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 일체 수녀회

三位一體修女會

〔프〕Congregation des Soeurs de la Très Sainte Trinité (C.S.S.T) · 〔영〕Tminitarian Sisters of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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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노예의 환시를 보고 소명을 깨달은 마타의 성 요한(왼쪽)과 수녀회의 영성을 나타내는 삼위 일체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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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노예의 환시를 보고 소명을 깨달은 마타의 성 요한(왼쪽)과 수녀회의 영성을 나타내는 삼위 일체 이콘.

1685년 12월 24일 잔 아드리앙(Jeanne Adrian) 수녀가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세상의 온갖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구원과 해방의 하느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한 수녀회. 총본부는 프랑스 리용(Lyon)에 있으며, 한국 본원은 부산시 중구 영주2동 205-10번지에 있다.
〔기 원〕 1154년(혹은 1160년) 6월 23일 프랑스 프로방스(Provence)의 포콩(Faucon)에서 태어난 마타(Matha)의 성 요한은 유년 시절 지중해 연안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던 노예 약탈 행위를 듣고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같은 인간에 의해 고귀한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히고, 결국에는 신앙을 잃고 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랑이 싹트게 되었다. 이후 성년이 되어 1187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소르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 주교의 권고에 따라 사제 성소를 택하고 1192년 11월 25일(혹은 12월 20일) 파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직후 첫 미사를 봉헌하던 마타의 성 요한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가 손수 백인 노예의 쇠사슬을 풀어 주는 환시를 보고, 이 계시가 담고 있는 주님의 뜻을 깨닫기위하여 은수자인 발루아의 성 펠릭스(St. Félix de Valois)와 다른 수도자 몇몇과 함께 세르프르와(Cerfroid)에서 침묵과 기도의 시간을 갖게되었다. 여기에서 해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게 된 그는,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것만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해 사는 길임을 확신하고 1198년 5월 16일 '삼위 일체 수도회' 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12월 17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회칙을 인준받았다. 한편 마타의 성 요한은 1213년 12월 17일 로마에서 사망하여 1666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발랑스의 삼위 일체 수녀회〕 1660년 포레(Forez)의 생 니지에(Saint Nizier)에서는 4명의 처녀가 본당의 신심단체인 '거룩한 삼위 일체회' 에 가입하여 가난한 소녀들을 위하여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들은 마타의 성 요한의 영성을 이어받아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모든 것을 그분의 사랑과 영광을 위해서 일하기로 결심하고 1675년부터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이로써 12세기 말 마타의 성 요한에 의하여 꽃핀 해방과 구원의 수도회 정신은 단절되지 않은 채 17세기의 변화된 사회 안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거룩한 삼위 일체회 회원들의 영적 지도자인 리용 교구의 부주교 모랑주(Morange) 신부는 이듬해 4월 20일 회원들을 위해 새로운 생활 규칙을 마련하였으며, 이 단체는 점차 활성화되어 1679년에는 7개의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한편 모랑주 신부는 교구 대주교에게 이 공동체를 수녀회로 설립시켜 줄 것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한데다가 이 단체에 개입하지 말라는 조치까지 받게 됨으로써 수녀회 설립 계획은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후 이 단체 회원이었던 잔 아드리앙은 위독한 자매를 돌보기 위해 1685년에 잠시 생 페레(Saint Peray)에 머무르다가 우연히 발랑스 교구의 코스낙(Cosnac) 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마침 시립 병원에서 헌신할 봉사자를 찾고 있던 코스낙 주교는 거룩한 삼위 일체회에 그 일을 부탁하였고, 모랑주 신부가 이에 동의함으로써 1685년 성탄절에 마침내 '삼위 일체 수녀회' 가 발족하였다.
이후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으로 발랑스의 시립 병원은 폐쇄되었으나 다행히 구호 사업에 종사하고있던 수녀들은 그대로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또 회원들은 1799년 프랑스군에 의해 발랑스로 유배된 교황 비오 6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쾌유를 빌며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헌신적으로 간호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정부와 교회 사이에는 긴장이 지속되었지만 수녀들은 봉사 활동을 인정받아 1810년 7월 16일에 교구 소속 수녀회로 인가되었고, 1869년 9월 22일에는 교황 비오 9세로부터도 인가를 받았다. 이에 앞서 삼위 일체 수녀회는 1840년 9월 30일에 처음으로 4명의 회원을 알제리의 오랑(Oran)에 파견하여 무료 학교를 열고 고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어 영국(1886), , 스위스(1892), 벨기에(1895), 이탈리아(1903), 마다가스카르(1928), 캐나다(1949), 스페인(1969) , 아일랜드(1977) 등지로 진출하였다. 최근에는 콜롬비아, 카메룬, 중국 등지에도 파견되어 1998년 7월 현재 14개 국에서 총 366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 진출과 도약〕 1986년 10월 10일 부산교구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주교의 초청으로 한국에 진출하게 된 삼위 일체 수녀회는 부산 중구 대청동 4가 81번지에 첫 공동체를 마련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 8일 2명이 입회하였는데, 이들은 1991년 4월 20일 첫 서원을 하였다. 지원자가 증가하면서 1989년 12월 9일 현재의 영주동 본원을 완공한 뒤 이곳으로 이전하게 된 수녀회는, 그 동안 장림동의 계림 농장 나환우들을 보살폈으며, 최근에는 교정(矯正) 사목을 비롯해 지체 장애인들을 방문하여 돌보기 시작하였고, 청소년 특히 가출 소녀들을 주 1회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다. 또한 1997년 2월부터는 신설된 다대 본당의 사목을 돕고 있으며, 1998년 9월에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자율 학습교실' 을 열었고, 가치관의 혼돈으로 힘겨워 하는 이들을 비롯하여 약물 중독자와 매매춘 여성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사도직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1998년 7월 현재 한국 수녀회에는 종신 서원자 5명, 유기 서원자 6명, 수련자 2명, 청원자 3명 등 총 16명의 회원이 있으며, 그중 2명의 회원이 콜롬비아와 중국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 부산교구)
※ 참고문헌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釜山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한국 남녀 수도자 장상 협의회 양성위원회 엮음, 《오늘의 수도자들》, 분도출판사, 1992/A.G. Biggs, 《NCE》 7,p. 1060/R. Gazeau, 《Cath》 6, pp. 465~466.〔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