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장서 논쟁

三章書論爭

〔라〕controversia de tribus capitulis · 〔영〕three chapters controver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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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의 신학자 3명과 그들의 저서로 인해 이루어진 신학 논쟁. 이 논쟁은 그리스도 단성설을 받아들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가 544년에 그리스도론에 대한 논쟁으로 분열의 위기에 처한 제국을 일치시키기위하여, 이미 죽은 몹수에스티아(Mopsuestia)의 주교 테오도로(Theodorus, 350?~428)와 치로(Cyus)의 주교 테오도레토(Theodoretus, 393~466) , 에데사(Edessa)의 주교 이바스(Ibas, 435~457) 등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이라고 단죄하고, 그리스도론에 관한 그들의 저서 내용을 단죄하는 칙령을 공포한 데서 발단되었다. 삼장서(三章書)란 이들 3명의 저자들(κεφάλαια)과 그들이 저술한 저서의 내용과 관련된 문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관련 신학자〕 테오도로와 문제의 발단 :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배척당한 이폴리나리우스주(Apollinarianismus)에 반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는 하느님의 위격과 인간의 위격이 있다고 인정한 다르소(Tharsus)의 주교 디오도로(Diodorus, ?~394?)의 수제자였다. 테오도로는 392년에 몹수에스티아의 주교가 된 후 스승의 신학과 전통 신학의 형식에 따라 '말씀' 과 완전히 일치한 그리스도론을 논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무런 반대도 받지 않았으며,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여 신성과 인성의 구분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가 죽은 후 그의 제자 아나스타시오(Anastasius)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의 초대를 받아 테오도로의 신학사상을 설교할 때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ς) 마리아 신앙을 거부하였는데, 네스토리우스도 이에 동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디오도로, 테오도로, 아나스타시오를 변호하였다. 그러자 에데사의 랍불라(Rabbula, +436)는 테오도로를 네스토리우스 이단의 창시자로 의심하였고, 431년에 열린 에페소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치릴로(Cyrilus, +444) 등의 제의로 네스토리우스 신학이 이단으로 단죄되면서 삼장서 문제가 발단되었다.
따라서 삼장서 문제는 네스토리우스 이단 논쟁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테오도로에 반대하면서 이에 개입한 콘스탄티노플의 프로클로(Proclus, +446)는 아르메니아인들에 의해 제기된 질문인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 관계에 대하여 안티오키아식의 구별을 거부하였고, 435년에는 자신의 저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내는 책》(Tomus ad Armenios)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적 일치를 주장하였다. 그는 테오도로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신학적 내용이 담긴 자신의 편지를 동봉하여 테오도로가 언급한 몇 가지 내용에 대하여 공식적인 단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요한(429~448)은 교회의 평화 속에 죽은 주교 즉 테오도로에 대해 파문하기를 거부하였다.
치로의 테오도레토 : 자신이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치로의 테오도레토는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요한의 요청으로 치릴로의 '12개 파문장(破門狀)' 에 대해 논박하는 저서를 저술하였다. 이를 통하여 테오도레토는 당시까지의 전통적인 신학을 재검토하고 평가하는 역사적인 작업을 하였다. 그는 우선 마리아의 '테오토코스' 를 주장하는 치릴로의 주장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거부할 위험이 있고, 강생한 '말씀' 안에 신성으로부터 인성을 구분하지 않은 아리우스(Arius, 250?~336) 이단의 징후가 있다고 생각하며 반박하였다. 이어 동방 교회의 수도자들에게 보낸 장문의 편 지에서도 치릴로에 대한 비판을 반복하였다. 테오도레토가 433년에 일치를 위해 많은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서명을 요구받은 것으로 보아 그가 받은 이교의 혐의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랜 주저 끝에 그는 일치 선언에 서명하였고, 저항하고 있는 주교들의 순명을 약속받겠다고 치릴로에게 알렸다. 그리고 447년경에는 에우티케스(Eutyches)와 그 동료들에 반대하여 《걸식 수도자 혹은 천(千)의 얼굴을 한 자》(Eranistes seu Polymorphos)를 출간하였다. 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설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다가 오히려 정반대의 오류에 빠질 정도였는데, 그는 치릴로의 후계자인 디오스코로(Dioscorus) 총대주교의 후원을 받아 이집트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테오도레토는 한 정통 신학자와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사람과의 대화 형식을 사용하여 당시까지의 모든 이단설과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을 대비시켜 논박함으로써 당시까지의 신학 논쟁의 유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고, 대화체의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였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황제의 강 요로 테오도레토는 449년에 열린 '에페소 강도 공의회'(Robber Council of Ephesus)에서 해임되었지만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 의해 복권되었다.
에데사의 이바스 : 에페소 공의회 이후 당시 에데사의 주교였던 랍불라가 안티오키아의 옛 학자들을 네스토리우스 이단설의 책임자로 공격할 때 이바스는 페르시아인 학교의 교사였다. 이바스는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어로 된 몹수에스티아 주교 테오도로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주해, 다르소의 테오도레토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반 치릴로인이고 네스토리우스주의자이며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통적인 위치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바스와 랍불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이바스가 마리(Mar)에게 "페르시아인"이라는 편지를 쓴 것도 좋지 않은 관계의 한 요인이
되었는데, 이 서한은 네스토리우스를 변명하지 않으면서도 치릴로의 그리스도론적인 형식을 드러냈고, 몹수에스 티아의 테오도로의 명성을 강력하게 변호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이바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프로클로에게 고발당하였다. 435년에 랍불라가 죽은 후 이바스는 그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448년에 또다시 고발당하였고, 일치 선언과 에페소 공의회에 대한 동의가 선언되었던 티로(Tiro)에서 449년 2월에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같은 해 4월 에데사에서 새로운 소송에 휩쓸려 안티오키아로 추방당하였다가 그 해 8월 22일 에페소 강도 공의회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칼체돈 공의회(451)의 제10 회기와 제 11 회기에서 이바스 사건이 다루어졌는데, 교황 사절들은 마리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들 가운데 관계된 기록을 읽어 본 다음 시리아 주교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이바스에게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한다는 것을 선언하게 한 후 주교좌로 복권시켰다. 테오도로와 이바스 문제는 결정적으로 칼체돈 공의회에서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Sevens, 512~518) 주교가 다르소의 디오도로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를 네스토리우스 이단의 창시자로 지목하면서 다시 단죄를 요구하자, 520년경에 위의 3인의 명예 회복을 위한 시위가 치로에서 일어나면서 삼장서 논쟁은 재발되었다.
〔논쟁의 과열과 교회의 혼란〕 가빠도기아 지방 가이사리아의 주교로서 오리제네스설에 호의적이었던 아스키다의 테오도로(Theodorus Askidas)도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를 파문하고 그를 찬양하는 글들을 단죄하도록 황제에게 제안하였다. 533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주도로 열린 종교 회의에서 이들은 테오도레토와 이바스 같은 네스토리우스 이단 혐의가 있는 자들을 받아들인 칼체돈 공의회를 비난하였고, 황제는 이 조언을 받아들여 544년 겨울에 삼장서를 단죄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현재 원본은 분실되어 일부 내용만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 결정을 아무도 합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총대주교들과 주교들은 서명을 강요 받았다. 536년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을 맡은 멘나(Mennas, 536~552)는 로마 교황좌가 이 칙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서명을 취소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리고 다른 주교들은 해임을 면하기 위해 각각 서명하였다. 그러나 궁궐 주재 교황 대리인 스테파노(478~480)는 삼장서 단죄 서명자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황제의 강요로 비질리오 교황(Vigilius, 537~555)은 545년 11월 22일에 콘스탄티노플행 배를 탔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칠리아에 오랫동안 체류하다가 547년 1월 25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그곳에 몇 개월 동안 억류되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자신이 한 서명을 취소하기를 거부한 멘나 총대주교와의 접촉을 중단하였으나, 마침내 황제의 원의에 양보하여 그 해 6월 황제에게 두 통의 친서를 보내 삼장서를 단죄할 용의가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이 단죄는 548년 4월 11일 파스카 토요일 <판결문>(Judicatum)이라는 문서에서 확인되었다. 여기에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개인과 그의 모든 작품들, 이바스의 마리에게 보낸 편지, 참된 신앙과 치릴로 성인의 파문장에 반대하여 쓰여진 테오도레토의 저술들 역시 단죄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단죄하되 당사자들을 용서한 4대 공의회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칼체돈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사면된 이바스와 테오도레토에 반대하여 기소하는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 비질리오의 칙령은 여러 교회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일리리룸(Ⅲyricum)에까지 확대되었다. 달마시아의 주교들은 <판결문>에 반대하였고, 갈리아에서도 반발하였으며 심지어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레파라토(Reparatus)가 주재한 아프리카의 한 교회 회의에서는 교황을 파문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삼장서 단죄는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는 사람들의 주장을 묵인한 것이며, 칼체돈 공의회의 권위를 모욕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교회와의 통교 안에서 죽은 주교의 단죄는 전례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551년 7월에 황제는 <신앙 고백>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론적인 교의를 드러내 보인 일종의 교서로서 13조항을 파문하였는데, 그 가운데 마지막 세 가지는 삼장서에 관한 것이었다. 553년 5월 14일에 교황은 교황령(constiutum)을 발표하여 테오도로가 쓴 저서의 많은 부분을 단죄하였으나, 삼장서 문제의 당사자 세 사람에 대해서는 단죄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며칠 전에 교황이 참석하지 않은 채 열린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삼장서를 단죄하였는데, 교황은 이 공의회를 553년 12월 8일에 추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방 교회 특히 아프리카의 일리리킴 교회에서 격렬하게 반발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삼장서 단죄를 강제로 승인하게 하였고, 이탈리아의 아릴레이아(Aquileja) 관구는 로마 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이탈리아를 침입한 롬바르드 족은 정치적인 이유로 이 이교(離敎) 상황을 이용하려고하였다.
그 후 펠라지오(Pelagius)는 <반박>(Refutatium)과 <삼장서 옹호>(In defonsione Trium Capitulorum)라는 글로 교황 비질리오를 공격하였다가 수감되고 말았다. 그러나 훗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가깝게 지내다가 비질리오 교황이 사망한 후 황제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로마의 극심한 반대에 직면한 펠라지오 1세 교황(556~561)은, 5차 공의회는 거명하지 않은 채 4대 세계 공의회의 결의에 대한 자신의 동의를 고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이바스와 테오도레토를 '존경하올 주교들' 이라고 칭하였다. 삼장서 논쟁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와 다른 교황들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교황 세르지오 1세(Sergius Ⅰ, 687~701) 때인 689년경에야 겨우 수습되었다.
〔평 가〕 오랫동안 종교적 일치를 희망하여 황제 칙서로 교의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한 황제의 불합리한 요구가 오히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이러한 행위는 이단으로 인한 종교적인 분열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정치적인 동기 외에 종교적인 문제도 황제가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교황 비질리오의 동요가 더하여져서 성좌의 위신마저 어느 정도 실추되었으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또한 교의적인 영역에서 네스토리우스 이단설의 모든 혐의를 멀리하고 성 치릴로와 칼체돈 공의회의 정신을 살리려고한 신칼체돈 신학의 합법적인 승인은, 결국 테오도로와 그 변호인들에 반대하는 일련의 소송 즉 삼장서 논쟁으로 인해 흐려지고 말았다. (→ 그리스도 단성설 ; 동방교회 ; 테오도로, 몹수에스티아의)
※ 참고문헌  김성태, 《세계 교회사》 Ⅰ, 성바오로출판사, 1986, pp. 265~275/ E. Amann, Trois Chapitres, Dictionaire de théologie catholique 15, pp. 1868~1924/ Hans-Georg Beck, The Controversy over the Three Chapters and the Fifth General Council, History ofthe Chuch Ⅱ , ed.by H. Jodin, trans. by A. Biggs, 1980, pp. 450~456/ K. Bihlmeyer · H.Tuchle, Storia della Chiesa I , trad. G. Dal Ri · A. Cetto, Broscia, 1973, pp. 348~355/ E. Cavalcanti, Teodoreto di Ciro, 《DPAC》 2, pp. 3371~3374/M. Cristiani, Brève Histore des Hérésies(김종 역, 《이단 소사》, 가톨릭 출판사, 1956, PP. 53~66)/ A. Mayer, Tre Capitoli, 《EC) 12, pp. 456~460/J.M. Sauget, Ibas, 《DPAC》 2, pp. 1735~1736/ M. Simonetti, Severo di Antiochia, 《DPAC》 2, pp. 3507~3508/ 一, Teodoro di Mopsuestia, (DPAC》 2, pp. 3382~3386. [金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