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모르 학파

學派

[프]Congregation de Saint Maur(Mauristes) · [영]Congregation of Saint Maur(Maurist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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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프랑스에서 학문과 신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성 베네딕도 수도회 생 모르 연합회 소속 수도승들의 학문 활동 및 경향.
[생 모르 연합회의 탄생과 발전〕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파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는 것으로 36년에 걸친 프랑스 종교 전쟁이 막을 내리자,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활기 찬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변화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이 공포된 것은 1615년이었지만,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이미 열성적인 신앙과 경건한 삶을 통해서만이 프로테스탄트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많은 수의 수도원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 생활을 재편성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더욱이 당시 로렌(Lorraine) 지방에 있던 생 반느(Saint-Vanne) 수도회 수도자들은 1613년부터 프랑스 내의 몇몇 수도원에서 개혁을 도입하여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오랫동안 왕의 측근으로 행세해 왔던 고위 성직자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왕의 영향력으로부터 다소 자유롭고 새로이 등장한 고위 성직자들에게 순종하는 수도원이 되기를 바랐다.
파리에 있던 클뤼니(Cluny)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베나르(Laurent Bénard, +1620)의 활동에 힘입어 당시의 국왕 루이 13세는 1618년에 새로운 프랑스 성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설립을 허가하면서 이 연합회의 수호 성인을 성 마우로(St. Maurus)로 결정하였다. 성 마우로가 프랑스에서 성 베네딕도의 정신과 회칙을 널리 전파하였다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프랑스의 모든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이 새로운 연합회에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상 생 모르 연합회의 진정한 창시자는 1630년에 총아빠스(archiabbas)가 된 타리스(G. Tarisse, 1585~1648)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622년에 추기경이 된 리슐리외(A.J. du Plessis Richelieu, 1585~1642)는 여러 직위들을 겸임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는 대내적으로는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일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의 위 대함을 널리 펼침으로써 루이 13세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훗날 그는 "나의 임무는 위그노파를 분쇄하고, 거물급 인사들의 자만심을 꺾으며,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만들며 국왕의 이름을 가능한 한 외국에까지 드높이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624년에 왕실 회의 의장에 취임한 그는, 4년 뒤 직함을 총리(principal ministre)로 변경하였으며 1629년에는 클뤼니 수도원 원장의 권한까지 차지하였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학문적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클뤼니 연합회와 생 모르 연합회를 합병시키려 하였지만 1642년에 그가 사망함으로써 두 연합회는 생 모르 연합회의 총아빠스였던 타리스가 원했던 대로 원래의 형태로 분리된 채 남게 되었다. 그 후 생 모르 연합회는 클뤼니 연합회와의 신학적 논쟁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여 주었고, 신학적 입장의 차이를 비롯하여 각종 견해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수많은 옛 프랑스 수도원들의 가입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생 모르 연합회는 191개의 수도원과 교회를 가진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생 모르 연합회는 참사회의 결정을 통해 권한을 행사하였다. 3년마다 고위 성직자들과 6개의 자치 수도원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이루어지는 이 참사회에서는, 연합회의 모원인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 Prés) 수도원 총아빠스를 선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자치 수도원들을 관리하는 아빠스들을 임명하였다. 생 모 르 연합회에서 고위 성직자는 과거의 수도원 관습과는 반대로 한시적인 직위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일반 수도자들은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적인 관습의 시행으로 인해 생 모르 수도승들이 성 베네딕도의 정신을 본받아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데 방해를 받지는 않았다.
〔학문 활동과 작품〕 당시 수도회 즉 오라토리오회나 예수회의 볼랑디스트(Bollandistes), 포르루아얄(Port-Royal) 수도회 등에서 고대와 근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열성적 연구 활동을 하였던 상황에서 생 모르 연합회는 가장 소중한 업적을 남겼다. 오라토리오회와 포르루아얄 수도회는 예수회와 마찬가지로 주로 교육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교육상의 경쟁에 따라 신학적인 차이가 더해졌다. 반면에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원을 받아 개혁적인 조직을 갖춘 생 모르 연합회에 결집된 대부분의 수도원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몇몇 수도원들은 1천 년 이상 지속되어 온 경우도 있었는데, 이 수도원들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괄목할 만한 정도의 귀중한 고문서들과 수사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로 하여금 고대의 문학이나 철학 작품을 탐구하게 하고 프로테스탄트들로 하여금 성서적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였던 지적 운동이 생 모르 연합회에서도 나타났다. 총아빠스 타리스는 당시 수도자들이 노동의 원칙에 의거한 농사일에 헌신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작을 주고 있을 뿐만 아 니라 학문을 통해 교회에 봉사할 수 있는 작업인 고대 서적 필사에도 더 이상 열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수도자들로 하여금 연구 활동에 전념할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였으며, 나아가 생 모르 연합회 내에 일군의 학자들을 결집시켜 장기간에 걸쳐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타리스는 신학, 교회법, 교계의 역사, 각종 문헌들의 복원 · 정리 및 지속적인 수집을 통한 깊이 있는 연구를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토대위에서 생 모르 연합회 수도승들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이 1650~1789년 사이에 나타나게 되었다.
학문 연구 업적과 방법론 : 이 기간 동안에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몇 명의 위대한 학자들, 즉 《이삭 줍기》(Spicilegium)의 편찬자 다세리(Luc d'Achery, 1609~1685) , 고문서학의 기초를 마련한 마비용(Jean Mabillon, 1632~1707), 그리스 고문서학의 창시자 몽포콩(Bernard de Mont-faucon, 1655~1741) 등의 업적은 모두 이 연합회를 통하여 탄생되었다. 역사학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교회의 역사를 통해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다루었던 그들의 저작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특히 이러한 학문 활동을 통하여 교부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648년에 다세리가 영국의 고위 성직자였던 랑프랑(Lanfranc, 1005~1089)의 저작들을 편집한 이후 교부학 분야의 작업은 마비용과 몽포콩에게 계승되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로마 시대의 그리스도교 작가였던 테르툴리아노, 바실리오, 안셀모, 베르나르도, 치프리아노,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아타나시오, 이레네오, 요한 그리소스토모, 오리제네스, 교황 그레고리오 1세 등의 저작들이 편집되었다.
생 모르 수도승들은 일반사나 지역사 분야 역시 간과하지 않았는데, 방법론적 또는 인식론적으로 훌륭한 고증학자들이었던 그들은 백과 사전적인 체계를 지닌 위대한 고증학적 연구 성과들을 발표하였다. 마비용은 베네덕도회 수도자들의 계율에 관한 책 《베네딕도회 연대기》(Annales Ordinis Sancti Benedicti, 1703~1713)를 총 6권으로 출간하였는데, 이 작품에서는 12세기까지의 내용만 다루었다. 또한 세볼(Scevole)과 드니 드 생트 마르트(Denis de Sainte-Marthe)에 의해 시작되어 '왕립 금석학 아카데미' 가 계승하여 완성한 《그리스도교적 갈리아》(Gallia christiana, 1695~1856)는 프랑스 전국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의 명단을 전기적 소개를 곁들여 수록하고 있으며,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였던 프랑스의 모든 저자들에 대한 총람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문학사》(Histoire littéraire de la France)는 1733년에 리베(Rivet)가 저술을 시작하여 '금석학-문학 아카데미' (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에 의해 계승 완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생 모르 수도승들은 각 지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 특히 기엔느(Guyenne), 가스코뉴(Gascogne), 피카르디(Picardie), 투렌(Touraine), 노르망디(Normandie), 브르타뉴(Bretagne)의 역사 및 고대 골(Gaule)족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생 모르 수도승들의 학문 연구 방법론은 유명한 논설들을 통해서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고증학이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귀결된다. 1681년에 발표된 마비용의 《고문서학)(De re diplomatica, 전 6권)은 갖가지 문헌들에 대한 비판 법칙들을 정립한 것인데, 이 책은 타생(Tassin)과 투스탱(Toustain) 공저인 《고문서학 신론(新論)》(Nouveau Traité de dipolomatique)과 클레망(Clement)의 《연대를 확인하는 기술》(Art de vérifier les dates)에 의해 보강되었다. 몽포콩은 자신의 저작인 《그리스 고문서학》(Palaeographia graeca, 1708)을 통해 동양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프랑스 군주 정치의 유물》(Les monuments de la monarchie frangaise, 1729~1733, 전 5권)과 《유물 도해 주석》(L'Antiquité expliquée et représentée en figures, 1719, 전 10권 )이라는 저작을 통해 거의 접할 수 없거나 평가 절하되었던 수많은 예술 저작들을 소개하였다.
국가와의 관계 및 말로(末路) : 프랑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생 모르 수도승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정부의 정책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루이 14세 때 국무 대신이었던 르 텔리에(Michel Le Tellier, 1603~ 1685)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는 프랑스의 외교 정책 수립에 필요한 각종 문서들을 유럽 전역에서 수집해 올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를 기초로 생 모르 연합회는 17세기 후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생 모르 연합회에서는 보쉬에(J.B.Bossuet, 1627~1704) 추기경, 플뢰리(Fleury) 추기경, 부르봉(Bourbon) 공작 등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비잔틴 연구자인 동시에 사전 편집자였던 강주(Charles de Fresne Cange, 1610~1688)나 발뤼즈(Etienne Baluze) 등과 같은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있었으며, 독일 철학자인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 등 유럽 각국의 학자들과도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
그러나 대규모의 고증학 작업실을 보유한 생 모르 연합회는 프랑스 대혁명 전의 구제도(Ancien Régime)하에 서 수많은 수도원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생 모르 연합회의 융성은 웅장하고 화려한 고전적 건축물을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데, 이 건축물들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상당히 다양한 형태의 운명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특히 18세기에 생 모르 연합회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경쟁자들과 벌인 신학적 논쟁은 생 모르 연합회를 약화시키고 많은 불이익을 가져다 주는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 총아빠스였던 세브뢰(Ambroise Chevreux)는 다른 여러 수도승들처럼 1792년 9월에 파리에서 피살되었다. 살아 남은 수도승들은 수많은 장서들과 유물들을 보존하였으며, 몇몇 수도승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계속하였고 때로는 예기치 않게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수도회를 재건하려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비판과 평가〕 생 모르 연합회는 17세기 종교적 학문 연구 활동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수도회 중의 하나이다. 당시의 학자들은 2세기 동안 생 모르 수도승들에 의해 편찬된 저작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생 모르 수도승들이 성 아우구스티노의 저작들을 편집하는 것에 반대하고 생 모르 수도승들 고유의 견해를 편집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교황들은 이 신학자들의 지적에 반대하여 생 모르 수도승들의 작업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트라피스트회 대수도원장이었던 랑세(Ammand-Jean Le Bouthillier de Rancé)는 수도자의 계율이 고증학적 연구와는 양립할수 없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또 다른 비판을 하였는데, 이 는 모호한 비판이다. 왜냐하면 설사 일부 문맹의 수도자들이 성덕(聖德)에 도달할 수 있으며 고증학적인 연구를 통해 많은 오류들을 예방할 수 있음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수도자들의 무지와 태만은 지적인 작업을 과도하게 선호하는 것보다 오히려 수도원들을 퇴폐에 이르게 하는 더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 마비용 ; 몽포콩 ; 교회사학 ; 성인 전기학)
※ 참고문헌  《EU》, Thesaurus~Index, 1993, pp. 3090~3091/ B. Barret-Kriegel, Mauristes, André Burguiere(sous la direction de), Dictiomaire des Sciences historiques, Paris, P.U.F. 1986, pp. 446~4471 Jean Carpentier et al., Histoire de France, Paris, Ediitions du Seuil, 1990(주명철 역,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 1991).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