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聖 - 修女會

〔프〕Soeurs de Saint Paul de Chartres · 〔영〕Sisters of St. Paul fChartres(S.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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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베스빌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요람지(왼쪽)와 총본부를 로마로 옮기기 전까지의 모원 겸 본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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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베스빌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요람지(왼쪽)와 총본부를 로마로 옮기기 전까지의 모원 겸 본부 건물.

1696년에 프랑스의 루이 쇼베(L'Abbe Louis Chauvet, 1664~1710) 신부가 어린이 교육과 병자 간호를 목적으로 창설한 수녀회. 총원은 로마에 있으며 1998년 현재 28개 국에서 4,0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1888년에 진출하였으며 현재 서울 관구(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6번지 소재, 관구장 : 서미원 수산나 수녀)와 대구 관구(대구시 중구 남산3동 190-1번지 소재, 관구장 : 이순금 안젤라 수녀)가 있다. 회원수는 1998년 12월 현재 서울 관구 541명(종신 서원자 433, 주년 서원자 44, 수련자 32, 청원자 15, 지원자 17), 대구 관구 487명(종신 서원자 369, 주년 서원자 65, 수련자 21, 청원자 15, 지원자 17)으로 총 1,028명이다.
〔설립과 세계 진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696년 프랑스의 샤르트르 시에서 약 4km 떨어진 르베스빌 라세나르' (Levesville-la-Chenard)라는 작은 마을의 본당 신부였던 루이 쇼베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는 백년 전쟁 · 종교 전쟁 · 프롱드의 난 등 300여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 사회적으로 매우 황폐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때 기존의 봉쇄 수도원의 활동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 저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응하기 위하여 많은 수도회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 곧 활동 수도회의 시작이다. 한편 극단적인 이성주의 (理性主義) · 합리주의(合理主義) · 정적주의(靜寂主義) · 엄격주의(嚴格主義) 등이 난무하여 정신적으로도 동요가 심하였는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충실한 영성적 흐름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이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창설된 보스(Beauce) 평야의 르베스빌 지역은 전쟁 중에 군인들이 통과하던 곳이 어서 여러 시대를 걸쳐 수 차례 전쟁의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이 가져다 준 피해는 비단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 다.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에는 불신과 좌절이 자리잡았으며 삶의 의욕까지도 앗아 가 버렸다. 1694년 6월에 르베스빌 본당에 부임한 루이 쇼베 신부는 이와 같은 마을 주민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소생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극도로 가난한 삶은 그의 사도적 영혼을 움직여, 마침내 그의 마음속은 그들의 실제적이며 지적 · 도덕적 · 영적 가난을 들어올리려는 열의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한 열의에 네 명의 순박한 시골 처녀들이 너그럽고 헌신적으로 응답하였는데, 이들이 첫 입회자이자 원장이었던 마리 미쇼(Marie Michau), 바르브 푸코(Barbe Foucault), 루이 쇼베 신부와 함께 수녀회를 공동 창설한 마리 안 드 티이(Marie Anne de Tilly, 그리고 카트린 시루(Catherine Sirou)였다. 즉 이와 같은 시대적 · 정신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린이 교육과 병자 간호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공동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708년에는 샤르트르 시의 생모리스 가로 이전하면서 이곳의 지명과 사도 바오로의 선교열을 본받고자 '살 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 이름은 1861년 비오 9세 교황을 통하여 교회 안에 공인
된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1727년에 멀리 바다 건너 안틸레스-기아나 섬으로 수녀들을 파견함으로써 해 외 선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어 1770년에 포트루이스, 1775년에는 부르봉 섬에 새로운 분원을 설립 하였다. 해외 선교와 더불어 1733년에 생 풍(Saint-Pons) 수녀회, 그리고 1734년에는 스트라스부(Strsbourg) 수녀회의 창설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거센 풍랑 속에서 공동체가 해산될 정도로 그 존속의 위기까지 겪어야만 했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모원의 재개와 함께 1817년에 기아나로 다시 파견되었고, 같은 해에 마르티니크로 진출하였으며 1847년에는 영국의 셀리 파크(Selly Park) 성 바오로 수녀회의 창설을 도와 주었다. 이때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의 새로운 보고(寶庫)를 발견하게 되면서 홍콩(1848), 베트남(1860), , 일본(1878)에 수녀들을 파견함으로써 새로운 봉사를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1880~1886년에 해일처럼 덮쳐 온 속화법(俗化法)으로 인하여 폐쇄된 분원에서 모원으로 자리를 옮기 게 된 수녀들이 국경을 넘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는 일에 더욱 열성을 기울인 결과, 벨기에(1881)에 분원을 신설한 것을 비롯하여 스위스(1900)와 영국(1903)에도 분원을 신설하게 되었으며, 한국(1888)과 타이(1898), 필리 핀(1904)까지도 진출하게 되었다. 같은 해 라오스에도 진출했으나 안타깝게도 라오스가 공산화됨에 따라 1975 년에 폐쇄되고 말았다. 또 잇달은 양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모원을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봉사하
고 있던 수녀회는 매우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어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의 남북 분단, 베트남의 공산화 등 크나큰 시련이 밀어닥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선교의 열은 계속되어 1930년에 이탈리아와 캐 나다를 위시하여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1949), 마다가스카르(1955), 대만(1960) 미국(1963), 브라질(1965), 카메룬(1965), 인도네시아(1967), 아일랜드(1972), 아이티(1972), 페루(1981), 이스라엘(1981), 오스트레일리아 (1984), 콜롬비아(1997), 중국(1997) 등으로 진출하였다.
수녀회의 현대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1962년에 총본부를 로마로 옮긴 일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새로운 가르침에 따라 수도 생활의 쇄신이 이루어진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1989년과 1995년에 열린 수도회 총회는 300년을 살아온 수녀회가 새 세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영성적 심화에 역점을 둔 총회였다. 이와 같은 수녀회의 쇄신 노력에 따라 1998년 현재 세계 28개 국에서 4,000여 명의 회원들은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박애 수녀회' 라는 창립 초기와 같은 소명 실현에 투신하고 있다.
〔영성과 사도직〕 창설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녀회가 지탱해 온 근원적인 힘은 성령의 은사에 기인한다. 창설 당시 루이 쇼베 신부와 수도 공동체의 회원들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통하여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영성에 근원을 둔, 사람들에 대한 애덕(愛德, charity)의 삶으로써 나타났으며, 이와 같은 은사적 삶은 이후에도 수녀회의 전 역사와 회원 각자의 삶 안에서 뚜렷한 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무지(無知)와 가난, 질병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 모든 것이 빚어 내는 어두움을 구원자이 신 그리스도의 빛 안에 새로 태어나게 하는 영성, 곧 파스카의 영성이 모든 회원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원적인 힘이며 수녀회가 실천하는 애덕이다. 이 파스카의 영성 안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만을 믿고 살아가는 단순성 또한 회원들의 삶을 특징짓는 요소이다. 이러한 영성적 바탕은 프랑스 영성학파의 영향을 받아 수녀회를 창설하였던 루이 쇼베 신부의 정신과 "세속을 떠나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협조자 마리 안 드 티이의 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립 초기부터 회원들의 중점적인 활동은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그 마을에서 인간적 ·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것" (회칙 초안 1장)이었다.
현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사도직은 교육, 의료, 전교, 사회 사업, 특수 사도직, 해외 선교 등 다양하다. 특히 수녀회 고유의 카리스마와 함께 현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신앙 교육,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적 사랑, 형제적 생활" 을 우선적 과제로 삼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한 각오를 다지고 있다.
〔한국 진출과 성장 과정〕 프랑스 내에서 국유화의 도전에 직면한 수녀회는 위기 타개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해 외 선교 활동에 착수하게 되었다. 시련은 성령의 바람이 되어 새로운 선교의 보고인 동아시아로 초대하였던 것이 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회원들이 첫발을 내디딘 1888년은 조선 왕조가 오랜 동안의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개항을 단행한 지 겨우 12년이 지난 때였다.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개항에 대한 척사 위정론자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고 곳곳에 박해의 잔해가 남아 있던 때였다.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한 1888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편의상 네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 한국 진출과 정착(1888~1911) : 한국에 정착한 후 대구교구가 설정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888년 7월 22일 네 명의 외국 선교 수녀들이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J. Blanc, 白圭三, 1844~1890) 주교의 요청에 따라 이 땅에 버림받은 고아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프랑스 모원과 사이공 관구로부터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프랑스인 자카리아(H. Zacharie) 수녀와 에스텔(V. Estelle) 수녀, 그리고 중국인 비르지니(Virginie Axung) 수녀와 프란치스카(Francisca Si Mouille) 수녀였다. 종현(鐘峴, 현 명동)에 정착한 선교 수녀들은 교구로부터 고아원을 인수받아 운영하면서, 그들이 입국한 지 1주일 만에 입회한 5명의 한국인 지원자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해나갔다. 첫 한국인 지원자 가운데 3명의 수녀는 일찍 병사하고 말았지만, 김해겸(쌘폴) 수녀와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는 오랫동안 이 공동체에 몸담으면서 한국 수녀회의 초석이 되어 주었
다.
수녀회는 언어 · 문화 · 풍습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 가난, 전염병 등을 극복해 가며 차츰 기틀을 다져 나가 1894년에는 제물포(현 인천)에 분원을 설립했고, 시약소 운영과 함께 고아들을 돌보았다. 또한 수녀들은 제물포 · 약현 · 종현 등의 여학교에 교사로 파견되었으며, 1909년 이후에는 북으로는 평양 관후리 · 진남포 · 매화동, 남으 로는 멀리 제주도에까지 분원을 설립하였다. 수녀들의 사도직 역시 학교 교육 · 본당 사목 · 시약소를 통한 의료 사업 등으로 다양해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아동 복지 분야와 더불어 학교 교사로서 수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응답한 결과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이 가속되었고, 급기야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에 걸쳐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교회 또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본당을 중심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수녀들을 청하였다. 이와 같이 수녀회는 교회의 충실한 협조자로서 하느님과 겨레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복음 선포를 위하여 봉사하였던 것이다.
제2기 성장하는 수녀회(191~~1948) : 대구교구가 설정되어 대구 지역에서 수녀회의 활동이 다져지게 된 1911 년부터 한국 관구가 설립된 1948년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수녀회는 민족과 함께 일제의 탄압과 양차세계대전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을 겪으면서도 대구에 수녀원과 수련원을 설립하는 등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1911년에 뮈텔 주교가 관할하고 있던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하여 대구교구를 신설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1875~1938) 주교를 임명하였는데, 드망즈 주교는 교구 사목의 기반을 다져 가는 과정에서 서울과는 독립된 별개의 수녀원 을 가짐으로써 대구 지역 사도직의 활성화를 원하였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서울 원장에게 수녀 파견을 청하지 않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총장 수녀에게 대구로 회원들을 파견해 줄 것을 직접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련원까지도 대구에 독립적으로 세울 것을 계획하고 수차례에 걸쳐 이를 요청한 결과, 1923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수련원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925년에는 따로 대구 수련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27년에 7명의 대구 최초의 수련 수녀들이 착복한 데 이어 1931년에는 6명의 서원 수녀가 탄생하였다.
사도직 또한 전국적으로 다양하고 폭 넓게 전개되어 이 시기에 30여 개의 분원이 신설되었으며, 교육과 의료분야에서 봉사할 정식 자격을 갖춘 수녀 양성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교육 사도직 분야에 있어서는 종래의 보통 교육 중심에서 점차 중등 교육 및 고등 교육으로까지 발전하여 계성여학원과 같은 고등 교육 기관과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를 비롯한 여러 중등 학교를 설립 · 운영하였다. 또 의료 사도직 분야에서도 서울의 성모병원과 대구성 요셉 병원 등에 수녀들이 파견되어 교회의 의료 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31년에 연길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에 김해겸 수녀와 이 공자가 수녀가 지원자 선생 수녀로 파견되어 수련을 도와 주었으며, 1945년에는 '성가 소비녀회' 에 강부길(康富吉, 데클라) 수녀와 김덕생(金德生, 아델라) 수녀가 각각 원장과 수련장으로 파견되어 회원 양성을 위한 수련을 시작하였다.
수녀회는 1942년 한국인 주교 탄생, 1943년 수녀회에 한국인 원장 임명, 1945년 8 · 15 광복 등 교회 안팎의 변화에 따라 1948년 일본 관구로부터 독립하여 한국 관구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 지역을 통치한 공산당의 탄압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북한 지역에서의 사도직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제3기 한국 관구 설립(1948~1967) : 한국 관구가 설립된 1948년부터 두 개의 관구로 발전한 1967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한국 관구가 설립된 후 의욕적으로 발전을 도모하던 수녀회는 1950년의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또다시 혼란과 시련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수녀들은 양육하고 있던 고아들을 데리고 대구 · 부산 · 제주도 등지로 피난하였으며, 어려운 피난 생활 가운데서도 전쟁 고아들과 전재민들을 돌보고 부상병들을 간호하고 피난 학교를 개설하는 등 계속하여 사도직을 수행해 나갔다. 한편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황해도 매화동 분원에 파견되었던 김정자(안젤라) 수녀와 김정숙(마리안나) 수녀가 공산당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고, 초대 관구장 베아트릭스(0. Beatrix) 수녀와 수련장 에우제니(D. Eugènie) 수녀는 납북되어 '죽음의 행진' 을 하던 중 베아트릭스 수녀가 피살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수녀회는 사도직 활동의 재정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60년에 첫 한국인 관구장 방 아네스 데레사 수녀의 탄생으로 수녀회는 비약의 계기를 맞게 되었으며, 1962년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수도 생활 전반에 걸친 쇄신과 현대 사회에 대한 수도 생활의 적응이 촉구되었다. 이러한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1968년에 열린 수도회 총회에서 제정된 새 회헌과 회칙이 《생명의 책》이라는 제목으로 엮어져 각 분원에 배부되었다. 그리고 수도 생활의 쇄신을 위한 새로운 삶의 지침과 방향을 꾸준히 모색해 오던 중 회원수가 400명을 넘어서고 사도직 활동의 분야도 확대되어 가자, 수녀회에서는 효율적인 봉사와 복음 선포를 위하여 관구 분리를 신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여에 걸친 제반 준비 끝에 마침내 로마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1967년에 서울 관구와 대구 관구로 발전적 분리를 단행하였다. 이때 서울 관구는 서울 · 인천 · 수원 · 대전 · 청주교구 내의 분원들이었고, 대구 관구는 대구 · 광주 · 부산 · 마산 · 전주교구 내의 분원들이었으며, 대구 관구 초대 관구장으로 김복분(金福分, 젤멘) 수녀가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도 역시 다른 수녀회의 창설에 도움을 주었는데, 1951년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의 초대 수련장으로 황수자(베네딕다) 수녀가 파견되었고, 1952년에는 '포항 예수 성심 수녀회' 에 김현복(젤멘) 수녀, 김순자(벨라뎃다) 수녀, 이용선(바틸다) 수녀가 원장과 수련장으로 파견되어 수련을 도왔다.
제4기 현대 사회 안의 수녀회(1967~현재) : 관구 분리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기이다.
관구 분리로 인한 얼마 동안의 수습 단계를 거친 후 양관구에서는 수도자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려는 내적 심화 작업과 수녀회 생활의 자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는데, 각 사도직 분야의 인재 양성뿐만 아니라 오래되어 위험한 수녀원 건물들을 개축 또는 신축하였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와 복지 국가의 건설을 위한 정치적 · 사회적 요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수녀회는 현 시대 가 요청하는 사도직의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 따라서 종래의 본당 중심의 사도직에서 차츰 사회 사업 및 특수 사도직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였다. 또한 1981년에 홍성자(베네딕도) 수녀를 중앙 아프리카에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24명의 회원들이 중앙 아프리카, 아일랜드, 알래스카, 영국, 로마 총원과 샬트르 모원, 몽골, 캐나다, 중국의 북경과 훈춘 등에서 교리 및 성서 교육 · 환자 간호 · 부녀자 교육 사회 사업 · 컴퓨터 교육 · 집안일 · 선교지 수녀 양성 등 다양한 사도직에 종사하고 있다.
이 시기에도 역시 1969년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의 수련자 3명이 2년여 동안 명동 본원에서 함께 수련을 받았고, 1981년에는 '삼성산 선교 수녀회' 수녀들이 용산 휴양의 집에서 1년 동안 머물면서 지원자들을 받으며 기반을 잡아 나갔다. 또 1984년 한국에 진출한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의 두 수녀가 새 공동체를 마련하기까지 10개월 동안 명동 본원에서 함께 생활하며 준비하였고, 1991년부터 1998년 4월까지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회' 에 박종묵(마리 루시) 수녀가 파견되어 봉사하였으며, 1992년부터 현재까지 홍계식(데레사) 수녀와 박종숙(아네스) 수녀가 '나자렛 예수 자매회' 에 파견되어 수련을 돕고 있다.
현재 서울 및 대구 관구의 1천여 회원들은 본당과 학교, 병원, 사회 복지, 특수 사도직 등 170여 곳의 사도직 현장에서 교회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도자의 모습 자체로 애덕의 증거가 되어 민족과 교회에 봉사하고 있다. 특별히 선교 3세기를 맞이한 한국 교회 안에서 제3 천년기를 맞는 그리스도 교회가 지향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실현을 위해, 한국 최초의 수도회로서 토착화의 사명과 외방 선교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수녀회의 카리스마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 수녀회 설립 이후의 사도직 현황과 발전〕 교육 사도직 : 수녀회의 교육 활동은 종현의 천주교 고아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회원들은 고아들에게 교리 교육과 보통 교육 및 직업 교육을 실시하여 자립을 준비시켰으며, 제물포 고아원에서도 서울에서와 같은 형태로 고아들을 교육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1899년에는 제물포 수녀원에서, 1900년에는 종현에서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학 학교를 운영하였으며, 1908년부터는 지방 학생들을 위해 종현 수녀원 안에 기숙 학교를 마련하고 여성 교육에 종사하였다. 1900년대 이후에는 시대적 요청에 의해 많은 본당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수녀들을 초청하였는데, 1901년 약현 본당에, 그리고 1909년부터는 평양 · 매화동 · 진남포 등 북한 지역과 제주도에 수녀들이 파견되어 교육 사도직을 실천하였다. 그 후 일제하에서도 20여 곳의 초등 교육 기관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초등 교육의 발전에 한몫을 담당하였다. 또한 많은 곳에서 유년반 형태로 유치원 교육을 실시하여 우리 나라 유치원 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말부터 중등 교육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회원들은, 광복 후 잇달은 민족적 시련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헌신을 지속하였다.
오늘날 서울 관구에서는 계성초등학교, 계성여자고등학교, 논산 쌘뽈여자중 · 고등학교를 자체 운영하고 있으 며, 박문초등학교, 매괴여자중학교, 매괴여자상업고등학교,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에 파견되어 봉사하고 있 다. 또 대구 관구에서는 근화여자중 · 고등학교를 자체 운영하고 있으며, 효성초등학교, 마산 성지여자중 · 고등
학교, 왜관 순심여자중 · 고등학교, 부산 데레사 여자 중· 고등학교,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부산 가톨릭대학교, 대구 가톨릭대학교, 지산전문대학에 파견되어 사도직에 임하고 있다. 현재 교육 사도직 분야와 파견 수녀는 서울 관구가 탁아원 4곳(6명), 유치원 14곳(14명), 초등학교 2곳(7명), 중 · 고등학교 3곳(30명), 대학교 3곳(6명)이며, 대구 관구는 유치원 21곳(23명), 초등학교 1곳(3명), 중 · 고등학교 6곳(33명), 대학교 4곳(7명)이다.
의료 사도직 : 수녀회의 의료 사도직은 사회 사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즉 1888년 서울에 도착하여 고아원을 운영하게 된 회원들은 고아원 안에 간단한 시약소를 부설하였는데, 이처럼 고아들의 진료를 위하여 시작된 시약소는 점차 무료 진료소로 발전하였고, 의원 또는 병원으로 성장해 가면서 일반인들을 위한 의료 활동으로 확대되었다. 종현 고아원에 있던 무료 진료소는 1936년에 성모병원이 개원되자 이에 병합되었고, 제물포 고아원의 시약소는 해성병원으로, 대구 백백합보육원 및 부산 소화보육원의 시약소는 성 요셉 의원과 데레사 의원으로 발전하였다.
회원들은 처음부터 의료 활동을 중요하고도 효과적인 전교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매화동 · 재령 · 진남 포 등 북한 지역의 본당 수녀들은 의료 사도직을 병행하였고, 남한에서도 논산 · 서산 · 경주 · 전주 · 나바위 본당에서 시약소를 운영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 수 있었다. 수녀회 직영 병원이었던 제기동 성모의원은 지금의 성 바오로 병원의 기반이 되었다. 성모병원, 대구 가톨릭 병원, 부산 메리놀 병원에서의 활동에서도 나타나듯이 수녀들은 교구의 의료 사업에도 적극 협조하는 한편, 수녀회에서 직접 운영하는 의료 기관에서도 사도직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소록도(1978)에서의 사도직과 심장 환자 요양원(1987) 그리고 기린 가정 간호의 집(1998) 등은 이 시대의 요구에 충실히 응답하는 사도직이라고 하겠다.
또 전문 의료인의 양성과 더불어 자선 진료에도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전문인으로서 의료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녀들의 능력과 봉사 및 성실성은 일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교회가 아닌 일반 기관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부터도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영역이 차츰 확대되어 가고 있다. 현재 병원 및 요양원, 간호의 집 등 의료 사도직 분야와 그곳에 파견된 수녀는 직접적인 의료 사도직과 원목 등을 포함하여 서울 관구가 7곳에 61명이며, 대구 관구는 5곳에 38명이다.
사회 사업 및 특수 사도직 : 이 땅에서 버림받은 고아들을 돌보는 천주교회의 성영회(聖嬰會) 사업은 우리 나라의 근대 아동 복지 사업의 효시이다. 한국 개화기 천주교회는 효율적으로 고아 구제 활동을 펴 나가기 위해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에 입국한 수녀들은 교구로부터 종현 고아원을 인수받아 한국에서의 첫 사도직을 실천하였는데, 이 고아원이 바로 성 바오로 보육원의 모체이다. 그 후 수녀들은 여러 곳에서 고아 구제 사업을 전개하여 1894년에 제물포 고아원(현 해성보육원), 1915년에 대구 백백합보육원 1946년에 부산 소화보육원 등을 운영하면서 무의탁 어린이의 보호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고아나 기아들을 보호 양육해 오던 수녀회는, 차차 사회 사업의 활동과 대상을 다양하게 발전시켜 나갔으며, 시대의 요청에 따라 보육원을 영아원 혹은 재활원, 어린이의 집 등으로 전환시켜 갔다.
현대 사회는 노인 · 청소년 · 장애인 · 도시 빈민 등 고독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요청하고 있다. 이에 수녀회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소명과 수녀회의 고유한 카리스마에 따라 여러 분야의 사회 사업 사도직에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샌뽈 양로원(1953)을 시작으로 애덕의 집(1985), 서울 시립 동부아동 상담소(1988),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1990), 소년 예수의 집(1991), 백선 바오로의 집(1992), 군위 안나의 집(1992), 감만 복지관(1993), 소년 예수의 작은 집(1996), 성모의 집(1996) 등의 설립을 통하여 이러한 노력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한국 전쟁 당시 부산의 육군병원에서 군인들을 간호하고 전교한 데서 비롯된 수녀회의 특수 사도직도 점차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군인 사목, 교도소 후원회, 교육관과 연수원을 통한 사회 교육과 영성 지도, 교구 사목에 관한 협조 등은 수녀회의 주요한 특수 사도직 분야이다. 특히 1998년 4월에 국가의 경제적 위기로 인하여 많은 실직자들이 발생하자 이들의 구직 상담과 급식을 위해 서울대교구가 명동에 설립한 '평화의 집' 에서 수녀들이 봉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봉사는 각 시대의 요청에 긴급히 응답하는 창설 당시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늘도 더욱 큰 사도적 열성과 복음적 정신에 따른 봉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사회 사업 및 특수 사도직의 분야와 파견 수녀는 서울 관구가 보육원 1곳(6명), 양로원 2곳(11명), 청소년 복지 4곳(15명), 행려 · 장애인 · 도시 빈민 4곳(11명), 기타 10곳(31명)이며, 대구 관구가 어린이의 집 2곳(6명), 양로원 1곳(9명), 청소년 복지 1곳(3명), 장애인 2곳(16명), 복지관 1곳(2명), 기타 5곳(13명)이다. 전교 사도직 : 르베스빌 본당 사목의 활성화를 위하여 시작된 수녀회 첫 공동체의 활동은 그 마을의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방문하고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일이었으며,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 영적 품위를 높이고자 하는 데 있었다. 한국에서의 사도직 역시 본당에 속한 작은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그 마을의 가난한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형태로 시작되었었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조선 교육령' 의 반포로 교육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교육 사도직의 실천에 제한을 강요당하게 되면서 본당 수녀들의 활동은 점차 교리 교육, 전례 준비, 본당 내의 단체 지도 등으로 국한되었다. 그리고 8 · 15 광복 후 사회가 전문화되어 감에 따라 교육 및 의료 분야가 본당 활동의 영역에서 독립되었고, 본당 사도직은 전교 위주의 사도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신자 배가 운동이 강 조되었고 그에 따른 본당 신설로 본당 전교 수녀 요청이 더욱 커졌는데, 1968년부터 1988년까지 20년 사이에 서울 관구 신설 본당 분원이 51개소, 대구 관구가 41개소였던 것을 보면 이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와 수녀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평신도들의 활성화로 말미암아 수녀회는 초창기 본당 사도직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의 영역을 되찾고, 수녀회의 카리스마를 좀더 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전교 사도직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전교 사도직의 분야와 파견 수녀는 서울 관구가 본당 62개(145명)에 공소 1개소(2명)이며, 대구 관구가 본당 59개(140명)에 공소 1개소(2명) 그리고 해외 교포 사목 2곳(3명)이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서울대교구敎區總覽》,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울 教區年報》 I . Ⅱ , 천주교 명동 교회, 1984/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 총람》, 대 교구 홍보국, 198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답동 대성당 100년사》, 천주교 답동 교회, 1989/ 天主教 釜山教區 편, 《釜山教區三十年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인천교구사 편찬위 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 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I ~Ⅲ, 천주교 명동 교회/ 一, 《뮈텔 주교 일기》 4~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