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운동

三一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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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는 민족 대표들(왼쪽)과 동대문에 모인 시위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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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는 민족 대표들(왼쪽)과 동대문에 모인 시위 군중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 기미(己未)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3 · 1 운동은 일제의 무단 정치, 미국 대통령 윌슨(Th.W. Wilson)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 고종(高宗)의 사망과 장례 등이 주요 계기로 작용하여 잠재해 오던 한국 민족의 독립 의식이 일시에 전국적으로 폭발함으로써 일어났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乙巳保護條約)으로 조선 침략에 착수한 일제는 마침내 1910년 한일합병을 강행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무단 정치로 조선을 다스렸다. 그래서 일제는 그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항일 운동을 무력으로 저지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소위 안악 사건(安岳事件) · 105인 사건 등을 조작하면서 한민족을 말살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자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만주 · 상해(上海) · 시베리아 · 미국 등으로 망명하였고, 그러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전후(戰後) 문제를 처리하는 방안의 하나로 이른바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었다. 이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은 일제의 무단 정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 민족에게는 더욱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1919년 2월 중국 상해에 모인 민족운동자들은 이 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하기로 하였고, 일본 동경(東京)의 한인 유학생들은 같은 해 2월 8일 한국인 기독교 청년 회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2월 8일의 독립 선언 사건은 국내 인사들에게 큰 자극이 되어 일부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독립 운동을 계획하게 하였다. 때마침 고종의 장례일이 3월 3일로 임박하고 있어서 기회는 더없이 좋았다.
구체적인 계획은 천도교 · 프로테스탄트 · 불교 등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꾸며지고, 민족 대표로 선출된 33인에 의하여 실천에 옮겨졌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천도교측이 15명, 프로테스탄트측이 16명, 불교측이 2명이었으며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선언서를 약 2만 부 인쇄하였다. 거사일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고종의 장례일 대신 2일 앞당긴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바로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같은 시간 탑골 공원에서도 4,000~5,000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렇게 서울에서 점화된 독립 만세 운동의 불길은 곧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방방곡곡에서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다. 독립 만세 운동은 3월과 4월에 최고조에 달하였으나 4월 말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무력적인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3 · 1 운동의 규모는 자료의 부족으로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집회한 수가 1,500여 회에 참가한 인원만도 적어도 200만 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경찰은 시위자에 대하여 고문 · 학살 · 투옥 등 잔학한 탄압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하였는데, 알려진 희생자수만 해도 투옥된 자가 46,948명, 기소된 자가 10,441명, 학살된 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이 교회 안에 교인 수십 명을 감금해 놓고 거기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인 수원의 제암리 만행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비록 일제의 무력 앞에 진압당함으로써 소기의 독립은 실현되지 못하였을지라도 3 · 1 운동이 지니는 민족사적인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대외적으로는 한민족의 자주 의식과 독립 의식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여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상해(上海)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을 가능하게 하였고, 대내적으로는 무단 청치를 문화 정책으로 바꾸게 할만큼 민족 투쟁 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의 결속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3 · 1 운동과 천주교〕 한일합병의 원흉(元凶)인 이토(伊藤博文)가 1909년에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물론 한민족에게는 의거(義擧)로 받아들여졌으나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총책임자였던 프랑스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도리어 안중근을 살인죄로 단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인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일체의 독립 운동을 엄금하였다. 이제 천주교회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민족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더러 거기에 참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개인 자격이기는 하지만 일부 용감한 신자들에 의해 독립 운동은 지속되어 나아갔다. 역시 천주교 신자이며 안중근의 종제인 안명근(安明根)은 1910년 말 2명의 신자와 함께 만주에서 황해도로 잠입하여 신천과 안악 등지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당국은 이 사건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간주하여 김구(金九) 등 100여 명을 같은 혐의로 체포 · 투옥하는 소위 안악 사건을 조작하였는가 하면, 이를 구실로 다시 600여 명을 체포하고 윤치호(尹致昊) 이하 신민회(新民會)의 주요 인물들을 징역에 처하기 위해 다시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 사건의 요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기당(李基唐)은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역시 교회에서 파문되고 제적되어야 했다.
3 · 1 운동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민족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졌을 때 일어났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책임자인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의 프랑스 주교들은 신부나 신자들을 파문으로 위협하며 이 운동에 절대로 가담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서울과 대구의 신학생들은 제일 먼저 주교와 신학교 당국의 제지를 무릅쓰고 만세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본당의 학생들과 평신도들도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대구의 신학생들은 3월 8일 장날을 기하여 대구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시위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시위 현장에서 신학생 1명이 체포되었다. 서울의 용산 신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과 23일 두 번에 걸쳐 인근의 시민들이 벌이는 시위에 합류하여 독립 만세를 불렀으며, 때를 같이하여 각처의 본당 학교의 소년 학생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대구의 해성학교 학생들은 신학생들을 따라 3월 8일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이남숙(李南淑)이라는 학생이 체포되어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인천 본당의 박문학교에서도 2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황해도 은율 본당에서는 3월 18일의 시위에 이어 4월 15일의 시위를 준비하던 중 홍석종(洪錫宗)이라는 본당 학생이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또 2명의 학생은 독립 선언문을 거리에 게시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찰의 신문을 받았다.
평신도들의 참여는 더욱 많고 활발하였다. 그들은 시위에 참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때로는 시위를 주동하기까지 하였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3월 10일 천도교와 예수교의 신자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하고 함께 시위에 나섰다가 4명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강화에서는 3월 18일 장날을 기하여 1만여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주동 역할을 한 김용순(金龍順) · 조기신(趙基信) · 신태윤(申泰允) 등은 천주교 신자였다. 고양에서는 3월 27일 천주교 신자들이 고양군 내의 모든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독립 운동에 참가하라는 협박장을 보냈다. 같은 날 경기도 광 주 동부면(東部面)에서는 김교영(金敎永)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만세 시위를 선두 지휘하였다. 경기도 광주 땅의 구산(龜山)은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공소(公所)였는데, 정확한 시일은 알 수 없으나 5~6명의 청년 신자들이 시위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모두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한 명은 서울로 이송 · 투옥되었다. 수원의 장안면(長安面)에서는 이웃 제암리에서 일본 경찰의 만행이 있은 후 김선문(金善文) 회장을 비롯하여 5명의 신자들이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경찰을 살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안성에서는 김중묵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만세 운동을 선두 지휘하면서 밤에는 횃불 행렬 시위까지 벌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국외에서 일어난 시위에 더욱 활발히 참여했는데, 무엇보다도 3월 13일에 있은 유명한 간도 용정(龍井)의 시위는 천주교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었다. 정오에 울리는 성당 종소리를 신호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시내에 모였고 또 천주교 회장인 김영학(金永學)이 대회장이 되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와 시가 행진을 지휘하였다. 3 · 1운동으로 수감된 천주교 신자수는 일본측 통계에 의하더라도 53명에 이르는데, 그들은 서울 · 원산 · 신의주 · 평양 · 해주 · 공주 · 대구 등 7개 도시의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숫자는 천도교나 프로테스탄트와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기는 하나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교회 당국의 철저한 금지로 민족 운동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는 사정을 감안한다면 그런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3 · 1 운동은 4월에 상해에 임시 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었으나 운동 자체는 얼마 안되어 중단되었다. 이 무렵 천주교회 일각에서는 임시 정부의 탄생을 그간 부진하였던 독립 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임시 정부에는 더없이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독립 운동에 대한 가톨릭 세계의 올바른 이해와 계속적인 협조를 필요로 하였던 임시 정부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독립 운동에 대한 국내 천주교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시급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시 정부는 그 수립 초기에서부터 가톨릭의 협조를 얻어야 하였다. 그래서 상해의 프랑스 조차지에 정착할 수 있었는데 만일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가 아니었다면 또한 이미 임시 정부에서 안공근(安恭根)과 같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없었다면 아마 이 일이 그렇게 용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중근의 실제인 안공근은 임시 정부에서 김구와 함께 독립 운동을 주관하고 있었다. 또한 상해에서 프랑스로 파견된 김규식 역시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독립 진정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이 일을 도운 사람은 다름아닌 한국의 선교사로 있을 때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빌 렘(Wilhelm, 洪錫九) 신부였다.
임시 정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독립 운동 권고문을 특별히 작성하여 국내 천주교 신자들에게 배포하였다. 이 설득 작업은 1919년 9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는데 이를 위해 임시 정부에서는 국외의 천주교 신자들로 하여금 국내의 천주교 주요 인사들과 접촉하여 독립 권고문을 전하고 임시 정부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였다. 배포 대상은 우선 성직자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은율의 윤예원(尹禮源) 신부가 첫 번째 대상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윤예원 신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솔선수범하여 독립 운동에 참여하면서 신자들에게 독립 운동을 권하고 독립 사상을 주입시켜 왔으므로 제일 적
임자로 지목되었을 것이다. 신자 연락원들은 1919년 9월경부터 성당이 있는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그곳의 신부들을 만나 권고문을 전달하면서 임시 정부와 연락을 취하도록 권유하였다. 윤예원 신부는 그 해 9월 평양에서 온 2명의 신자로부터 임시 정부의 연락원이 되도록 권유를 받았고, 10월 25일에는 안악 매화동(玫花洞)의 신부들 모임에 참석하러 갔다가 거기서 임 필립보라는 청년으로부터 약 500장의 권고문을 전달받았다. 그 후 윤예원 신부는 몇 명의 동료 신부들과 수십 명의 신자들에게 구두 또는 편지로 임시 정부의 연락원이 되어 독립 운동에 참가하도록 권하였다. 11월에는 대구의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정 필립보를 통해 안공근이 보낸 편지를 받았고, 같은 무렵 의주의 서병익(徐丙翼)신부도 평양에서 우송되어 온 권고문을 받았다.
윤예원 신부의 독립 운동은 결국 탄로나고 말아 교구장 뮈텔 주교로부터 독립 운동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환속하든지 양자 택일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후 윤예원 신부를 비롯한 한국인 신부들의 독립 운동은 지하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후에도 독립 운동가로 일본 경찰에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유인즉 겉으로는 독립 운동을 상관하지 않고 있는 듯하나 내막인즉 비밀리에 서로 라틴어로 연락을 하고 있었고 또한 신자들을 시켜 비밀히 상해와 연락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 교우들이 독립에 관한 말을 하면 책망하고 벌을 주고 교회에서 내쫓기도 하였지만, 사실인즉 은밀히 독립 운동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국 독립 운동)
※ 참고문헌  朴殷植, 《朝鮮獨立運動之血史》, 서울신문사 출판국, 1946/ 崔南善, 《朝鮮獨立運動史》, 동명사, 1946/ Kendal, The Truth about Korea, San Francisco, 1919/ Mckenzie, Korea's Fightfor Freedom, London-New York, 1920/ H. Chung, The Case ofKorea, New York, 1921/《韓國獨立運動史》 2, 국사편찬위원회, 1966/ 《독립 운동사 자료집》4, 원호처, 1972/ 韓國國獨立運動史 資料集》 5, 국사편찬위 원회, 1975/《安岳事件과 三一運動과 나》, 兢虛傳記編纂委員會, 1970/ 崔奭祐,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 운동-3 · 1 운동을 중심으로>, 《敎 會史研究》 11집, 1996, pp. 37~58.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