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회원. 루뱅 대학의 가톨릭 선교학파를 창시하고 활성시킨 선교학자. 1883년에 브뤼셀(Bruxelles)에서 태어나 생 미셸 학교(Colliège S. Mihel)에서 공부한 후 1899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1910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12~1913년에는 루뱅과 파리에서 신학을 연구하였으며, 1914년부터 1954년까지 루뱅 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면서 선교학과 인류학 및 종교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교 관련 활동 및 업적〕 1921년에 《새 신학지》(Nouvelle revue théologique)의 공동 편찬자가 된 샤를 신부는, 이듬해 루뱅 대학의 《뮤제움 레시아눔》(Museum Les-sianum) 전집의 창간에 참여하였는데-이 전집의 창간호 첫 면에는 그의 <매시간의 기도>(Pière de toutes les heures)라는 글이 실려 있다-이 전집은 여러 유럽의 언어들로 번역 · 출판되었다. 1923년부터는 선교 활동에 전념하면서 선교 역사 · 선교 신학 · 선교 방법론에 대한 간략한 연구 논문들을 실은 《사베리아나》(Xaveriana)( 전집을 창간하였고, 루뱅의 '선교학 연구 주간' 에 참여하면서 상임 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4년에는 '선교 원조를 위한 가톨릭 대학위원회' (Association Universitaire Catholique pour L'Aide aux Missions, A.U.C.A.M)를 창시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의 역사'와 '일본 선교 에 관한 선교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벨기에 정부가 1929년에 '왕립 식민지 연구소' (Institut Royal Colonial)를 창설하자 정치와 윤리 분야를 담당하는 연구소의 전임 교수로 임명된 그는, 그 후 이 연구소의 구성원이 되어 파리(1931) · 리스본(1933) · 루르드(1936)에서 열린 회의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앙베르(Anvers)의 식민지 대학' 으로부터 행정 고문이자 선교사(宣敎史)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테르뷰렌(Tervueren)에 있는 벨기에의 콩고 박물관의 감독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샤를은 루뱅 신학교에 설립된 선사 시대 유적 박물관 한 켠에 콩고의 민족지학 박물관과 대규모의 선교학 도서관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32년에는 로마로 가 그레고리오 대학에 선교학 학부를 개설하는 데 기여하면서 선교 이론과 선교 역사 강 의를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1940~1946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를 두루 순회하면서 도처에서 회의를 열고 강의를 진행하였다. 이 기간에 그가 저술한 작품으로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인간 삶의 영원한 문제》(Questiones eternas de la vida humana, Mendoza, ed. El Guia, 1944)와 프랑스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들을 서술한 소책자 《프랑스에 대한 일별》(Coup d'oeil sur la France, Buenos-Aires, ed. Dedebec)이 있다. 1946년에 다시 벨기에로 돌아간 샤를 신부는 계속해서 교수 활동과 선교 연구소의 활동을 병행하다가 1954년에 루뱅에서 사망하였다.
〔선교학적 성향과 주요 저서〕 1922년에 샤를이 창시한 루뱅의 선교학파는, 선교 활동의 목적이 비그리스도교 국가에 교계 제도와 현지인 성직자를 갖추고 성사를 행하는 하나의 교회를 부식하고 형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1919년에 독일 뮌스터를 중심으로 슈미들린(Josef Schmidlin, 1876~1944)에 의해 창시된 뮌스터 선교학파의 성향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뮌스터 학파는 선교의 목적이 개개인들의 회개라고 정의하였다. 이와 대조적인 루뱅 학파의 중심적인 성향을 주도한 샤를의 신학적 사고는, 하느님이 개개인이 아닌 교회 전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열망한다는 중심 주제가 바탕을 이루었다. 또 샤를은 이를 설명하면서 '토착화' (inculturaion)라는 개념을 거론하기도 하였는데, 이 개념은 그 당시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후에 선교 신학에서 권위 있는 주제로 대두되었다.
샤를은 그의 신학적인 사고들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 선교학의 중심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표출하였는데, 특히 그의 선교학 소사전인 《선교활동 자료집》(Dossiers de I'action missionnaire,1938~1939)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그 밖에 대표적인 선교학 저술서로는 《선교사의 기도》(La prière missionnaire, 1935), 《선교학》(Missiologie, 1939), 《선교학 연구》(Études missiologiques, 1956) 등이 있다. 반 불크(P. van Bulck)는 자신이 펴내는 《선교학 연구》(Studia Missionalia 10, 1960)에 샤를의 저작 목록 전체를 수록했으며, 1954년부터는 많은 잡지들에 그의 작품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실렸다.
〔의 의〕 샤를은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으로의 개별적인 회개를,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초로서 강조하던 기존의 선교학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려고 하였다. 즉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오던 '교회의 부식' (plantatio Ecclesiae)의 의미를 선교의 특수한 목적으로 장려하였던 것이다. 샤를과 같은 시대의 여러 선교학자들도 이러한 주제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고, 이렇게 해서 비그리스도인들의 개별적인 개종이라는 주제에 선교의 목적을 축소시키지 않은 샤를의 선교학적인 관점은 독특한 학파를 구성하여 20세기에 새로운 신학 분야로 떠오른 선교학을 주도하는 한 갈래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노선을 제시한 뮌스터 학파의 슈미들린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중에 가톨릭 선교학을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에반젤리 프레코네스>(Evangelii Praecones, 1951. 6. 2)에서는 샤를의 선교학적인 관점을 보다 더 상세하고 정확하게 교회론적으로 정의내리면서, 선교란 지속적인 육화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 선교학 ; 선교 회칙 ; 슈미들린)
※ 참고문헌 Gérard Reynal ed., Dictiomaire des théologiens et de la théologie chrétieme, rue Bayard, 1998, p. 109/ U. Milliez, 《Cath》 2, pp.990~991/ Jesús López~Gay SJ, : in Gerald H.Anderson ed.,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ristian Missions, New York, 1998, p. 1271 R. Hoffman, 《NCE》 9, p. 902/ R. Aubert M.D. Knowles · L.J. Rogier eds., Nowelle Histoire de L'Église 5, Paris, 1975, pp. 429, 662. [梁蕙貞]
샤를, 피에르
Charles, Pieme(1883~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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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