 여기에 속하였다가1903년 9월 19일 강성삼 신부가 사망한 뒤 마산(馬山,현 완월동)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이후 명례 본당이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공소로 격하된 지 23년 만이었다. 즉 1926년 5월 30일에 권영조 신부가 밀양 지역의 신앙 중심지인 이곳으로 부임함로써마침내 정식 본당으로 승격된 것이다. 그러나 명례는 교통이 불편하였므로 권영조 신부는 얼마 안되어 교통의중심지이며 신자수가 많은 삼랑진으로 본당을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1928년에 읍실 공소에 임시 성당을 마련하였으며, 이듬해 5월 22일에는 우곡리에 1,500여 평의부지를 매입하여 성당 · 사제관 · 청년 회관 신축 공사에착공하였다. 그런 다음 1930년 1월 1일자로 우곡리로이전함으로써 '삼랑진 본당' 이 설립되었는데, 설립 당시신자수는 약 900명이었다.
〔변모와 성장〕 그러나 권영조 신부가 그 해 12월 전북연장리(延章里)의 한들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우곡리의성당 공사는 중지되고 말았다. 한편 1931년 5월에 부임한 3대 주임 파르트네 신부는 1935년 봄에 현 본당 소재지인 송지리(松旨里)에 새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 공사는 페네 신부 4대 주임으로 부임한 후에 완공되어 그 해 11월 3일 성당 봉헌식과 사제 및 청년 회관의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삼랑진 본당 신자수는 28개 공소 신자를 포함하여 약1,200명이었다. 1938년에 페네 신부는·휴양차 마산(현완월동) 본당으로 가서 베르몽Bermond, 睦世榮) 신부와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유흥모 신부가 부임하여 약 2년 동안 삼랑진에서 거처하였는데, 1939년에유흥모 신부는 교구의 지시에 따라 밀양읍 내이동(內二洞) 721번지의 부지 700평을 매입한 뒤 이듬해 6월 29일 그곳에 성당 겸 사제관을 신축하고 본당을 이전하였다. 이로써 삼랑진 본당은 '밀양 본당' 소속 공소로 격하되었고, 성당 부지와 건물은 교구에서 매도하였다. 이때부터 신자들은 공소 강당도 없이 개인 집에서 공소를 치러야만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삼랑진 공소 신자들은 본당승격 운동을 추진하였지만 소속만 밀양 본당에서 진영(進永)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1951년에는 '성당건축 기성회' 를 조직하고 이듬해에는 현 삼랑진 읍사무소 옆에 초가 두 채를 매입하여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기시작하였다. 1953년에 삼랑진 공소가 다시 밀양 본당소속으로 환원되자 신자들은 교구에 계속 본당 승격을탄원하는 한편, 1956년에는 성당 건립 계획의 일환으로읍내 중심가에 부지(500평)와 건물(150평)을 매입하였다. 그 결과 1957년 2월에 마침내 유선이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삼랑진 본당' 으로 부활하였으나 이듬해 12월5일에 유선이 신부가 사망하면서 다시 밀양 본당 공소로되었다가 1962년 7월에 정수길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부활되었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본당에 부임한 정수길신부는 본당 정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1962년 9월 26일에는 김해군 생림면 도요리(都要里)에 음성 나환우 정착촌인 '루가원' 을 개원하였고, 그 해 12월 18일에는 본당에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하였다. 8대 주임 한영일 신부 때인 1967년 4월에는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분원이 개설되었으며, 1968년 8월에는 약 200평의 성당을 신축 완공하고 이듬해 3월 봉헌식을 거행하였다.13대 주임 귈레르모 신부는 1973년 3월 1일에 소화유치원을 개원하였는데, 이 유치원은 이후 약 8년 동안 운영되다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1981년에 폐원하였다. 1970년부터 3년 동안 본당 신자들은 사목자의 잦은교체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오다가 1973년에 손덕만 신부가 14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있었다.
한편 1983년 10월 14일에는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을 돕던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가 철수하고 미리내 성모성심 수도회 분원이 개설되었다. 이어 19대 주임 장병룡신부는 1985년 8월 13일에 성모 동굴을 건립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성당 제대 벽 개조 공사를, 9월에는 성당과 수녀원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21대 주임 박유식신부는 1988년 5월 6일 사제관과 교육관 건립 기공식을고 그 해 10월 4일 이를 완공하여 축복식을 가졌으며,1989년 1월에는 성당 3층에 성체 조배실을 마련하였다.그리고 1990년 10월 28일에는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이처럼 삼랑진 본당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 지역에위치하고 있어 신자수 증가율이 아주 낮은 편이다. 뿐만아니라 노년층이 대부분이어서 본당 운영에 어려움이 많아 본당에서는 반 모임을 통한 노년층과 장년층의 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부산교구 ; 밀양 본당 ; 권영조)
※ 참고문헌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부산교구 주교관,1967/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教區年報》, 천주교 부산교구,1984/ 대구대교구사 편찬위 원회 편, 《대구 본당 백 년사(1886~1986)》, 계산 본당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위원회, 1986/ 부산교구사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천주교 부산교구, <가톨릭 부산> 1389호(1998. 5. 10).〔李裕林〕
삼랑진 본당
三浪津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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