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이촌2동 199-1번지) 남쪽 150~200m 지점에 있다. 일부에서는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새남터' 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얕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1468년에는 모반 죄인의 판결을 받은 남이(南怡) 장군이 이곳에서 처형되기도 하였는데, 그러다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서소문(西小門) 밖 대신에 성직자들이나 지도층 신자들의 처형 장으로 이용되었다.
〔박해와 새남터〕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였다. 즉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 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 5월 31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와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가 8월 14일(양 9월 21일)에 주문모 신부처럼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어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에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7월 26일
(양 9월 16일)에,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7월 29일에 역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트니에르(de Bretenières, 白), 볼리외(Beaulieu, 徐沒禮), 도리(Dorie, 金), 프티니콜라(Petinicololas, 朴), 푸르티에(Pouthie, 申妖案) 신부 등이 1월 21일(양 3월 7일)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3월 11일에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老故山,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옮겨졌다가 1843년에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와서(瓦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 남쪽)에 일시 안장되었다가 안성 미리내로 이장된 반면에 현석문의 시신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에서 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거두어진 정의배를 제외하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7명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와서에 안장되었다.
〔순교자 현양과 사적지 조성〕 이처럼 새남터에서는 모두 1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주문모 신부 이외의 순교자 13명은 훗날 '하느님의 종' 으로 선정되어 시복 · 시성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중 기해 · 병오박해의 순교자 5명은 1925년 7월 5일에,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프티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를 제외한 6명은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남터의 순교자 중에서 모두 11명이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됨으로써 이곳은 중요한 순교 성지가 되었다.
이에 앞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시복 · 시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선 와서에 안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7명의 시신을 1899년 10월 30일에 발굴하여 용산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다가 다음해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하였다. 또 1901년 10월 2일에는 삼성산에 안장되어 있던 기해박해 순교자 3명의 시신을 발굴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해 11월 2일에 다시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미리내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1차로 1886년에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 5월 21일에는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새남터 사적지를 중시해 왔으며, 1890년에는 그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6년 9월 16일에 발족을 본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가 중심이 되어 다시 이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50년에 현재의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6 · 25 한국 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 7월 8일에는 새남터에 '가톨릭 순교 성지' 라는 순교탑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이하게 된 1981년에 '새남터 본당' 이 설립되었고, 1987년 9월 12일에는 이 본당의 사목을 담당해 온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 한국 성인)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推案及鞫案》/ 《日 省錄》/ 捕盜廳騰錄》 《달레 교회사》/ Adrien Launay, Memorial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éres, 2e partie( 1658~1913), Paris, 1916/ 《경향잡지》 1061호(1956. 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299~300. [車基真]
새남터
沙南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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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었던 새남터(왼쪽)와 1900년경의 새남터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