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대구시 서구 상리동 1구 559 소재. 비산동(飛山洞) 본당 관할인 새방골〔新坊谷〕 공소에서 1963년 12월 14일에 상리 준본당으로 설정되었다가 1974년 1월 6일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원죄 없으신 성모. 관할 구역은 상리동 전 지역. 〔교 세〕 1968년 446명, 1974년 616명, 1979년 803명, 1983년 357명, 1988년 416명, 1993년 437명, 1997년 410명. 〔역대 신부〕 준본당 시기 : 초대 권영조(權永兆) 마르
코(1963. 12~1965. 11), 2대 조상익(趙祥益) 베드로(1965. 11~1967), 3대(겸임) 박창수(朴昌壽) 요한(1967~1969. 8) , 4대(겸임) 이종흥(李鍾興) 크리산도(1969. 8~1970. 11), 임시(겸임) 곽길우(郭吉祐) 베드로(1970. 11~1971. 11), 임시(겸임) 김규태(金圭泰) 디모테오(1971. 11~1974. 1). 본당 승격 후 : 초대 정순재(鄭淳在) 베드로(1974. 1~1975. 1 , 2대 김경식(金烱式) 보니파시오(1975. 1~1976. 3), 3대 이대길(李大吉) 시메온(1976. 3~1977. 7), 4대 임청(任淸) 베드로(1977. 7~1979. 11), 5대 김규태(1979. 11~1984. 1), 임시 이종흥(1984. 1~7), 임시 권혁시(權赫時) 모세(1984. 7~1985. 10), 임시 허용(許龍) 요셉(1985. 10~1986. 1), 6대 나원찬(羅元燦) 바오로(1986. 1~1987. 6), 임시 김용길(金容吉) 바오로(1987. 6~1988. 7), 7대 김정환(金正煥) 미카엘(1988. 7~1989. 4), 임시 박병원(朴炳元) 필립보(1989. 4~7), 8대 박원출(朴元出) 토마스(1989. 7~1992.7), 9대 김두찬(金斗燦) 요한(1992. 7~1993. 3), 임시 이종건(李鍾健) 시메온(1993. 3~11), 임시 이종흥(1993. 11~12), 10대 박덕수(朴德洙) 스테파노(1993. 12~1995.8), 11대 박영식(朴永植) 야고보(1995. 8~현재).
〔전사와 공소 시대〕 상리동 지역은 1860년 경신박해 때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산리(東明面 松山里) 어골에 살던 이재영(李載榮, 고스마) 일가가 이곳 새방골로 피신해 온 후 차츰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재영은 아내 김마리아가 신자임을 알고 배교할 것을 강요하다가 오히려 아내의 신앙심에 감화되어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칠곡 신나무골(枝川面 蓮花里)에 거주하면서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는 1887년 3월에 보좌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긴 뒤 새방골 이장언(李章彥,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곧바로 이곳에 초가 한채를 매입하고 임시 성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로베르 신부는 4년 후인 1891년에 대구 감사에 의해 추방되는 이른바 '대구교안' 을 겪게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새 전교의 터전을 마련한 대구 교회는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지만, 곧 로베르 신부가 대구로 귀환함으로써 오히려 그 위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12월에 로베르 신부가 거처를 대어벌(待御伐, 현 대구시 중구 仁橋洞) 정규옥(鄭圭鈺, 바오로) 승지의 사랑채로 옮김으로써 새방골은 대구(현 계산동)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신부가 이임한 후에도 새방골 공소의 교세는 꾸준히 증가하여 1892년에 96명이었던 신자수가 1909년에는 170명에 이르게 되 는데, 이는 당시 대구 지역의 6개 공소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1910년에 새방골 공소 초대 회장 이규성(李圭成, 다미아노)은 현재의 부지 190여 평을 매입하여 강당을 마련하였으며, 1925년에는 110평의 부지를 추가 매입한 후 강당을 개축하였다. 이에 앞서 초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1915년 2월 초에 이곳에 교구 별장을 마련하려다가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취소하였었다. 그 후 1927년 11월 1일자로 비산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새방골 공소는 이곳으로 이관되었다.
〔준본당 설정과 본당 승격〕 일제 시대에 크나큰 변화없이 유지되어 오던 새방골 공소는 6 · 25 한국 전쟁 후인 1955년에 종각을 설치하고 성모 성심회를 설립하였으며, 1963년 11월 20일에는 45평 규모의 강당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새방골 공소는 월배(月背) 본당에서 재임하다가 1962년 10월부터 휴양을 하게 된 권영조 신부가 이듬해 12월 14일 부임해 옴에 따라 '상리 준본당 으로 설정되었으나, 그가 1965년 11월에 사망함에 따라 휴양 중이던 조상익 신부가 1967년에 부임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교구 경리와 사목국장으로 재임하던 박창수 신부, 이종흥 신부, 곽길우 신부, 김규태 신부 등이 이곳 상리 준본당을 겸하여 사목하였다. 특히 김규태 신부는 본당 승격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재임 중에 사제관(현 수녀원)과 부속 건물을 신축하였다.
1974년 1월 6일 상리 준본당이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정순재 신부는 성당 제의실을 신축하였고, 4대 주임 임청 신부는 1977년 12월 18일에 성모상 축복을 비롯하여 성당 보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본당 승격 이후에도 주임 신부들이주로 휴양 또는 겸직 신부가 임명되어 잠시만 재임하는 경우가 많아 본당이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대 주임 김규태 신부 때인 1983년 1월 25일에 관할 공소인 죽전동(竹田洞)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시켰으며, 1988년 7월 7일에는 1986년 9월 30일에 매입해 두었던 인근의 부지(132평)에 70평 규모의 2층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박덕수 신부가 10대 주임으로 부임 한 후 본당은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후 교구에서는 본당의 발전을 예상하고 1995년 4월에 성당 입구의 부지 132평을 매입하여 성당 신축을 준비하도록 하였는데, 최근 들어 이현(梨峴) 공단의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전교 활동을 하게 되면서 본당 공동체도 점차 활성화되어 가고 있다. → 대구대교구 ; 로베르, 아실 폴 ; 비산동 본당 ①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Ⅰ, 천주교 명동 교회, 1986/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총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天主教大邱大教區史 編纂委員會편, 《大邱本堂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 崔正福 編著, 《大邱天主教會史》, 대구 계산동 교회, 1952/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 대건출판사, 1989/ 최석우, <대구 본당의 설립과 정착 과정>, 《神父全達出會長 華甲記念論叢》, 매일신문사, 1992/ 《빛》 163호(1996. 11), pp. 44~46. [편찬실]
상리동 본당
上里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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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