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제, 피에르

Singr,Pene(1910~1992)

글자 크기
7
피에르 생제 신부.
1 / 3

피에르 생제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한국명은 성재덕(成載德) . 세례명은 베드로. 1943년 12월에 백동(柏洞, 현 혜화동) 본당에서 '서울 성가 소비녀회' 를 창설하였으며, 1935년 이래 50여 년 동안 본당 사목과 수녀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생 애〕 1910년 9월 13일 프랑스 북부 에덩(Hesdin) 지방에서 13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9세 때 생 베르탱(St. Bertin)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는 이 무렵부터 본당의 보좌 신부에게서 감화를 받아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소규모 피혁 공장을 운영하던 그의 부모는 자녀들 중에서 수녀 2명, 동정녀 2명, 사제 1명을 탄생시켰을 정도로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28년 9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한 생제는, 1935년 7월 7일 사제로 서품됨과 동시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베트남과 중국을 거쳐 그 해 11월 1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약 6개월 동안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어와 풍습을 익힌 생제 신부는 1936년 4월 30일 합덕 본당의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8년 6월 1일 제물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의 보좌를 거쳐 이듬해 7월 백동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 무렵 한국 사회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에 생제 신부는 불우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고아 · 전사자 등이 급증할 것을 예상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줄 수녀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뜻에 따라 1943년 12월 25일 김청자(루치아)와 김충순(바르바라)이 순명 서약을 하면서 서울 성가소비녀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생제 신부는 당시 사제수의 부족으로 수녀회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지 못한 채 계속 백동 본당의 사목을 맡아보아야만 하였다. 한편 그는 1945년 파리에서 열린 유엔(UN) 총회에서 한국측 수석 대표인 장면(張勉, 요한)을 도와 한국이 독립을 승인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에 대전 논산(論山, 현 부창동)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고 이곳에서 사목하면서 1958년 8월에 마산리(馬山里, 현 연무) 본당을 분리 · 신설하였으며, 1961년 10월 11일에는 성당을 증축(237평)하였다.
1962년 2월 요양차 본국으로 떠났다가 1964년 한국에 재입국한 생제 신부는, 그 해 7월 홍산(鴻山) 본당 주
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1969년 12월 29일 서울 성가 소비녀회의 지도 신부로 임명되었고, 이후 수녀원 내 사제관에 거주하면서 소비녀의 영성을 수녀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12월 19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1985년 9월 13일에는 사제 서품 및 한국 진출 금경축을 맞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6년여에 걸친 투병 생활을 하다가 끝내 이를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하여 포천 수녀원 묘지에 묻혔다.
〔선교 활동〕 생제 신부의 선교 활동은 본당 사목 활동과 수녀회 창립 활동으로 구분된다. 본당 사목 활동은 1936년부터 1969년까지 30년 간 계속되었는데, 처음 합덕 본당 보좌로 부임하여 주임 페랭(P. Perrin, 白文弼) 신부의 철저한 청빈과 금욕 생활, 박애 정신과 복지 활동에서 감화를 받은 그는 이후 자신의 모든 사목 활동에서 그와 같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또 1938년 제물포 본당 보좌 신부로 부임한 뒤에는 공소 방문 · 고아원 운영 · 학교 사목 등을 통하여 많은 사목 경험을 쌓았고, 1939년 7월 29일에는 백동 주임으로 전임되어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어린이들의 교리 교육과 신앙 생활을 위해 창미사곡을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성소 개발을 위해 어린이 용심단(勇心團)을 발족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논산 본당 재임 시절에는 더 많은 업적을 쌓게 되었는데, 13년 간 이곳에서 사목하면서 성당과 사제관을 증축 · 완공하였고, 1947년에는 논산 대건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49년에는 성당 내에 시약소를 개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52 ~ 1965년에는 샌뽈 양로원을 운영하였고 1958년에는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였으며, 1960년에는 성광원과 샌뽈 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 그가 시작한 교육 사업은 지금까지도 지역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해오고 있다. 이어 1964년에 홍산 본당으로 전임된 후에는 도시화 · 산업화의 영향으로 침체된 본당을 활성화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1969년 3월 13일에는 홍산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하였다.
서울 성가 소비녀회의 창립은 창설 동기와 사회적 상황, 창설 목적과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40년대 초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생제 신부 역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성당 내에 연금되어 겨우 미사만을 집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의 선교사적 열정은 곧 서울 성가 소비녀회를 탄생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특히 이 무렵 고아원 설립과 운영 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맡아 줄 수녀회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생제 신부는, 한국인 수녀 양성과 봉사를 목적으로 한 수녀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백동 성당 주변에 수녀원 설립 부지를 마련하였다. 그런 다음 백동 본당 신자 중에서 성소를 가진 사람들을 찾기 시작하여 곧 김청자와 김충순을 발견하게 되었고, 수도 생활을 권유하는 생제 신부의 건의를 이들이 혼쾌히 받아들임으로써 1943년에 서울 성가 소비녀회가 창설될 수 있었다. 이들은 1944년 3월 8일부터 백동 성당 내의 작은 방에서 첫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영성과 사상〕 생제 신부는 일생 동안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 는 생각을 갖고 생활하였다. 여기에 터전하고 있는 그의 영성적인 면모는, 첫째 '애주애인' (愛主愛人)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마땅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삶의 대원칙을 지켜 나가야 하며, 모든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자신의 부모 · 형제 · 자매 · 친인척 · 친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성가 소비녀회의 회원들, 그중에서도 특히 수련자들을 사랑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심 생활과 기도 시간을 철저히 지켰으며, 사제로서의 정결을 중시하였다.
둘째, 그는 가난한 삶을 몸소 실천하였다. 여덟 가지 복음적 행복(마태 5, 3-10)의 처음을 차지하고 있는 가난은 그로 하여금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통해 구세주 강생의 의미를 보여 주고 영신적 겸손을 실천하게 하였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고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라는 말씀이 곧 그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생제 신부는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서로 나누고 나눔으로써 풍요로워진 사제였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로서의 직무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았다.
셋째,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살았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활동가로서 언제나 주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의식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 동중정(動中靜) · 정중동(靜中動)의 의식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만큼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였다. 그러므로 성가 소비녀회를 떠나 논산 본당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도 아무 불평없이 순명하였으며, 일제 시대에 맹장 수술을 받았을 때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려는 마음에서 마취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또 건강이 악화되어 수녀들의 영적 지도를 맡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하면서 소비녀들을 하느님께 맡긴 그러한 목자였다. (→ 서울 성가 소비녀회)
※ 참고문헌  <가톨릭 신문> 1795호(1992. 3. 8), 7면/ 서울 성가 소비녀회 역사 자료실 편, 《성재덕 신부》, 서울 성가 소비녀회, 1993/-, 《성재덕 신부 서한집》, 서울 성가 소비녀회, 1993/ 《초창기 수도 생활과 고유 사도직》, 서울 성가 소비녀회, 1994/ 《창립 25주년》, 성가 수녀원, 1994. 〔金正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