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 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서울 대목구 부주교. 제3대 용산 예수성심신 학교 교장. 초대 대구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장. 세례명은 스테파노. 한국명은 송덕망(宋德望). 1867년 9월 6일 프랑스 캉탈(Cantal) 지방 생 플루르(St. Flour) 교구의 앙들라(Andelat)에서 태어나 교구 소속 신학교에서 삭발례를 받고 1887년 9월 21일 파리 외방전 교회에 입회하였으며, 제8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 의해 1890년 9월 28일에 사제 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해 11월 말 뮈텔 주교와 뒤테르트르(L.P. Dutertre, 姜良) 신부 등과 함께 파리를 출발하여 로마의 마르세유를 거쳐 이듬해 2월 19일 부산항에 도착한 샤르즈뵈프 신부는, 제물포(濟物浦)를 거쳐 2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후 샤르즈뵈프 신부는 한국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4월 19일에 함경도 안변(安邊)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제관을 강성골에서 눈다리로 이전한 뒤에는, 건강이 악화된 원산(元山) 본당의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신부를 대신하여 원산까지 사목 방문하였다. 또 1892년 초에는 원산 본당 3대 주임으로 전임되어 사목하다가 이듬해 4월 22일 시복 조사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로(J.L. Rault, 盧若望) 신부의 건강 악화로 같은 해 5월 22일 본당에 재부임했다. 그러나 1894년 4월 14일에 다시 시복 조사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 임시 교수로 임명되어 철학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1896년 4월 24일에는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와 함께 부주교로 임명된 데 이어 같은 해 9월 14일에는 제물포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과 고아원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약 2년 동안 활동하였으며, 1897년 5월 8일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제3대 교장으로 전임되었다.
1900년 8월 말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로 임명되어 같은 해 10월 초에 귀국한 이래 그곳에서 약 12년 동안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11년 4월 8일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가 분리 · 설정되면서 그 이듬해 3월 16일 다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6월 13일에 입국한 샤르즈뵈프 신부는, 6월 28일에 목포(木浦, 현 산정동)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성당 신축에 힘썼다. 또한 1914년 5월에는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F.Demange, 安世華) 주교가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립을 계획함에 따라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10월 4일 신학교와 성당을 완공하였다.
해박한 신학 이론과 성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교부들이 묵상한 성서》(Bible méditée d'après les Saints Pères), 《교부학 개론》(Summula Patristica), 《수덕 신학 개론》(Summula Ascctica), 《문학 개론》(Summula Litterarum) 등과 같은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샤르즈뵈프 신부는, 1920년 4월 22일 미사 집전 중 뇌일혈로 사망하여 대구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성 유스티노 신학교 ; 예수성심신학교)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텔 주교 일기》 Ⅰ~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3~199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敎區年報》 I, 明洞天主教會, 1984/ 용산 본당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용산 본당 50년사》, 천주교 용산 교회, 1992/ 한국교회사연구소, 《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I (원산 본당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Ⅱ(안변 본당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李裕林]
샤르즈뵈프, 조제프 마리 에티엔
Chargeboeuf, Joseph Marie Etienne(1867 ~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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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샤르즈뵈프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