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성서적 근거
Ⅱ. 동등성과 구별
Ⅲ. 세 위격 안에 있는 한 본체
Ⅳ.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와 내재적 삼위 일체
Ⅴ.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관계
Ⅵ. 사랑의 사귐
Ⅶ. 하느님의 생명과 인간의 구원
성부 · 성자 · 성령 삼위(三位)가 한 분〔一體) 하느님임을 가리키는 용어.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하느님을 표현하는 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된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인간을 자신과의 친교로 부르는 성서의 한 분 하느님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삼위 일체는 세 위격(位格, persona)이 완전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한 신성(神性)을 이룬다는 뜻이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덕분에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근본진리를 요약한 개념이다. 또 삼위 일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의 중심이 되는 신비이며, 하느님 자신의 내면 진리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 진리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들을 밝혀 주는 기본 진리이다.
I . 성서적 근거
삼위 일체 교리 자체는 성서 어느 곳에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근본 요소는 성서 안에 함축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활력과 충만한 생명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내면성과 아울러 인간에게 베풀어진 선물로서 하느님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자기 표현을 가리키기 위하여 하느님의 '영' 에 관해 진술한다(에제 34, 27). 한편 성서는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말씀 · 영 · 지혜 · 현존 등의 개념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인격체로 묘사하고 있다.
'말씀' 이 나자렛 예수 안에서 '살' 이 되고(요한 1, 14) 또 부활하여 현양된 주님으로서 성령을 보낸다고 선언하는 신약성서에서 삼위 일체가 실제로 계시되지만, 성서는 삼위 일체론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성서는 예수의 삶과 행위,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한 성령 파견을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고 단언하였다. 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아버지' 라 부르고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불린다(통틀어 170번인데 마르코 복음서에 4번, 루가 복음서에 15번, 마태오 복음서에 42번, 요한 복음서에 109번 나타난다). '아빠' 라는 칭호는 성서에 3번(마르 14, 36 ; 로마 8, 15 : 갈라 4, 6) 사용되었는데, 예수는 하느님을 당시 유대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칭호로 직접 불렀던 것이다. 이 호칭은 예수와 하느님이 아주 친밀한 부자(父子) 관계임을 나타낸다. 반면 신약성서는 예수가 아버지와 하나이고 동시에 아버지와 구분된다고 천명하였다(요한 10, 30 ; 14, 9). 예수는 아버지 자신은 아니지만 자성(子性)을 포함하여 자신 전부를 아버지로부터 받았는데, 하느님의 내적 생명을 반영시킨 이 부자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를 시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필립 2, 6)이었으므로 강생 이전에 이미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 존재하였다. 그리스도는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하느님과 더불어 세계를 창조하였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생겨난 것치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 3). 여러 성서 구절이 하느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가 동등하고 하나 됨을 단언하였다(요한 1, 10 ; 골로 1, 15 이하 ; 히브 1, 2).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 역시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양을 통하여 하느님의 부자 관계에 동참하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요한 7, 37-39 ; 14, 1-16, 15). 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세상에 주는 선물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이 보내는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선물이다. 영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듯이 아들로부터도 나온다. 그래서 영은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옆구리에서 나오는 생명수이다(요한 19, 34 ; 7, 37 이하). 영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하느님의 생명 자체이다. 영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지만 둘과 구분된다. 영은 아들에 의해 파견되었고 아들의 영(요한 15, 16 ; 갈라 4, 6)으로 역할을 맡지만 아들에 종속되어 있지는 않다. 예수는 영에 의해 잉태 되었고 메시아로 도유되어 세상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영과 아들은 서로를 파견하고 서로에 의해 파견되었다. 영과 아들은 근본적으로 대칭 위치에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어 구원 사업을 성취하게 한 후 성령을 파견하여 그 사업을 완성하게 하였음을 깨달은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대하여 같은 하느님 신앙을 고백하였다. 아버지 · 아들 · 영을 나란히 호칭하는 신약성서의 표현들은 이러한 신앙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여러분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씻겨지고 거룩하여졌으며 의롭게 되었습니다"(1고린 6, 11 ; 2고린 13, 13). 교회는 아버지 · 아들 · 영이 서로 구별됨을 인식하고 고찰하기 전에 먼저 단일성 안에서 동등함을 깨닫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II . 동등성과 구별
[단일성] 아버지와 아들은 영으로서 동등하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요한 4, 24), "주님은 영이십니다" (2고린 3, 17). 여기서 영은 하느님의 본질이고 능력이므로 하느님이 영을 통하여 현존하고 활동함을 뜻한다. 영으로서의 하느님 능력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서 명백히 드러났으며, 또 하느님의 능력은 영에 의하여 강하게 체험된다. 하느님은 볼 수 없고 불사불멸하며 자유로우므로 영이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도 모두 영이다. 셋이 똑같이 거룩하고 살아 있으며 영원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영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고 활동한다. 영은 신약성서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나란히 등장한다.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2고린 13, 13). 유일성 안에서 셋은 동등하다. "영도 하나입니다. · · 주님도 한 분,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시니"(페 4, 4-6). 성령과 아들의 동등성도 뚜렷하다.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갔다. 그리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사도 9, 31), "주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그리고 영의 사랑에 힘입어"(로마 15, 30).
아버지와 아들에게 부여되는 수식어들이 영에게도 적용되어 영도 신성을 지닌 분으로 묘사된다. "거룩하신영"이라는 표현이 신약성서에서 89번 언급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사 41, 16-20)을 연상시킨다. "거룩하신 분"이란 명칭은 아버지(요한 17, 11 ; 묵시 6, 10)와 아들(마르 1, 24 : 요한 6, 69)에게 부여되는데 영 역시 그분들과 마찬가지로 거룩하다. 하느님 이름이 아버지에게, 주님 칭호가 아들에게 붙여진 것처럼 '거룩한' 이라는 수식어가 영에게 부여되어 있다. '영광' , '살아 계신' (생명), '영원한' 등의 수식어는 하느님에게만 유보된 표현들로 영에게도 부여된다. "영광의 영 곧 하느님의 영"(1베드 4, 14). 살아 있는 하느님과 "생명의 빵" , "살아 있는 분" (요한 6, 35 : 6, 57)인 그리스도처럼 영도 "생명의 물" (요한 7, 38)로서 살아 있다. 영은 하느님의 고유한 일 곧 생명을 주는 일을 맡는다(2고린 3, 6 ; 로마 4, 17). 은총과 진리도 하느님에게만 속해 있는 실재들로서 영에게도 속한다. 영은 은총과 진리의 성령이다. 영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느님에게 속한 속성(거룩함, 영광, 생명, 진리, 은총, 영원)을 공유하는 분으로 그분들에 의해 세상에 파견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나란히 등장하는 표현들이 신약성서에서 간혹 발견되는데, '세례 명령' 이 그 대표적 예이다.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오"(마태 28, 19). 이 명령은 인간이 세례 때에 동참하게 되는 전체 구원 사건을 요약한 표현으로, 구원 사건을 삼위 일체적 구조 안에서 제시한다. 그리스도인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는 사건이고 또 그래서 삼위 일체 고백의 발판이 된다. 교회는 우리가 아버지, 아들, 영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고 또 성삼위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함을 신앙으로 고백하였다. 세례받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게 바쳐지고 결합된다. 세례로써 아버지는 사람을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고(골로 1, 13) 또 영으로 인해 새로 태어나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한다.
성서는 서로 다른 칭호들을 세 분에게 부여하여, 구별되면서 한 분인 하느님을 표현하였다. '하느님' 과 '아버지' 는 첫째 분에게, '아들' 과 '주님' 은 둘째 분에게, 거룩한' 과 '영' 은 셋째 분에게 각기 붙여 주었다. 반면 성서 저자들은 가끔 세 분의 고유한 역할 또는 특징들을 통하여 세 분의 구별과 관계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바오로는 '행위-봉사-선물' 또는 '사랑-은총-친교' 로써 '하느님-주님-성령' 의 상호 관계를 표현한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미리 아시고 (정하신) 대로, 영의 성화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1베드 1, 2).
〔구 별〕 세 분이 동등할지라도 서로 구별되고 역할과 활동이 같지 않다. 창조와 구원 사업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맡은 역할은 각기 다르다. 세 분의 호칭에는 반드시 순위가 있고 또 이 순위는 지켜져야 한다.
근원인 아버지 :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고 아들에 이어 영을 세상에 파견한 분이지만 스스로 파견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구원의 근원이며 모든 은총의 기초이다. 그분은 시작하고 선택하며 부른다.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운동에 비유한다면 그 모든 운동은 아들의 움직임처럼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어 아버지에 귀착된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떠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갑니다" (요한 16, 28). 인간 구원의 완전한 성취는 하느님이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때이다. "그때는 아드님도 자기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느님께 몸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1 고린 15, 28).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 해 있음을 말씀과 행위로써 증거하였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똑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5, 19 ; 5, 30). 그리스도는 전적 순종으로써 아버지에게 의존함을 드러냈다. 영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의존한다. 아버지가 일러주는 대로 그리스도가 가르친 바를 성령은 증언하고 깨닫게 해준다. 성령은 "자기 나름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가 듣게 될 일을 말씀하실 것이며 또한 (앞으로) 올 일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 입니다"(요한 16, 13).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종의 모습을 취한 아들에게 떠맡겨졌다. 아들은 우리의 구원을 선포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죽음으로써 완성하였다. 구원 사업이 아버지로부터 오면서도 그 중심점에 아들인 그리스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봉사직을 주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2고린 5, 18). 영은 아들의 청원으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분이다.
파견과 순위 :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영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파견되었다. 파견을 위해서는 파견되는 이가 파견하는 이와 구분되어야 하고, 또 전자는 후자에게 의존해 있다. 아들과 영은 단일성 안에서 동등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역시 그 안에서 의존하며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다. 아들과 영은 아버지처럼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받는다. "제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요한 17, 10). 아버지 홀로 절대적 의미로 기원되지 아니한 하느님이다. 모든 것의 시작과 완성은 아버지에게 있으며, 아버지는 창조와 구원의 주도권을 취한다. 그렇다고 해 서 아들과 영이 하느님의 행위의 수단은 결코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영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사업을 펼쳤다.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영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또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근원(·로로부터), 아들은 중재(····을 통하여), 영은 성취(··안에서)의 역할을 각기 맡는다. 하느님의 사업에서 세 분이 맡은 고유한 역할은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구별된다. 아버지는 우리 '위에' , 아들은 우리 '와 함께' , 영은 우리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이다.
하나 안에서의 구별 :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관계에 대하여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내용은 이렇다. 즉 아버지는 하느님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체의 표상"(히브 1, 3)으로서 하느님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분이므로 아버지와 구별되어,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다.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하고 살아 있으며 자유로우므로 똑같은 하느님이다. 그런데 영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분이므로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등하고 구별되는 하느님인데도 여러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은 오로지 한 분뿐이다. 이 근본 내용 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은 유일한 분으로서 한신적 실체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서로 구별된다."
Ⅲ . 세 위격 안에 있는 한 본체
삼위 일체 교리의 출발점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하여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동시에,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이스라엘의 근본 신앙을 수용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신명 6, 4). 하느님이 유일하다는 신앙 고백은 신약성서에도 명백하다. 예수는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인 주님이시다"(마르 12, 29)라고 인용하였다. 하느님의 유일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교회는 본성(natura) · 본질(essentia) · 실체(substantia) 개념들을 채택하였다. 하느님은 본질에서 유일하다. 하느님 안에서 본질에 관한 것은 단일하다. 하느님은 한 분이고 만물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분은 살아 있고 영원한 하느님이며, 세상 존재의 비인격적인 근거가 아니라 모든 구원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원천이다.
하느님의 유일성을 '절대적 단일성' 으로 이해할 때, 즉 모나르카아니즙(monarchianismus, 唯主論)을 고수할 때에 성자 종속설(聖子從屬說, subordinationismus)과 모달리즘(modalismus, 樣態說)의 두 가지 오류가 생겨난다. 성자 종속설에 의하면 하느님은 가장 높은 실체로서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지만 나누어질 수 없는 단일성 때문에 다른 존재와 교류할 수 없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통교를 위하여 한 분 하느님을 전달할 수 있는 중간 존재 곧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한 분 하느님의 첫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모범이 되지만, 한 분 하느님 밑에 종속되어 있는 '하급 신(神)' 이다. 성령 역시 천사와 같은 유형의 '사이 존재' 이며 그리스도의 시종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에게,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중간 존재' 로서 하느님과 절대로 동등하지 않다. 반면에 모달리즘에 의하면 한 분 하느님은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세 가지 양태를 취한다. 하느님은 성부의 양태(모양) 안에서 창조주로, 성자의 양태 안에서 구원자로, 성령의 양태 안에서 성화주(聖化主)로 나타난다. 성부 · 성자 · 성령인 한 분 하느님이 구원을 펼치는 세 가지 방식 또한 양태이다. 본질적인 것은 단 한 분 하느님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느님의 세 가지 모습일 뿐이다.
세 신(神)을 가정하는 삼신론(三神論)과 하느님의 절대적 유일성 및 초월성을 보존하려는 성자 종속설과 모달리즘에 반대하여 교회는 하느님에게는 오직 하나의 본질밖에 없으며 서로 구별되는 세 위의 개별 '자립 존재 혹은 자존재' (自存在, subsistentia, ὑπόστασις )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다시 말해 한 신적 본질이 세 위격에 있다는 것이다.
IV .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와 내재적 삼위 일체
〔구원 경륜의 삼위 일체〕 삼위 일체의 신비는 우리 구원의 근거이며 목표이다. 하느님이 삼위 일체의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활동하였을 때 우리의 구원이 성취 되었고, 또한 이 구원은 하느님의 본질에 온전히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과 동등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였다. 구원과 관련하여 성자와 성령을 파견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생명을 알게 해주는 하느님을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 라고 한다. 하느님은 구원을 계획하고 성취하면서 자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현존하고 활동함을 보여 주었다. 하느님은 구원 경륜을 통해 '우리를 위하여 외부를 향해 활동하는 하느님' 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하느님은 실제로 자기 본질에 근거하여 인간을 구원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생명은 외부로 향한(대외적) 구원 활동의 '초월적' 근거이다. 하느님은 절대 자유안에서 자기 본질에 근거하여 인간을 위하여 외부로 향해 구원 활동을 펼쳤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자신의 생명안에 있는 하느님 즉 자신 안에서 내부를 향해 활동하는 하느님을 '내재적 삼위 일체' 라고 부르는데, 이는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 와 서로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성취한 구원 사건은 자신의 생명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너(K. Rahner)에 따르면 구원 경륜적 삼위 일
체는 내재적 삼위 일체이고, 내재적 삼위 일체는 곧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이다.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도 관련하여 삼위 일체이다. 내재적 삼위 일체는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의 초월적 근거이며,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는 내재적 삼위 일체를 역사 안에서 계시한 것이다. 성서는 주로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를 증언하고 내재적 삼위 일체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시사할 뿐이다.
성서는 외부로 향한 하느님의 대외 행위들을 각 위격들에 '귀속' 시켜 증언한다.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였고 세상과 역사 안에서 활동한다. 성자는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실현하였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교회를 건설한다. 창조, 구원, 성화가 각각 성부 · 성자 · 성령에게 '점유' 되지만 세 위격들이 유일한 신적 본질을 통하여 활동하므로 이렇게말해야 한다. "삼위 일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인류를 구원하였으며 교회와 역사 안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에 따라서 통상 하느님의 각 활동들을 각 위격에 귀속시켜 말한다. "성부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였고, 성자는 구원하였고, 성령은 성화한다."
창조주 성부 : 외부로 향한 성부의 대외 행위는 창조이다. 성부는 성자 안에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였다. 그분은 성자와의 사귐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였고, 모든 인간과 통교할 수 있도록 창조 사업을 펼친다. 모든 것은 성자를 향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도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하는도다" (골로 1, 16-17). 성자는 창조의 중심이다. 성부는 성령을 통해서도 창조하였다. 그분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실 때에 성령이 함께 작용하였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다. 창조로써 성령이 피조물 세계 안으로 들어왔으며, 세계는 성령의 힘으로 존속한다(시편 104, 30). 창조는 성부의 행위이지만 이 행위에는 말씀인 성자와 생명의 숨인 성령이 관련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도다"(시편 33, 6 ; 참조 : 창세 1, 2-3). 창조는 성부의 행위인 동시에 삼위 일체의 공동 활동이며 하느님의 생명과 결부되어있다.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주려고 할 만큼 인간을 사랑하므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였다. 이 하느님의 자기 양도가 세계 창조의 목적이다.
구세주 성자 : 세상을 향한 성자의 행위는 구원이다. 죄에 예속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하여 성자는 인간과 철저히 같아졌다. 죄와 고통과 죽음에 처해 있는 인간의 처지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하여 '사람' 이 되었다. 성자의 육화는 인간을 신화(神化)하기 위함이다.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립 2, 7-8) 성자의 삶과 죽음은 성부가 인간과 화해하여 새 창조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성자는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로 있게" (로마 8, 29) 되었는데, 이는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여 하느님의 사랑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새 창조인 구원은 성자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성자는 성부의 주도권에 의해 성령으로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 행위에 성부와 성령도 관련되었다. 구원은 성자의 행위인 동시에 삼위 일체의 공동 활동이다. 성부는 세상에 대한 큰 사랑으로 성령을 통하여 성자를 세상에 보냄으로써(요한 3, 16) 자신을 양도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넘겨주셨는데 어찌 그 아드님과 더불어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마 8, 32)
성화주 성령 : 성령의 행위는 성화이다. 특정 시간과 장소 안에서 일어난 성자의 구원 사건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 안에서 실현시키기 위하여 성령이 파견되었다. 그리스도 사건을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하여 보편화하고 각 개인 안에 내면화하기 위해 성령이 파견 되었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린 부활의 능력(1고린 6, 14)으로 성령은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며 거룩하게 하여 하느님에게로 이끈다. 성령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견되었다. 성화는 성령의 행위이지만 이 행위에는 성부와 성자가 관련되어있다. 성화는 성령의 행위인 동시에 삼위 일체의 공동 활동이다. 성령 덕분에 삼위 일체 하느님이 인간 안에 현존하게 되었다. 이로써 하느님의 자기 양도는 성령의 내주(內住)로써 완성된다.
〔내재하는 삼위 일체〕 하느님이 자신 안에 머무르지않고 밖으로 이탈하여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외부로 활동한다면, 이 행위는 반드시 자신의 내면적 본질과 관련된 것이다. 외부로 향한 하느님의 활동은 하느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과 결부되어 전개된다. 하느님은 본질상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내어주는 사랑 자체이므로 외부를 향해서도 역시 사랑으로 활동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신 안에 있는 삼위 일체 곧 내재적 삼위 일체는 세상과 인간을 위한 삼위 일체 곧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이다. 그런데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가 구원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냈다면 이 계시를 통하여 내재적 삼위 일체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대외 활동들 즉 창조 · 구원 · 성화를 통하여 인간이 내재적 삼위 일체를 이해할 수 있을지라도 이 삼위 일체는 인간에게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다. 삼위 일체 신비에 접근하는 길이 오로지 침묵과 겸손과 흠숭뿐임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은 신앙에 비추어진 이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같은 시도로부터 갖가지 유비(類比)가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이성이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는 것과 여러 신비 사이의 유사점을 생각함으로써, 또 여러 신비들의 상호 관계와 인간의 종국적 목적과의 연관을 고찰함으로써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풍성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유비적 해석들은 삼위 일체에 관한 성서의 표상들(아버지, 아들, 말씀, 선물) 위에 근거한다.
아버지와 아들 :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을 때 이는 구약의 야훼를 연상시키며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면서 우리의 감성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분임을 시사한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만물의 근원이며 '태어나지' 않은 분이다.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외아들(요한 1, 14 ; 3, 16)이다. 외아들의 개념에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났으며,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근원이 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러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 2, 7 ; 참조 : 마르 1, 11). 아버지-창조주 하느님은 아들의 근원이며 시초이다. 그런데 아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난 하느님' 으로서 아버지는 자기 고유한 본질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아들' 의 성서적 표상으로부터, 아버지가 태어나지 아니한 근원으로서 일체의 감소나 상실없이 자신과 본질상 같은 아들을 낳았음이 추론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뿌리와 나무, 강의 원천과 줄기, 태양과 광선의 관계와 '유사' 하다.
말씀인 아들 : 아들은 아버지의 모상(2고린 4, 4)으로서 "영원한 영광"인 아버지의 광채이다(히브 1, 3).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존재하였고 하느님 말씀으로 창조력을 지니고 창조 사업에 적극 협조하였으며,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온 빛과 생명이다(요한 1, 14). 그리스도는 하느님 안에 내재하는 말씀' 으로서 창조와 강생 구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향해 하느님에게서 '발설된 말씀' 이 되었다. 하느님 안에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이다. 이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향해 발설되어 창조의 원형과 구원의 주역으로서 활동하였다.
선물인 성령 : 성서는 성령에 대해 '주다' 또는 '받다'라는 동사로 증언한다. 성령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선물이다. 성자가 태어남으로써 아들이 되는 것처럼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즉 상호 선사로써 나오기 때문에 그분의 개별 이름은 선사이고 사랑이다.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준다. 성령의 현존은 항상 사랑의 표현 안에 나타난다. "우리에게 선사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5, 5). 성령은 사랑이기에 아버지와 아들을 묶는 끈이다. 아버지는 유일한 사랑인 성령으로 자신과 아들을 사랑하며, 아들도 그 사랑으로 자신과 아버지를 사랑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을 사랑으로 인간에게 내어 준다.
V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외부를 향한 성부 · 성자 · 성령의 대외 활동은 창조와 구원과 성화이며, 하느님의 본질 안에서 일어나는 대내 활동은 성자와 성령의 발출에서 기인되는 생명의 움직임이다.
〔실제적 관계〕 하느님 안에서 발생하는 두 생명의 발출은 하느님 안에 관계들을 형성한다. 관계란 타자와의 연관 즉 대타성(對他性)을 뜻한다.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대해 갖는 연관이다. 관계는 주체 · 경계 . 기초 세 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느님 안에 성부로부터 나오는 성자와 성령의 두 생명 발출이 있고 각기 발출에서 두 가지 관계가 생겨난다면 하느님 안에는 네 관계가 형성된다. 첫째,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는 능동적 출생 곧 부성(父性)이다. 둘째, 성부에 대한 성자의 관계는 피동적 출생 곧 자성(子性)이다. 셋째, 성령에 대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능동적 내쉼이다. 넷째,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성령의 관계는 피동적 내쉼이다. 이 네 관계 중 세 번째를 제외한 셋은 실제로 상호 구별된다. 세 번째 즉 능동적 내쉼은 부성 및 자성과 동일시되고,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으로 속하기 때문에 구별이 없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부성, 자성, 피동적 내쉼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실제적 대타성을 형성한다.
하느님 안에서 구별되는 이 세 가지 대타성, 즉 부성과 자성과 피동적 내쉼은 한 신적 본질을 침해하지 않고 관계에만 영향을 미친다. 즉 두 위격을 침해하지 않고 그들의 관계에만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대타적 관계들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하나이다. 각 관계는 그 근거인 신적 본질과의 연관에서는 유일한 것이지만 대타성을 이루는 다른 관계와의 연관에서는 실제로 구별된다. 부성은 신적 본질과 동일시되지만 대타성을 이루는 자성과의 관련에서는 다른 것이다. 아버지는 그 자체 안에서 하느님이라면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아버지이다. 아들도 그 자체 안에서 하느님이지만 아버지와의 연관에서는 아들이다. 성령은 그 자체 안에서는 하느님이지만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련에서는 성령이다. 이리하여 일체와 삼위는 둘 다 보존된다.
〔위격 관계〕 성서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면서 자존(自存)하는 분,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본질이 같으면서 자존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성부 · 성자 · 성령은 스스로 존재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단순하고 완전한 존재이므로 하느님 안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존한다. 세 자립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위격' 과 '자존재' 가 사용되었다. 위격은 본래 가면, 탈, 배역, 법정 대리인을 가리켰다. 오늘날 기능과 역할에 해당되는 이 용어를 무작정 삼위 일체에 적용시키면 성부 · 성자 · 성령은 세 가지 탈을 쓰고 나타나는 한 하느님으로 이해된다. 즉 모달리즘으로 전락된다. 이 용어가 한 본성을 가진 개별 존재를 뜻하는 자립 존재를 가리키는 자존재의 동의어로 사용됨으로써 존재와 행위의 궁극적 주체를 뜻하게 되었다. 세 신적 위격은 한 공통된 신적 본성을 가진, 고유하고 다른 것과 교체될 수 없는 주체로 이해되었다.
세 위격은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있으나 각기 고유성과 상이성을 갖고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역시 다른 위격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 위격은 각자의 고유성 즉 부성과 자성 및 피동적 내쉼을 지닌다. 그렇지만 세 위격이 서로 독립되어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아니다. 각 위격은 개별적 위격성 또는 고유성을 다른 위격으로부터 분리되어서가 아니라 다른 위격들과의 관련 속에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는 부성이라는 고유성을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 안에서 가진다. 세 위격은 상호 대타성 안에서 각기 개체성과 고유성을 가지며 각자의 위격성 안에서 상호 관계를 갖는다.
〔귀속과 상호 내재〕 각자의 고유성을 지닌 채 타자와 관계를 맺을수록 더욱 인격적이 되는 인간의 인격은 고유한 생각, 습성 및 자유와 사랑의 능력을 지닌 주체로서 타자와 사랑을 나눔으로써 깊은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서로 구별되는 인격체들을 일치시켜 서로 상대 안에 있게 해주며, 인격체는 상대방 안에 있음으로써 더욱 인격다워진다. 인격체에 대한 이 같은 고찰은 신적 위격들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각 신적 위격은 상호 사랑의 힘으로 다른 위격 안에 있으며, 각 위격은 자기 존재를 다른 위격들 안에서 발견하고 다른 위격들로부터 충만한 생명을 얻는다. 이리하여 일체 안에 삼위가, 삼위 안에 일체가 있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부각시키는 전통적인 개념이 '귀속' (appropriatio)이고 '상호 내재' (perichoresis)이이다.
세 위격들의 고유성과 행위는 각 위격에 귀속된다. 외부를 향한 세 위격의 대외 활동들, 즉 창조와 구원과 성화는 각 위격이 서로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안에서 공동으로 펼치는 활동이다. 성부는 창조의 주역이지만 성자와 성령도 이에 동참하며, 성자는 구원의 주역이지만 성부와 성령도 이에 참여하며, 성화의 주역은 성령이지만 성부와 성자도 이에 참여한다. 이 공동 행위들이 각 위격들의 고유성으로 인해 각 위격에게 귀속된다는 이 개념은 한 신적 본질 안에서 세 위격이 구별되어 있음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성부 · 성자 성령은 상호 침투하여 내재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요한 10, 3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요한 14, 10 : 17, 21). 성부 · 성자 · 성령은 서로 안에 침투하여 존재한다. 이 상호 침투는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력으로 인해 순환 운동을 형성한다. 구별되는 세 위격은 서로 다른 위격들 안에 들어가 존재하고 활동하므로 한 본질을 이룬다. 상호 내재 또는 순환의 개념은 구별되는 세 위격들의 일체(一體)를 강조한다. 귀속의 개념은 삼위 일체의 삼위성을, 상호 내재의 개념은 그 일체를 부각시킨다.
Ⅵ . 사랑의 사귐
하느님 안에 성자와 성령의 발출 즉 두 생명의 발출이 있고, 또 이 발출이 신적 생명 안에 움직임을 일으키며 관계들을 형성함으로써 삼위 일체는 사랑의 사귐이 된다. 역동적 관계들은 사랑의 교류임에 틀림없다. 아버지 하느님은 신성의 유일한 근원으로 영원히 신적 본질을 지니고 아들을 낳았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되므로 성부는 영원히 성자를 사랑하고 성자도 성부를 사랑한다. 성령은 성부와 같은 신적 본질을 온전히 선사받은 성자를 통하여 나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상호 사랑이고 공통 사랑이므로 둘은 하나로 묶는 유대이다. 진실한 사랑은 삼위 일체의 신비에 대한 적절한 유비가 될 수 있다(1 요한 4, 7-9).
〔사랑의 통교〕 참사랑은 타자를 향해 열려 있고 그에게 가서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고 온전히 선한 하느님 안에는 지고(至高)한 선과 사랑이 있다. 사랑보다 더 완전하고 선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홀로 있다면 자애(自愛)만 있을 뿐이므로 참사랑 자체일 수 없다. 하느님이 사랑 자체라면 자신 안에서 타자를 향해 열려 있어야한다. 완전한 하느님 안에 영원하고 진실된 사랑이 있으려면 하느님 자신 안에 아버지 하느님 이외에 그와 본질이 같은 하느님이 있어야 한다. 아들이 하느님 안에 있으므로 하느님 안에 타자를 향한 사랑 즉 참사랑이 존재한다. 그런데 둘 사이에만 한정되고 제3자를 향해 개방되어 있지 않는 사랑은 허약한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완전하고 충만한 것이 되려면 그 상호 사랑에 동참하는 '제3자' 가 있어야 한다. 공통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어 제3자를 함께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즉 둘의 사랑은 제3자에 대한 사랑의 불꽃 속에 하나로 용해되는 데에 있다. 둘 사이에 참사랑이 있어서 둘다 진정 사랑할 때에 비로소 공통 사랑이 일어난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한 사랑을 나누어 둘 모두 참사랑을 가지므로 공통 사랑이 형성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겨난 공통 사랑이 곧 성령이다.
〔나 · 너 · 우리〕 '나' 와 '너' 의 상호 관계, 그리고 '우리' 의 일치는 인간의 근본 존재 방식이다. 인격체는 이 존재 양식을 통하여 자신을 성숙시키고 완성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창세 1, 26)은 삼위 일체를 어느 정도 닮았으므로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관계 속에 있는 위격인 것처럼, 인격도 남을 향하여 열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과 그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 유일무이한 자가 아니며, 모든 다른 이와 구별되는 존재이다. '나' 는 남을 향해 자신을 열고 그에게 가서 '너' 라고 말한다. '나' 와 '너' 의 상호 만남 중에 '나' 는 '너' 를 역시 둘도 없는 귀중한 존재로 인정한다. '나' 가 '너' 를 만날 때 아집에서 벗어나 대화와 일치의 관계를 맺는다. '나' 와 '너' 의 관계는 인격 관계이다. 여기서 '우리' 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이 일치는 두 사람의 구별을 말살하지 않고 성숙시키고 완성한다. '나' 와 '너' 는 '우리' 안에서 인격체로 성장한다.
이 비유를 삼위 일체에 적용시킨다면 성부는 '나' , 성자는 '너' , 성령은 '우리' 라고 할 수 있다. '나' 는 1인칭이고 이에 앞서는 다른 인칭이 없는 것과 같이, 낳음 받지 않은 성부도 첫째 위격이다. '나' 는 주체로서 너' 와 관계 맺고 있는 자존재이다. '너' 는 2인칭으로 '나' 와상대하는 자인 것처럼 성부의 사랑에 응하는 성자도 자 존재로 둘째 위격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우리' 로비교될 수 있다. '우리' 는 '나' 와 '너' 가 함께 행하는 공통 활동의 근원인 것처럼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발출시키는 유일한 근원이다. 성부와 성자는 '우리' 로서 성령을 향해 있다. 성령 덕분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우리' 가 가능하다. 성령은 삼위 일체 안에서 '우리' 와 같다.
〔하나와 다수] '나' 와 '너' 가 구별되고 '우리' 안에서 일치를 이루므로 삼위 일체의 신비는 만물의 기원과 목표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사랑은 다수의 다양성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고 완성시키는 일치의 원리이다. 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는 다수를 억압하고 지배하려 함으로써 대립과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 독재나 독점 안에서 추구되는 절대적 단일성은 혼란과 무질서를 일으킨다. 절대적인 것이 단순히 많이 있을 경우에도 혼돈을 초래한다. 세상에서 생겨나는 단합은 그저 우연히 이루어진 하찮은 현상에 불과하고 결국 모든 것이 본래의 소용돌이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분파주의는 일치를 배제하는 다수의 횡포이다. 일치야말로 구원이고 완성이다. 다양성이 한 근원에서 나왔고 한 도달점에 귀착되리라는 것이 완성에 대한 인류의 공통 신념이다. 최종 성취는 만물이 다양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면서 하나에 복귀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물은 한 하느님이라는 근원에서 나왔고, 또 각기 고유한 본성에 따라 복잡화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다양성을 지닌채 한 목표에 총괄되고 완성된다. 하느님은 하나로 일치되기 위하여 "많아져라" 하고 창조를 시작하였다. 그리스도는 분산되어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구원 사업을 성취하였다(요한 12, 32). 성령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선사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봉사하게 하는 일치의 영이다.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에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1고린 15, 28).
Ⅶ. 하느님의 생명과 인간의 구원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성자와 성령을 파견함으로써 외부를 향한 생명의 대외 활동을 펼쳤다(구원 경륜의 삼위 일체). 이 파견들은 하느님 자신 안에서의 대내 활동 즉 성자와 성령의 발출들(내재적 삼위 일체)에 근거한 것이므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은 그 내면적 본질 즉 내재적 삼위 일체의 신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성자와 성령의 두 파견 즉 구원 경륜이 어떻게 하느님 자신 안에서의 생명 활동과 깊이 관련되어 실현되었는가?
하느님은 사랑이다. 사랑의 고유한 특성은 자신을 초월하여 자신 밖으로 이탈하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를 향해 나아가도록 자신을 재촉하는 추진력이고, 타자를 끌어당기는 인력이다. 그것은 자신을 극복하고 열고 초월하여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로 향해 가는 움직임이다. 성부와 성자는 상호 사랑 안에서 자신들 밖으로 나와 자신의 사랑을 넘어 한 자립 존재를 형성하는데, 이 자존재가 성령이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서 서로 끌어당기며 서로에게 가기 위하여 자신 밖으로 이탈한다. 이 자기 이탈, 상호 추진력과 인력, 상호 사귐은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가 자신을 온전히 서로에게 양도함으로써 성령이 발출하기에 성령은 하느님의 위격적 선물이고 사랑이고 친교이다. 성부와 성자의 자기 이탈은 사랑의 순환, 생명의 역동적 움직임, 순수한 선사인데 이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영원히 자신 안에서 또 자신 밖을 향하여 자신을 '선사할 수 있는 분' 이다. 하느님은 영원히 줄 수 있는 분이지만 언제나 온전한 자유 안에서 자신을 양도한다. 이것이 구원 경륜의 내용이다.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견한 것은 자신을 두 가지 방식으로써 인간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창조와 구원과 성화는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점차로 양도하는 결과이고, 이 모든 것은 종말의 완성 즉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써 완성된다. 하느님 자신 안에서 성부는 순전히 주는 분이다. 그분은 신적 생명의 기원되지 아니한 기원이고, 순수한 근원이고, 순전한 선사이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신적 생명과 힘과 영광을 받는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보존하고 소유하며 스스로 향유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넘겨주고 비우기 위하여 받는다. 성자는 순수한 중재이고, 순전한 지나감(파스카, 건너감)이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선사에서 나오는 성령은 순수한 받음, 온전한 선물, 순전한 성취, 영원한 기쁨이다. 순수하고 끝없는 완성이다. 따라서 성령은 하느님이 세상에 자신을 내어 주는 종말론적인 선물이다. 그분은 인간 세상을 결정적으로 거룩하게 함으로써 완성한다.
구원 경륜 안에서 성부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줄 때에 성자가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 3, 16-17). 사람이 된 성자는 성부로부터 받는 모든 것(요한 16, 15)을 독점하지 않고 성부에게 되돌려 주기 위하여 자신을 비운다(필립 2, 6-7). 육화로 시작된 성자의 삶은 인간과의 동화를 위한 지속적 포기이고 성부에게 자신을 되돌려 주는 부단한 '자기 비움' (KEVOOLS)이다. 성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명한 성자의 인생은 성부에게 자신을 되돌려 주는 전적 선사를 구체화한 것이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받은 자기 존재를 찬미와 감사 속에서 되돌려 주는 선사의 삶인 순종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고 완성되었다. 부활은 성자의 완전한 되돌려 줌에 대한 성부의 응답이다. 성부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다시 살림으로써 성자의 순종에 전적으로 응답하였다. 역사 안에서 성부와 성자간의 완전한 상호 증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성취되었으므로 그 증여로부터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파견되었다. 세상에 파견된 성령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를 선사받음으로써 삼위 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삼위 일체의 구원 행위를 감사하며 성삼위의 친교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하며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 (⇦ 성부 ; 성자 ; → 니체아 공의회 ; 모나르키아니즘 ; 모달리즘 ; 삼위 일체론 ; 성령)
※ 참고문헌 P. Nemeshegyi, 《성부와 성자와 성령》, 분도출판사, 1978/ 최영철, 《아버지 · 아들 · 영 하느님》, 가톨릭신문사, 1994/ W.Hill, The GodofJesus Christ, New York, Crossroad, 1984/ W. Kasper, The Three-Personed God, Washington D.C., Catholic Univ. of America Press, 1983/ L. Boff, Trinity and Society, Liberation and Theology Series 2, Orbis Books, New York, 1986. [崔榮喆]
삼위 일체
三位一體
[라]trinitas · [영]tr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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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일체는 세 위격이 완전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한 신성을 이룬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