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재상서>

上宰相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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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재상서

<상재상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 1839년에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이 작성하였으며, 본서와 별첨의 우사(又辭)로 구성되어 있다. '상재상서' 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재상은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이지연(李止淵)을 가리킨다. 총 3,644자로된 짧은 글이지만, 천주교 교리뿐만 아니라 유학 사상과 벽이단(闢異端)의 논리를 바탕으로 박해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호교론과 신앙의 자유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작자와 작성 배경〕 정하상은 1795년(정조 19)에 경기도 광주의 분원(分院, 남종면 분원리)에서 순교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류소사(柳召史, 체칠리아) 성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부친은 서울을 오가며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도와 교회 지도층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어 명도회(明道會)의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유명한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하상이 교회의 밀사요 지도층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816년 이후였다. 이에 앞서 그는 무산(茂山) 유배지에서 생활하던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학문과 교리를 배웠으며, 조선 대목구 설정 이후인 1833년 12월에는 중국인 유 파치피코(중국명余恒德) 신부를, 1835년 12월에는 프랑스인 모방(P. Maubant, 羅) 신부를 조선에 영입하였다. 그리고 1837년 11월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를 영입한 뒤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고, 이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서울 후동(后洞)의 주교관을 지키고 있다가 6월경에 체포되었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견하고 <상재상서>를 미리 작성하였으며, 체포된 직후에 종사관을 통해
관장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뒤 8월 15일(양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상재상서>를 작성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기해박해였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교리 내용들은 집안의 오랜 신앙 전통은 물론 모친의 가르침, 조동섬의 학문과 교리 지식, 유 파치피코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가르침 등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또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필사되어 전해지던 부친의 《주교요지》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정하상 자신이 교회 지도층으로 활동하면서 얻은 지식이나 신학 교육을 통해 배운 새로운 학문과 교리 또한 <상재상서>의 작성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과 의미〕 <상재상서>는 크게 본서와 별첨의 우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서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 첫 번째 부분은 처음부터 "천주교 도리가 그릇되지 않다는 것을 간략히 말씀드리겠다" (略言其道理之不非)고 한 내용까지로 <상재상서>의 저술 동기를 설명한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정하상은 여기에서 맹자(孟子)의 벽이론(闢異論)을 근거로 삼아 "옛 성인들은 이치에 맞고 올바른 도리라면 비록 나무꾼의 말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취하였다" 고 하면서 천주교 박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두 번째 부분은 "천주교 신앙은 지극히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可謂至全矣)고 한 내용까지로, 천주교 교리가 이치에 맞고 올바른 도리임을 주장하면서 호교론을 내세운 본론 부분이다. 여기에는 천주의 존재와 속성, 인간의 본분과 십계명(十誡命) 천주교의 영혼관 즉 영혼 불멸설, 천당 · 지옥론, 천주교의 종교적 특성 등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이를 위해 정하상은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에 들어 있는 교리 내용은 물론 성서 구절과 동양 전통의 상제관(上帝觀)을 인용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양명학(陽明學)의 양지설(良知說)을 바탕으로 상제 즉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성(至聖) · 지공(至公) · 지정(至正) · 지진(至眞) · 지전(至全)한 다섯 가지 특성을 갖춘 천주교 신앙이 유일무이한 종교로서 올바른 도리가 된다는 점을 이해시키려 하였다. 특히 이 점을 사도 신경(使徒信經)의 가르침 즉 천주교회는 유일하고, 거룩하며, 공번되고, 전승되었다는 네 가지 특성과 비교해 본다면, 그의 교리 지식이 얼마나 해박하였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슬프다. 금과 옥을 가리켜 억지로 기와나 자갈이라고 한다" (噫 指金玉而强謂之瓦礫)고 한 부분에서 본서 끝까지로, 천주교 비판 논리를 변증하고 신앙의 자유를 호소한 결론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정하상은 먼저 천주교의 윤리관에 대한 일반적인 지적, 즉 무부무군(無父無君) · 통화통색(通貨通色)의 종교라는 비판에 대해 십계명 중 제4 · 6 · 9 계명의 가르침을 들어 역으로 비판하였다. 그런 다음 중국의 예를 설명하면서 천주교의 교리가 옳으므로 서양의 종교라고 하여 배척해서 만은 안되며, 천주교 신자들 또한 조선의 백성들이므로 금령을 거두고 신앙의 자유를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것이 곧 <상재상서>를 작성하게 된 궁극의 목적이었다.
이어 그는 별첨에서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이래 천주교를 비판하는 표적이 되어 온 제사 폐지 문제를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십계명 중 제4 계명에 나타난 천주교의 효론(孝論)을 부연 설명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정하상은 다시 한번 조선의 전통적인 제사를 헛되고 거짓으로 가득한 예식(虛假之禮)이라고 비판하면서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로부터 죄를 얻을 수는 없다" 고 자신의 신앙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정하상은 이와 같이 <상재상서>를 통해 조선의 전통 지식인과 박해자들의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역 서학서와 마찬가지로 상제론이나 양지설을 인용하면서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을 견지하고자 하였으며, 어느 일면에서는 동양의 윤리관을 존중하려고 고심한 흔적도 엿보인다. 바로 이러한 점은 적응주의(適應主義)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통 유교 사상과의 합일 또는 교리의 토착화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 교리 설명이나 주안점은 《주교요지》의 내용과 아주 유사하며, 전통의 제사를 비판한 점이나 신앙심을 드러낸 부분은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진술과도 부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열정과 교리에 대한 이해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원본과 전사본〕 정하상이 체포된 후 <상재상서>는 재상에게까지 보고된 후 형조나 의금부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또 이 글이 이만채(李晩采)의 《벽위편》(闢衛編)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였든 일반인이나 신자들이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나 현재 그 원본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조정에서는 10월 18일에 검교제학(檢校提學) 조인영(趙寅永)이 한문본과 한글본으로 제진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천주교 교리를 비판하고 박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이 글이 <상재상서>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상재상서>는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서명이 들어 있는 전사본을 영인한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이 블랑 주교의 전사본은 모두 26쪽으로 방점이 찍혀 있는데, 1887년에 홍콩의 나자렛 인쇄소에서 정하상의 약전을 첨부하여 활판으로 간행하였고, 1970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다시 영인본으로 간행하였다. 그 내용은 이만채가 《벽위편》에 수록한 것과 동일하다. 또 다른 <상재상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시복 자료본이다. 이것은 1882년 이후 조선 대목구 안에서 개정된 교회 재판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훗날 시복 자료로 교황청에 제출되었음이 확실하다. 당시 시복 재판의 서기를 맡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는 그에 앞서 이 자료를 1885년 4월 25일에 다시 12쪽으로 전사했는데, 교회 재판 당시의 증언 내용들을 수록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권4, 79장)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전사본은 블랑 주교의 전사본과 군데군데 출입이 있다. 다만 이 두 가지 전사본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 필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정하상)
※ 참고문헌  《上宰相書)(전사본 및 활판본)《《가톨릭 사전》 金益鎭 역, 〈上宰相書〉, 《가톨릭 청년》 12권 6~8호(1958. 6~8)/ 崔鍾萬, 〈丁夏祥의 上宰相書 研究>, 《神學展望》 44호(1979. 봄), 대건신학대학전망 편집부, pp. 65~83.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