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경상도 지역 최초의 본당이요, 현 대구대교구 주교좌 본당.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71 소재. 1893년 당시 남산동(南山洞)으로 불리던 현재의 계산동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관할 구역은 계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태평1 · 2 · 3가에서 남산3 · 4동, 대봉1 · 2동, 동인3 · 4가 이내의 지역.
〔설립 과정〕 경상도 지역 본당이 설립된 것은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의 칠곡(漆谷)신나무골〔枝川面 蓮花里〕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7년에 로베르 신부는 전해에 맞이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보좌 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장차 대구 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새방골 (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 상리동)의 죽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 본당 이 설립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 계산동 본당의 전신이다.
이 무렵 대구의 공소는 가장 큰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모두 6개였고, 신자수는 273명이었다. 새방골로 이주하여 활동하던 로베르 신부는 1887년 초에 일어나 이듬해 해결된 대구 박해와 1891년 초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 을 겪게 되었다. 특히 대구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후자의 사건에서는 그 자신이 일군의 불량배들로부터 행패를 당하고 경상 감사에 의해 대구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이 교안이 마무리되면서 다시 대구에 입성한 그는 1893년 현재의 계산동(당시의 남산)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마침내 '계산동 본당' 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성당 건립〕 계산동으로 이주한 로베르 신부는 우선 그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삼아 전교 활동을 하면서 1897년 현재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본래 그는 대구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동산(東山) 언덕을 매입할 예정이었으나, 몇몇 사람들의 반대로 그 아래의 저지대를 매입할 수밖에 없었다. 성당 건립은 부지 매입 후 2년여 만인 1899년에 완료되어 그 해 성탄 첨례날에는 성모를 주보로 삼아 축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때 축성된 성당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 기와집 형태를 갖춘 그리스식 십자형으로 한국 성당 건축사에서도 유일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 성당이 1년도 채 못되어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 로베르 신부는 새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때 대구의 신자들 중 서상돈(徐相墩), 김종학(金鍾學), 정규옥(鄭圭鈺) 등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1911년부터 확장 공사와 종탑 증축 공사를 거친 끝에 1919년 5월 11일 축성식을 가졌고, 훗날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성장과 변모〕 그 동안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여러 곳에 본당이 신설되었고, 신자수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11년에는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되고 그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계산동 본당은 대구교구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이 무렵 계산동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은 대구와 경산, 청도 등지로 한정되어 있었고, 총 신자수는 1,850여 명이었다. 이처럼 주교좌 본당이 된 이후 신자들의 활동도 눈에 띄게 활발해져 갔다. 우선 명도회의 창립과 명도회관의 건립, 해성 체육단(청년회) 발족, 인애회 · 친애회 · 성모회의 조직, 연령회 · 성영회 활동 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교육 사업으로는 1899년에 설립된 해성재(海星齋)가 성립학교(聖立學校)로, 다시 해성학교(海星學校, 1930년대 폐교)로 개칭되면서 발전하였으며, 1926년에는 성모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그중 해성 청년회와 명도회는 1924년 조선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로 통합 발족된 이후 대구 지역 평신도들의 중심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의 전신)를 창간하여 교회 소식의 대 변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계산동 본당은 1910년대 이후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의 책동으로 1942년에는 제2대 교구장 무세(G. Mousset, 文濟萬)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일본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주교가 제3대 교구장에 착좌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본당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3 · 1 운동에 참여하거나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운동에 가담하였고, 1930년대에는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으며, 꾸준히 전교 활동을 펴나갔다.
계산동 본당의 신자들이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게 된 것은 해방과 6 · 25 동란을 겪은 뒤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우선 본당의 평신도 단체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새 단체들을 설립하거나 그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제10대 서정길(徐正吉, 요한) 신부 재임시인 1952년에는 대성당 낙성 50주년 행사를 성대히 개최하였으며, 제12대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 때는 계산 문화관 부지를 조성하여 이를 제14대 김영환(金榮煥, 베네딕도) 신부 재임시인 1973년에 개관하였고, 1992년 8월에는 성당 복원 공사를 완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부터 교회의 현실 참여 운동에 동참하는 동시에 한국 교회의 성장에 발맞추어 각종 쇄신 활동과 제단체의 조직 강화를 전개해 나갔고, 교구의 주교좌 본당으로서 그 역할과 위치를 재정립하는 데 노력함으로써 오늘날의 본당상을 가꾸게 되었다. 현재 본당에는 제21대 주임으로 최시동(崔時東, 요한) 신부가 활동하고 있으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설립되어 그 사목을 돕고 있다.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崔正福 편저, 《大邱天主敎會史》, 天主教桂山洞教 會, 1952/ 釜山教區史編纂委員會 편, 《教區年報》, 天主教釜山教區, 1984/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百年史》, 대건출판 사, 1986/ 崔奭祐, 〈大邱 본당의 설립과 정착 과정>, 《神父全達出會 長 華甲紀念論叢》, 每日新聞社, 1992.
② 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북구 계산2동 923-11 소재. 1981년 2월 25일 갈산동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통고의 성모. 관할 구역은 본당 설립 당시 작전동 지역까지 포함되었으나 1982년 구역 조정으로 이 지역이 효성동 본당 관할로 편입되었으며, 그 결과 현재는 계산1 · 2동(현대 아파트 제외), 임학동, 용종동, 병방동, 방축동, 박촌동, 동양동 등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다. 공소는 계양 공소(장기동, 이화동, 다남동, 오류동, 갈현동 등), 상야 공소(상야동) 등 2개소. 〔교 세〕 1981년 1,092명, 1986년 2,412명, 1989년 4,794명, 1993년 7,125명. 〔역대 신부〕 초대 타이센(Roman Theisen, M.M., 태의선) 로마노(1981. 2~1987. 2), 2대 한의열(韓義烈) 요셉(1987. 2~1990. 2), 3대 신교선(申敎善) 가브리엘(1990. 2~1992. 2), 4대 송주석(宋周錫) 안셀모(1992.2~현재).
〔설립과 성장〕 본래 계산동 지역은 1952년에 설립된 부평2동 본당 소속이었다. 이때 계산동 지역에는 40명 정도의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1962년 계산동 74번지에 강당을 마련함과 동시에 본당의 변 로이 신부로부터 허락을 얻어 '계산동 공소' 를 설립하였다. 계산동 공소는 그 후 본당 신설에 따라 1964년에 부평1동 본당 소속으로, 1977년에 갈산동 본당 소속으로 각각 변경되었다. 그러던 중 이곳의 교세가 증가하면서 공소 사목회를 구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본당 설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1981년에는 타이센(로마노)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으로 맞이하여 독립하게 되었다. 설립 당시 본당에서는 공소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교구의 협조를 얻어 계산동 530-48번지(현재의 계산2동 부지)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기에 공소 부지와 교환한 부지 및 추가매입 부지를 합하여 같은 해 12월 사제관(지하 1층, 지상 2층)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우선 2층 회의실을 성당으로 사용하였으며, 1986년 3월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에 1차 공사를 마무리하고 지하 강당으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이 성당 공사가 완공된 것은 제2대 본당 주임 한의열 신부 재임시인 1989년 11월이었고, 그 축성식은 제3대 주임 신교선 신부 부임 후인
1990년 5월 5일에 거행되었다. 그 동안 신자들은 단체조직에 노력하여 요셉회 · 연령회 · 성모회 · 청년회 · 교사회 · 성가대 · 빈천시오회 · 레지오 마리애 등 평신도 단체들을 연이어 발족시켰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이와 함께 본당에서는 1982년 3월에 천주의 섭리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사목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며, 교세 변화에 따라 구역을 개편함과 동시에 사목과 선교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1987년 이후에는 단체의 활성화 및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는 한편 노동 단체 및 노동 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 인천교구) 〔車基眞〕
계산동 본당
桂山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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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건립 전 임시 성당으로 사용되었던 대어벌 정규옥(바오로)의 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