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중국 천주교회 제2의 창설자. 한자 이름은 탕약망(湯若望)이고 자는 도미(道未). 17세기 중반 중국 천주교회의 유지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서양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정식 중국 관료가 되어 중국의 역법(曆法) 및 과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동서 문화 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생애와 중국 선교〕 1592년 5월 1일 독일 쾰른(Köl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603년에 그곳에 소재한 예수회 중등학교인 트리코로나툼(Tricoronatum)에 입학한 아담 샬은, 1607년 말경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로마에 있는 독일 신학원(collegium germanum)에 들어가 1611년 9월까지 3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3년 10월까지 수련기를 거친 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 신학원(col-legium romanum)에 입학하였으며, 1616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여름 로마 신학원을 졸업하였다.
1616년 1월 2일에 이미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희망하였던 아담 살은 이듬해 10월 18일 로마를 떠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가 1618년 4월 리스본을 출발하여 10월 4일에 인도 고아(Gôa)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약 1년 반 동안 머무른 뒤, 다시 1619년 5월 20일에 고아를 출발하여 7월 15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1616년과 1622년 중국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박해로 1622년 가을까지 마카오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이때 그는 제1차 박해 때 남경(南京)으로부터 추방당한 바뇨니(Alphonse Vagnoni, 王豊肅, 또는 高一志, 1568~1640)에게서 중국 어문을 학습하였다. 제2차 박해에 따른 위험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1622년 가을, 아담샬은 피구에레도(Rodr de Figueredo, 費樂德, 1594~1642), 리베이로(Jean-Melchior Ribeiro, 黎伯度, ?~1654)와 함께 디아즈(Emmanuel Diaz, 李瑪諾, 1559~1639)의 인도로 마카오를 떠나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였다. 그는 광동(廣東)을 거쳐 항주(杭州)에서 북경 예수회 선교 단장인 롱고바르디(Nicololo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와 합류하여 이듬해 1월 25일 북경에 도착하였으며, 도착 직후에는 유럽에서 가지고 온 수학 서적과 과학 기구들의 목록을 중국 황실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중국 관리와 친교를 맺으면서 1623년 10월 8일과 1624년 9월의 월식을 예측해 주기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월식에 관한 논문을 저술하였다. 이 첫 번째 한문 천문서는 서광계(徐光啓, 1562~1633)에 의하여 예부(禮部)에 진정되었다.
북경에서 몇 년 동안 중국의 언어를 익힌 아담 살은 1627년 여름부터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 지역을 맡아 1630년까지 활동하였다. 아담 살은 서안에 머무르던 1629년에 서안 교회를 건립하였고 그의 최초의 한문 종교서인 《주제군징》(主制群徵)을 저술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성인 전기인 《숭일당 일기 수필》(崇一堂日記隨筆)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629년 9월 22일 서광계의 건의로 역국(曆局)이 개설되면서 아담 살은 1631년 1월 3일부터 수력(修曆)에 참여하게 되었다. 역국에서의 그의 주 임무는 중국력의 개수(改修), 천문 기기의 제작, 서양 역서의 번역 등이었는데 이 수력 작업의 결과 1631년부터 1634년까지 5차례에 걸쳐 137권의《숭정력서》(崇禎曆書)가 황제에게 상정되었다. 이와 함께 1634년에는 해시계, 망원경, 컴퍼스, 성구(星球) 등 천문 의기(天文儀器)를 제작하여 황실에 진상하였고, 1640~1641년에는 숭정제(崇禎帝)의 명에 따라 대포 20문과 경포 500문을 제조하였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1643년에는 포병술에 관한 저술 《화공계요》(火攻擊要) 3권을 출간하였다.
한편 1644년 명 · 청(明淸)이 교체된 후에도 아담 살은 북경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북경에 입성한 청조가 한인(漢人)들을 북경의 남 · 북부 지역으로 이주시킬 때, 그는 북경 내성에 거주하며 선교와 수력을 계속할 수 있기를 청원하여 황제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곧 이어 다음해인 1645년의 달력을 만들었고, 또 왕조 교체기에 손상된 천문 기기의 보수 계획과 8월 1일의 일식을 예측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아담 샬의 신법에 의하여 수정된 역을 '시헌력' (時憲曆)이라고 명명하고 천하에 반포하였으며, 천문 역법에 관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1644년 11월 25일 그를 국가의 역법을 총관하는 흠천감 감정(欽天監 監正)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11월 19일 아담 살은 《숭정력서》를 수정 편찬한 《서양 신법 역서》(西洋新法曆書) 26권을 황제에게 바쳤고, 이 역서 간행의 공으로 이듬해 5월 10일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에 봉해졌다. 그는 특히 순치제(順治帝)와 개인적인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황제는 그를 '존경하는 조부(祖父)' 라는 뜻의 만주어 '마파' (瑪法)라고 불렀으며, 그를 자주 방문하여 여러 관작과 명예 칭호〔通玄敎師〕 및 토지 등을 하사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1650년에 하사한 북경 선무문(宣武門) 내의 교회 부지로, 1652년에 아담 살은 이곳에 자신이 설계한 중국 최초의 유럽식 교회인 남당(南堂)을 건축하였다. 또 1654년에는 그의 장지로 사용할 넓은 부지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는 순치제의 개종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명성이 중국 전역에 알려져 그리스도교 교세 확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1650~1664년 사이의 중국인 개종자는 10만 명에 달하였고, 1661년까지 운남(雲南)과 귀주성(貴州省)을 제외한 13개 성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그러나 아담 살은 1664년 8월부터 1665년 4월에 걸쳐 발생한 역국 대옥(曆局大獄)으로 커다란 곤란을 겪었 다. 즉 이전부터 아담 샬의 서양 역법과 천주교의 사교성(邪教性)을 비판하던 양광선(楊光先)은 1663년에 이조 백(李祖白)이 저술한 《천학전개》(天學傳慨)를 문제 삼아 아담 샬을 고발하였다. 양광선은 1664년 7월 26일 <청주사교장)(請詐邪秘狀)을 예부에 제출하여 아담 살,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1688), 불리오(Louis Buglio, 利類思, 1606~1682), 마갈엥스(Gabriel de Magalhaens, 安文思, 1610~1677) 등 당시 북경에 있던 4명의 예수회 신부들과 《천학전개》의 서문을 쓴 허지점(許之漸), 이를 배포한 허겸(許謙), 아담 샬의 시종인 반진효(潘盡孝) 등을 대청률(大淸律)의 모반과 요서 저작(妖書著作) 2개 조를 범한 대역죄로 고발하고, 모반의 우두머리로 아담 샬을 지목하였다. 재판은 1664년 8월에 개시되어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결과 1665년 3월 1일 아담 샬을 위시하여 흠천감의 교인 관리들에게 능지처사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선고 다음날인 3월 2일과 3월 5일에 북경 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것을 하늘이 아담 샬의 사형 선고를 불허한다는 증거로 해석하였고, 또 순치제의 모후(母后)인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도 그를 옹호함에 따라 3월 16일자로 사형이 감면되었다. 얼마 뒤 석방된 그는 1666년 8월 15일 병으로 동당(東堂)에서 사망하였고, 1669년 8월 11일에 복권되었다.
〔전교 활동〕 중국에서 아담 샬의 활동은 크게 선교사로서의 활동과 조정 봉사자(朝廷奉仕者)로서의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아담 샬의 주관적 측면에서 보면 전자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종적(從的)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의 그의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파라는 최종 목표를 위한 다양한 양식 내지는 제반 단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전교 활동에는 사목 행위 · 교회 건립 · 종교 서적의 저술 및 간행 등 좁은 의미의 활동 외에 넓게는 중국 문화에의 적응 · 서양 역법의 도입 · 학술 서적의 저술 등도 포함된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결국 아담 샬의 중국 선교 방침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 이래 적용된 문화적 적응주의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중국의 언어와 생활 관습의 학습과 구사, 중국 고전(古典)의 연구, 중국식 성명, 자(字)의 사용, 중국 복식의 착용, 서양 물품의 선물, 심지어 양자(養子)의 채택 등을 통해 중국 선교에 임하였다. 그 결과 중국에 많은 새로운 서양 문물(서적, 시계, 지도, 지구의, 천문 의기 등)이 유입되었고, 반대로 중국 문화가 서양에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흠천감 감정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양 역법을 중국에 적용한 것은 중국 문화의 발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아담 샬의 공헌이다. 이 밖에도 그는 대포 주조, 학술서의 저술과 번역, 기타 각종 자문 활동을 통해 서양의 자연 과학과 기술적 지식을 중국에 소개하였다.
한편 좁은 의미의 전교 활동에는 통상의 사목 활동인 전교 · 세례 · 각종 종교 의식의 집전 · 신자들의 보호 활동 · 교회 건립 · 종교서의 저술 및 출판 사업 등이 포함된다. 그는 1627 ~ 1630년 서안에서 활동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활동이 북경에 집중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사목 활동 중 특기할 것은 조정 관리와 궁정 관원, 특히 황제의 개종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631년에는 10명의 태감(太監)이 세례를 받았고, 1640년에는 40명이 넘는 태감과 140명 이상의 종실(宗室)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1644년 당시 북경에 입경하였던 조선의 소현 세자(昭顯世子)와의 접촉을 통하여 조선 포교도 시도했다. 소현 세자는 병자호란 후 1637년부터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심양(瀋陽)에 머무르다가 청이 입관(入關)하자 순치제를 따라 북경에 들어왔다가 1664년 9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약 70여 일 간 북경에 머물렀는데, 이때 아담 샬과 소현 세자는 서로 수차례의 방문을 통하여 서양 학문과 천주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담 살은 귀국하는 소현 세자에게 역서(曆書) · 천주교 서적 · 천구의(天球儀) · 구세주상 등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교는 소현세자의 급서(急逝)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1650년과 1652년 두 차례에 걸쳐 프란치스코회의 카발레로(Antonio Caballero de Santa Maria)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키려는 그의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상과 저서〕 아담 샬의 중국 사상에 대한 인식은 중국 예수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였다. 즉 유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수용하고 불교와 도교는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유교 사상도 두 개의 다른 흐름으로 나누어 당시 사상계를 지배하던 신유학(新儒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에 선진(先秦) 시대의 원시 유교(原始儒敎)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진 유학은 인륜과 도덕을 중시하고 인격신(人格神)을 인정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유교의 오륜(五倫)은 그리스도교의 십계(十誡)와 동일하고 충(忠) · 열(烈) · 절(節) · 효(孝) 등의 유교적 덕목도 결국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덕목임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와 유교는 근본적으로 동일선을 추구한다는 그리스도교의 보유(補儒), 합유론(合儒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즉 성리학(性理學)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의에 상치되는 유물론적 · 무신론적 사상 때문에 불교나 도교처럼 이단시하였고, 이에 성리학의 태극(太極) · 음양 천지(陰陽天地) . 오행(五行) · 무신론적 혼(魂)과 정신 등의 개념을 《주제군징》과 《주교연기》(主敎緣起)를 통하여 비판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전통 사상과 중국에 새로운 종교적 이념을 접합시키기 위한 아담 샬의 노력은 서광계, 이지조(李之藻, 1565~1630) 등 유가 개종자들의 동의와 지지를 받았으나, 양광선 등은 강력히 반발하여 역국 대옥을 일으키는 동기로 삼았다.
한편 아담 살은 16세기 말~18세기 후반 사이에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특히 천문 역법서를 많이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숭정력서》와 《서양 신법 역서》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특수한 주제의 과학서로는 서양의 광학(光學)을 최초로 중국에 소개한 《원경설》(遠境說) 화기(火器)의 제조법과 운용법을 상술한 《화공계요》, 광산 채굴에 관한 번역서 《곤여격치》(坤輿格致)가 있다. 그리고 종교 사상서로는 《주제군징》, 《숭일당 일기 수필》, 《진복훈전》(眞福訓詮) , 《진정서상》, 《주교연기》 등 5종을 저술하였다. 이 중 《주제군징》은 신의 존재와 그의 피조물인 세상만물에 대한 주제를 해박한 자연 과학적 지식으로 해설한 것이고, 서안에서 번역하였지만 1638년에야 간행된 《숭일당 일기 수필》은 14명의 그리스도교 성인 · 성녀전이며, 1634년에 저술한 《진복훈전》은 예수의 산상 설교인 진복 팔단을 해설한 책이다. 또 1640년에 저술한 《진정서상》은 예수의 일대기로서, 숭정제에게 바치기 위하여 저술되었으나 몇 년 후에는 일반 신자들과 전교용으로 대량 출판되었으며, 《주교연기》는 청나라 초기에 저술된 교리서로서, 창조주로서의 천주의 존재 ·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존재 · 진정한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해설하였다.
이외에 중요한 저술로는 아담 샬이 1619년부터 1658년까지 자신과 중국 그리스도교회에 관계된 사실들을 기 록한 라틴어 회고록(Historica Relatio)이 있다. 이것은 당시의 경험을 본인이 직접 서술한 것이므로 개인사는 물 론 중국 그리스도교회사, 명말 청초의 역사와 관련된 사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의의 및 평가〕 중국 천주교회사에서 아담 살은 마테오 리치에 이어 제2의 창설자로 불린다. 그는 명 · 청 왕 조 교체기의 와중에 그리스도교를 중국에 존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여 청조의 순치와 강희(康熙) 초년에 극성기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것은 명, 청 44년 동안 조정에서 활동한 것이 커다란 힘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천주교가 무언의 공인(公認)하에 전교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 샬의 선교사적인 업적은 마테오 리치에 의해 시작된 사업의 계승일 뿐만아니라 이의 수정 · 보완 · 발전을 통해 중국 그리스도교의 개화기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서양의 자연 과학과 기술적 지식, 특히 서양 역법을 중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여 수용하도록 한 것은 동서 교류사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아담샬 ; → 소현 세자)
※ 참고문헌 아담 살, Historica Relatio, Ratisbonae, 1672/ 一, 《主制群徵》, 영인본, 新會, 1929/ -, 《主教緣起》(清初), Vaticana Racealta Generale Oriente Ⅲ, 224, 2-5, 소장본/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esuites de l'ancieme Mission de Chine 1552~1773, vols. 2, Paris, 1932/ A. Väth, Johann Adam Schall von Bell, S.J., Köln : Bachem, 1933/ 장정란, <아담 살 研究一 中國 傳教活動과 그에 따른 思想論爭을 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93. 〔張貞 蘭〕
샬 폰 벨, 요한 아담
Schall von Bell, Johann Adam(1592~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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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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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살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