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京鄉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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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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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호.

① 1906년 10월 19일 한국 천주교회에서 창간한 시사 주간지. '경향' (京鄉, Urbi et Orbi)이란 제호는 서울 사람뿐 아니라 시골 사람도 이 신문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은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이고, 발행소는 종현 성당(鐘峴聖堂) 타블로이드판 4면에 국판 8면의 〈보감〉(寶鑑)을 부록으로하여 모두 12면으로 간행되었다. 신문의 창간 목적은 참된 개화의 방향을 제시해 줌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에서 요청되고 있는 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에 동참하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 지식과 시사 문제를 제공해주려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편집에 있어서는 우선 정교 분리(政敎分離)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정치 불간섭주의를 표방하고, 국민에게 유익한 내용을 선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순 한글 표기를 채택하였다. 그 결과 이 신문은 발간 즉시 교회 내외에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여 1907년에는 정기 구독자가 4,200여 명에 달하였다. 창간 당시부터 이 신문의 편집 실무를 담당한 사람은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그리고 이건수가 그와 함께 기자로 활동하였고, 법률과 외국어에 밝은 강화석(姜華錫) · 김조현(金祚鉉) 등이 편집에 협력하였으며, 각처의 신부들이 지방 소식을 전해 주는 동시에 그 보급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음으로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신문에서는 시사 문제에 관한 논설, 국내외 소식, 문예 작품, 계몽적인 기획물 등 시사성을 띤 내용이나 생활에 필요한 상식 등을 게재함으로써 창간 목적을 충실히 실행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그 부록으로 발행된 <보감>에서는 교리 문제, 천주교 회사, 법률 해설 등 오랫동안 보존할 필요성이 있는 내용들을 수록하였다. 그중 신문의 논설란에서는 개화 · 교육 · 법률 · 의병 · 행정 · 종교 등을 다각도로 다루었는데, 이들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의병 봉기나 일본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은 현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머무르게 되었지만, 시대적 상황 아래서 때때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거나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현실 정치나 사회 문제를 전혀 등한시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신문지법(新聞之法)을 제정 공포하여 언론 탄압을 가한 이후에도 <경향신문>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드망즈 신부의 치외법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소용이 없게 되었고, 순전히 종교적인 신문의 발행만을 강요하는 총독부의 압제로 인해 1910년 12월 30일, 제220호를 끝으로 폐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부록 <보감>을 격주간 종교 잡지인 《경향잡지》 (京鄕雜誌)로 변경하여 계속 발행하였다. (→ 《경향잡지》)
※ 참고문헌  趙珖, 〈京鄉新聞의 창간 경위와 그 의의>, 《京鄉新 聞)영인본), 弗咸文化社, 1978/ 崔鍾庫, 〈韓末 京鄉新聞의 法律啓蒙 運動〉, 《韓國史研究》 제26집, 1979/ 崔起榮, 〈舊韓末 京鄉新聞에 관 한 -研究>, 《韓國教會史論文集》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② 1946년 10월 6일 서울교구에서 창간한 일간지. 창간 당시의 사장은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부사장은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 편집 국장은 정지용(鄭芝溶)이었고, 발행소는 서울 소공동의 경향신문사였다. 이 신문은 1910년에 폐간된 <경향신문>과 제호의 이름만 같을 뿐 그 체제나 성격은 전혀 달랐다. 당시 서울교구에서 이를 창간하게 된 목적은 해방 이후의 사회 혼란 속에서 천주교회가 언론 활동을 통해 국민 정신의 계몽에 앞장선다는 데 있었다. 이에 창간 때부터 사시(社是)를 시시비비(是是非非)로 정하고 보도에 공정성을 지키려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반대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러 독자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게 되었다. 한편 신문사 건물은 위조 지폐 사건으로 유명한 정판사(精版社) 건물을 인수하여 개조한 것이었는데, 6 · 25 동란으로 사옥이 전소되면서 자연 발간이 중단되었다. 그 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에 이를 재건하고 신문을 복간하는 동시에 1954년에는 새로운 윤전기와 인쇄기를 도입하여 같은 해 12월 한국 최초로 신문 축쇄판을 인쇄하였다. 그러나 1957년 1월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 이라는 사설을 비롯하여 자유당(自由黨) 정권에 대해 비판 기사를 게재한 것이 빌미가 되어 같은 해 4월 폐간되었다가 1960년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면서 4월 23일자로 재차 복간되었고, 1963년 5월 천주교 재단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朴濤遠, 《盧基南大主敎》, 한국교회 사연구소, 1985.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