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팡티에, 마르킹투안

Charpentier, Mac-Amonime(1636~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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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팡티에의 자필 악보.

샤르팡티에의 자필 악보.

프랑스의 오라토리오 작곡가.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프랑스의 불사조' 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들랄랑드(M-R. Delalande, 1657~1726)와 함께 프랑스 교회 음악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생애와 음악 활동〕 파리의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음악 저널》(Journal de Musique) 1774년판 1호와 47호에서는 6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맞는다면 그는 1636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화가가 되려는 어릴적 꿈을 이루기 위해 15세 때인 1650년에 이탈리아로간 그는 그곳에서 음악에 대한 소질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콜레지움 제르마니쿰' (Collegium Germanicum) 에서 3년 동안 몬테베르디(C. Monteverdi, 1567?~1643)와 빅토리아(T.L. de Victoria, 1548?~1611)와 당시 오라토리오의 선구자였던 카리시미(G. Carissimi, 1605~1674)에게서 대위법 · 복합창 형식 · 오라토리오 형식 · 역사적인 교회 음악 형식 등의 작곡법을 배웠는데, 이 영향으로 훗날 그의 작품 속에는 이탈리아적인 요소들 특히 카리시미의 영향이 많이 반영되었다.
1662년에 파리로 돌아온 샤르팡티에는 성 마태오(Mathieu) 대수도원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풍의 음악가들을 자주 만나면서 자신의 스승의 음악풍을 그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에 힘썼다. 당시 파리에는 륄리(J.B. Lully, 1632~1687)가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으며 음악 활동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가 당시의 극음악인 '프랑스 희곡 (la Comédie Francaise)을 더 이상 작곡하지 않자 그의 극음악 대본들을 써 주던 몰리에르(Molière, 1622~1673)는 샤르팡티에에게 합작을 권유하였다. 그래서 극음악을 쓰기 시작한 샤르팡티에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때 그는 몰리에르의 <강제 결혼>(Le Mariage forcé, 1672 초연) 개정판의 음악을 작곡하였고, 또 <상상병 환자>(Le Malade imaginaire, 1673)도 공동 작곡하였다. 몰리에르가 1673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도 샤르팡티에는 계속해서 극음악을 작곡하여 마침내 그의 명성은 왕실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왕정 음악 감독의 채용 시험이 있었던 1683년에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는데도 왕의 연금을 받는 특혜를 받을 정도였다. 1685년까지 그는 파리의 국립 극장인 '테아트르 프랑세' (Théâtre Frangais)에서 코르네유(P. Corneille)의 작품에 곡을 붙인 <폴리옥트>(Polyeucte)와 <메데>(Médée)와 <안드로메드>(Androméde), 비제(Visé)의 장 돈뇌(Jean Donneau)의 작품에 곡을 붙인 <비너스의 사랑〉(Les Amours de Vénus), , 토마스 코르네유(Thomas Corneille)의 작품에 곡을 붙인 <시르세>(Circé)와 <이방인>(L'Inconnu)과 <연금술사 피에르>(La Pierre philos-ophale)를 발표하였다.
파리 생제르맹(Saint-Germain) 거리에 있는 루이 14세의 왕세자의 경당에서 1679년부터 10여 년 동안 악장을 역임하면서 미사곡들을 작곡한 샤르팡티에는, 1680년부터는 루이 14세의 조카인 귀즈(Guise)의 공작 부인 마리(Marie de Lorraine)의 악장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그는 여러 곡의 칸타타와 전원곡(pastorale)을 작곡하였다. 그 밖에도 여러 성당에서 음악 감독직을 맡았는데, 특히 1684년에는 예수회 관할인 생 루이(Saint Louis) 성당과 콜레주 드 클레르몽(Collège de Clermont, 현재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의 음악 교사를 역임하였다. 이 기간에 작곡한 여러 개의 교회 음악곡은 파리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때로는 루이 14세 왕도 친히 참석해 그의 음악을 듣고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회가 프랑스에서 추방된 후에는 수도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악보들이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692년에는 오를레앙(OrièAns) 공의 작곡 교사가 되어 그를 위해 특별히 《작곡법》(Règles de la composition)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생애 말년에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 에서 오페라 <메데>를 연주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698년에 샤르팡티에가 왕실 성당인 생트 샤펠(Sainte Chapelle)의 악장이 되자 파리 교구 참사회에서는 그가 본래 성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제로 받아들였다. 생 샤펠에서는 규칙상 악장이 모든 연주 형태의 다성 음악곡들을 작곡하여야 했기 때문에, 그는 미사곡 · 시편 · 성탄 자정 미사곡 · 모테트 외에도 여러 가지 경우들에 필요한 음악들, 예를 들면 <테 데움>(TeDeum)이나 <주여 왕을 도우소서>(Domine, salvum fac) 및 전투의 승리나 외국 국빈들의 영접과 국회 개회식 때의 음악, 귀족들의 장례식을 위한 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그러므로 1698년부터 1704년 초까지 생트 샤펠에서 연주된 모든 곡들은 샤르팡티에가 작곡한 곡으로 추정된다.
〔작품 세계 및 평가〕 루이 14세의 신임을 배경으로 프랑스 궁정 음악을 석권하였던 륄리보다도 더 세련된 음악가라는 인정을 받았던 샤르팡티에는, 자신이 파리의 예수회를 위하여 작곡한 종교적인 곡들로 프랑스의 오라토리오를 확립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방탕한아들>(Filius prodigus)과 <아브라함의 제헌>(Sacrificium
Abrami),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성 베드로의 배신>(Le Reniement de Saint Pierre)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오라토리오에서 그는 그의 스승인 카리시미의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의 양식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던 것이다.
그의 음악 작품에는 서정적 분위기 · 숙련된 대위법적 처리 · 화성적 분위기 · 화성적 재료의 감각적인 사용 등 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오라토리오와 무대 음악(16개의 오페라와 다수의 전원곡) 외에도 그는 말년에 교회 음악곡들에 주력하면서 장엄 미사곡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곡 · 성탄 자정 미사곡 · 레퀴엠 등 12개의 미사곡과, 왕세자의 경당을 위해 작곡한 합창 · 마니피칸 · 오케스트라를 위한 정교한 수많은 모테트들 · 시편 음악들 · 파스카 3일 시간 전례 음악들 · 테 데움 등 많은 종교 음악을 남겼다. 특히 테 데움 D장조의 트럼펫 연주가 일반인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그의 음악이 재평가를 받고 있다. (→ 가톨릭 음악)
※ 참고문헌  《MGG》/ 《NGDMM》/ P.-P. Lacas, 《EU》 5, p. 405. [白南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