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정치가.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 역사상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활동한 낭만주의의 초기 작가 중 한 사람이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일깨워 주려 하였던 가톨릭 문학가.
〔생애 및 활동〕 1768년에 생말로(Saint-Malo)에서 브르타뉴(Bretagne)의 한 귀족 가문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에 부모가 별로 돌보지 않아 고향 마을의 아이들하고 바닷가에 나가 놀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무뚝뚝하여 샤토브리앙에게 자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어머니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상당히 우울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1777년에 가족이 콩부르 별장(chateau de Combourg)으로 이사 갔지만, 당시 9세였던 샤토브리앙은 여러 번의 전학을 거쳐 초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후인 1784년에 콩부르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년 동안 그는 그곳에서 한가한 생활을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시적 체험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 그의 누나인 뤼실(Lucile)이 그의 유일한 정신적 동반자였다.
1786년 귀족의 막내로서 어쩔 수 없이 장교의 길을 선택한 샤토브리앙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베르사유 궁정과 파리의 문인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신앙을 버리고 시인으로서 출세할 꿈을 꾸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샤토브리앙은 처음에는 이 혁명의 의도에 찬성하였지만, 주동자들의 행위에 불신을 품고 179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5개월 동안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을 시도하였다.이 여행에 대한 추억은 훗날 그가 집필한 작품 즉 《아탈라》(Atala, 1801), 《나체즈족》(Les Natchez, 1826), 《미국 여행》(Voyage en Amérique, 1827) 등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1792년 7월에 형과 함께 영국으로 망
명한 샤토브리앙은 그곳에서 《혁명론》(Essai sur les révolu-tions, 1797)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이 프랑스에 알려진 것은 1825년이었다. 1800년에 귀국하여 2년 후인 1802년에 영국에 체류하면서 준비해 두었던 《그리스도교의 정수》(Le Génie du Chinstianisme)를 발표한 샤토브리앙은,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샤토브리앙을 로마 대사관 일등 서기관에 임명하고 이어서 발레(Valais) 공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4년에 앙기엥(Anghein) 공작이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공직에서 물러나 나폴레옹 정권과 결별하였으며, 더욱이 누나 뤼실의 죽음이라는 비보(悲報)에 큰 충격을 받아 또 다른 모험을 시도하기 위하여 근동(近東)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1806~1807년에 그리스 · 터키 · 예루살렘 · 북아프리카 · 스페인을 거쳐 귀국한 그는, 1809년에 《순교자들》(Les Martyrs)과 1811년에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Itinéraire de Paris à Jérusalem)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문학적인 저술 활동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프랑세즈' (Académie Francaise)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14년부터 1830년까지 샤토브리앙은 부르봉 왕조(Bourbons)의 왕정 복고를 찬성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치가로서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815년에 자작 작위를 받고 귀족원 위원이 되었으며, 1821년에는 6개월 동안 베를린 대사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런던 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개최된 베로나 회의(congrès de Vérone)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였고, 1824년까지는 외무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그 후 1828~1829년에 걸쳐 약 1년 간 로마 대사를 지냈다. 그러나 1830년 7월 혁명 이후 루이 필립(Louis Philippe)이 정권을 장악하자 정치적 활동을 중지하고 귀족원 위원직을 포기한 뒤 왕위 찬탈자를 풍자하는 글을 집필하는 데 주력하였다. 샤토 브리앙은 자신의 생애에 대한 회상을 계속 기술해 나가면서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냈는데, 생계 유지를 위해 《역사에 관한 연구》(Etudes historlques, 1831), 《영국 문학에 관해서》(Essai sur la littérature anglaise, 1836), 《베로나 회의》(Le congrès de Vérone, 1838), 《랑세의 생애》(Vie de Rancé, 1844)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자신의 여자 친구인 레카미에 부인(Madame de Récamier)의 저택에서 유명한 인사들을 만나면서 학구적인 삶을 보내다가 1848년 7월 4일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총 12권으로 된 그의 생애에 대한 회고록이자 마지막 저서인 《무덤 저편의 회상》(Les mémoires d'outre-tombe)이 1849년 1월부터 이듬해 10월에 걸쳐 출판되었다.
〔작품 세계 및 평가〕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역사상 사회적 ·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살았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상황은 그로 하여금 문인으로서의 다양한 소질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입장은 상황에 따라 바뀌었고 개인적으로는 출세하려는 야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시종일관 합법화된 공적인 자유를 옹호하는 태도를 지녔던 사람이었다. 또한 공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위정자들에 대항하여 서슴없이 신랄한 풍자문을 써서 비판할 정도로 평론가로서의 탁월한 소질을 지녔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샤토브리앙은 당시의 프랑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관심을 회복시키기 위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특히 《그리스도교의 정수》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볼테르(A.F.M. Voltaire, 1694~1778) 를 비롯하여 18세기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보여 준 반종교적인 태도는 오랫동안 프랑스 지식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으며, 그 결과 성당에 나가는 사람은 바보로 취급될 정도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이 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합리적인 토론 양식이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심미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처음에 그가 이 작품 제목으로 붙인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 시적 아름다움"(Les beautés morales et poétiques du Christianisme)에 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분야의 문화 특히 예술과 문학의 발전에 미친 그리스도교의 기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계가 많고 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자부심을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하였으며, 특히 신자들의 창의적인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로써 샤토브리앙은 낭만주의의 길을 열었으며, 프랑스 최초의 낭만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낭만주의적인 글로서 대표되는 《르네》(René)는 본래 《그리스도교의 정수》에 수록된 작품이었는데 1805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인간 정염의 모호함과 '세기병' (世紀病, le mal du siecle)적인 요소들을 특징적으로 드러낸 이 책에서, 샤토브리앙은 허무감 혹은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는 '세기병' 에 걸린 한 소년을 회상하며 그의 고민과 환상, 격화된 정열을 감동적인 양식으로 묘사하였다. 또 《아탈라》와 《순교자들》은 비장미를 자아내며, 자연에 대한 예찬을 드러낸 부분에서는 낭만파 시인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과민한 감정 상태나 감상적인 경향에 대하여 냉정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잘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엄격한 의미에서 샤토브리앙을 낭만주의자로 보기보다는 문학 비평가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정수》에 나오는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들 즉 볼테르, 라신(JB. Racine, 1639~1699), 파스칼(B. Pascal, 1623~1662) 등에 대한 그의 비평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에 대한 그의 예리한 분석과 아름다운 문체의 서술은 그를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산문가와 비평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꼽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 가톨릭 문학, 프랑스의)
※ 참고문헌 Bulletin de la Société Chateaubriand, France, La Vallée aux Loups, Chatenay-Malabry, Seine/ A. Maurois, Chateaubriand, Grasset, 1938/ R. Switzer Genf, Actes du Congrès de Wisconsin pour le 200ème anniversaire de la naissance de Chateaubriand, Madison Wisconsin, 1970/P. Moreau, Chateaubriand, I'homme et l'oeuvre, Paris, Hatier, 1956/ G.D.Painter, Chateaubriand, Paris, 19771 J.P. Richard, Paysage de Chateau-briand, Paris, 1967/ M. Levaillant, Splendeurs, misères et chimères de Monsieur de Chateaubriand, Paris, 1948/ M. Levaillant, Le véritable Chateaubriand, Oxford, 1951/ 一, Chateaubriand, Mme Récamier et les Mémoires d'outre-tombe, Paris, 1936/ 一, Chateaubriand, prince de songes, Paris, 1961/ H. Guillemin, L'homme des Mémoires d'outre-tombe,Paris, 1964/ M.J. Durry, La vieillesse de Chateaubricmd, vol. 2, Paris, 1933/E. Beau de Lomènie, La carrière politique de Chateaubriand de 1814 a 1830, Paris 1929/ A. Cassagne, La vie politique de Chateaubriand, Paris,1911/ A. Poirier, Les idées artistiques de Chateaubriand, Paris, 1958/ V.Giraud, Le christianisme de Chateaubriand, vol. 2, Paris, Hachette,1925~1928 [H. Lebrun]
샤토브리앙, 프랑수아-르네 드
Chateaubriand, Frangois-René de(1768~1848)
글자 크기
7권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