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스탕, 자크 오노레 Chastan, Jacques Honore(1803~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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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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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탕 신부.

성인.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조선 선교사. 세례명은 야고보. 한국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축일은 9월 20 일. 1827년 동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코친차이나(지금의 남부 베트남)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이듬해 마카오를 거쳐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여 1837년 초에 입국했으며,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순교하였다.
〔서품과 조선 입국〕 1803년 10월 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 부락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23년에 디뉴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26년 12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해외 선교를 자원하여 이듬해 1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며, 같은 해 5월 동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동료 신부 2명과 함께 보르도 항을 출발하였다. 프랑스를 떠난 샤스탕 신부 일행은 많은 고생을 겪은 뒤 1827년 말에야 코친차이나에 도착하였고, 이어 9개월 뒤인 1828년 7월 19일에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시암(Siam, 지금의 타이) 포교지에 속해 있는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앞서 그는 마카오에서 조선 포교지의 사목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으나 그의 희망은 즉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페낭 신학교에서 4년여를 보내게 된 샤스탕 신부는 1832년 7월 브뤼기에르(Bruguière, 蘇)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한번 그에게 조선 선교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게 되었다.
1833년 5월 페낭을 떠나 마카오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11월에는 복건(福建)에서 얼마 전에 조선 선교를 자원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를 만난 뒤 강남에서 배를 타고 요동을 거쳐 만주 달단(韃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보행군 한 명과 함께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나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였는데, 유방제 신부는 이미 1834년 초에 조선에 입국한 뒤였다. 할 수 없이 샤스탕 신부는 그 해 8월부터 약 2년 동안 산동(山東). 지방에 머무르면서 중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지내던 중, 1836년 초에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산동을 떠나 12월 25일에 책문(柵門, 중국측 邊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2월 28일에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등 조선 신학생들을 데리고 온 조선의 밀사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을 만나게 되었다.
조선 밀사의 안내로 12월 31일에 책문을 떠나 1837년 1월 1일(음 1836년 11월 25일) 조선 땅을 밟은 샤스탕 신부는,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여 일시 후동(后洞)에 있는 정하상의 집에 머무르다가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회장 집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조선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 해 부활 대축일에 양근(楊根)으로 가서 모방 신 부를 만난 뒤 북쪽 지방으로 가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사목 활동과 박해〕 1837년 7월에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가 열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다시 상경하여야만 했다. 이때 그는 모방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었는데, 다행히 그는 3개월 뒤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때부터 샤스탕 신부는 상복 차림으로 남쪽 지방의 교우촌을 비밀리에 순회하면서 성사를 주거나 회장을 임명하였으며 규칙을 새로 제정해 주었고 어려운 처지의 신자들을 도와 가면서 신자 집단들을 재건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37년 12월 18일(음 11월 21일)에 제2대 조선교 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샤스탕 신부는 남부 지방을 순회하던 중이었으므로 이듬해 5월에야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서울에 잠시 머무르던 샤스탕 신부는 곧 앵베르 주교와 헤어져 다시 남쪽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는데 그 동안에도 전국에서는 갖가지 작은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고, 그 또한 여러 차례 위험을 겪어야만 하였다. 한편 1838년 말에는 회장 한 명을 선발하여 부산포(釜山浦)에 머물러 있던 일본인들에게 보내 그중 몇 사람을 입교시키고, 아직도 일본에 신자들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 덕택으로 1836년 초에 6,000여 명 미만이던 조선의 신자수는 1838년 말에 는 9,000명에 이르게 되었으나 1838년 말부터 상황이 아주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1839년 1월 중순에는 앵베르 주교가 방문했던 서울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3월에는 경기도 광주의 구산(龜山) 교우촌이, 4월에는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회장과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선교사들은 성사 집행을 중단하지 않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4월 18일(음 3월 5일)에 마침내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대왕 대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의 재가를 얻어 <사학 토치령>(邪學診治令)을 반포하였다.
손경서(안드레아)가 수원 송교(현 화성군 서신면 松橋里)에 마련해 놓은 피신처에 머무르던 앵베르 주교는,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그곳으로 오도록 한 다음 자기 혼자 박해의 희생자가 되겠다면서 그들에게 피신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충청도 용당리(龍塘里, 현 충남 아산군 선장면 가산리 )교우촌으로 피신하였고, 얼마 안되어 앵베르 주교는 자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샤스탕 신부는 홍주 다래골(현
청양군 화성면 農岩里의 다락골)에서 모방 신부와 헤어져 전라도의 한 교우촌으로 갔다가 며칠 후 모방 신부에게 보낸 주교의 서한을 받게 되었다. 그 서한에는 자수를 권하는 주교의 명령이 들어 있었다. 이에 따라 샤스탕 신부는 즉시 모방 신부에게 가서 함께 포교 손계창(孫啓昌)에게 자수하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수는 약 1만 명 이었다.
〔순교와 영성〕 그 해 9월 6일(음 7월 29일)에 자수한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는 곧 서울로 압송되어 앵베르 주교와 정하상 · 유진길 등과 함께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갖은 유혹과 형벌 속에서도 결코 교우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샤스탕 신부는 다른 두 선교사들과 함께 의금부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판결을 받고 9월 21일(음 8월 14일) 성 마태오 축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순교 후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 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그 동안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하였으며, 몇 명의 신자들은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 침내 세 명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老姑山,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의 유해는 1843년 에 발굴되어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에 안장되었다가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 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2일에는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57년에 모두 가경자로 선포된 데 이어 1925년에는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샤스탕 신부는 이미 디뉴와 엥브룅(Embrun) 중학교 시절부터 남다른 성소를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소년 시절을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그가 본당의 종교 행사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이었으며 모든 언행이 조심스러웠 고, 학문적인 머리보다는 신앙 정신과 판단력과 용기가 앞서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특히 그는 엥브룅 중학교 시절에 동양 선교사로 활동한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o Xavier)의 전기를 읽게 되면서 이교도의 개종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실제로 그 길이 순교의 길이라는 것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묵상을 통해 자신의 신덕과 애덕을 닦곤 하였고 스스로 성직자의 길을 닦아 나갔다.
그의 순교 영성은 이미 선교사로 임명될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뒤에는 더욱 굳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조선 포교지에 대한 사랑으로 변모하였다. 샤스탕 신부는 마카오에서 파리 신학교의 교장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어느 나라에 있든지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자격 있는 병사로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죽는 것보다 전장에 나가 자기 왕(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싸우다가 무기를 든 채 쓰러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조선에서의 순교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영성을 조선 선교와 순교 과정을 통해 실천하게 되었다. 또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부모 · 형제들과 동료 선교사들, 그리고 조선의 신자들을 사랑한 성직자였고 순명과 용기를 지닌 성직자이기도 하였다. 특히 앵베르 주교에 대한 순명은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조선 입국을 감행하는 용기로 이어졌으며, 박해 이후에는 순명에 따라 피신하고 순명에 따라 박해자들에게 자수하는 용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혹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오로지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으며, 신앙을 위해 활동하였을 뿐" 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영성은 순교 후 조선 신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기해박해 ; 한국 성인)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가톨릭 사전》 《日省錄》 《推案及鞫案》 《기해일기》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필사본),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E. Fourer, La Corée Martyrs et Mission-naires, Nancy, 1895/ Adrien Launay, Mémorial de la Société des Missions-Étrangères, 2e partie( 1658~1913), Paris, 1916/ Frangoise Fauconnet-Buzelin, Mourirpour la Corée, Jacques Chastan, Paris, 1996.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