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마이 하자켄(Shammai ha-Zaken, 기원전 50~서기 30)이 창설한 학파. 힐렐 학파(בית הלל)와 대조를 이루면서 2세기경까지 유대 종교 사회에서 율법 해석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샴마이〕 샴마이는 힐렐(Hillel)과 함께 주고트(zugot, pairs)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주고트란 유대인의 최고 법 정이자 행정 기구인 산헤드린을 거느린 지도자이자 학자를 뜻한다. 샴마이의 이전 직업이 건축가였다는 기록 이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나, 힐렐이 산헤드린의 나시(nasi, 의장)로 있을 때 에세네파인 므나헴(Menahern)의 뒤를 이어 산헤드린의 '재판 관할자' (avbet din)로 지명되었다고 한다. 힐렐과 함께 그는 사두가이파에 대립한 바리사이파의 일원이었다. 바빌론 출신으로 성인이 된 후 예루살렘에 온 힐렐과는 달리 샴마이는 유대 본토민이었는데,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의 율법 해석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샴마이와 힐렐에 관한 많은 일화들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기질, 즉 샴마이는 완고한 반면에 힐렐은 자애로운 성격을 지녔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샴마이는 완고한 기질에 맞게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도 힐렐보다 항상 더 엄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기질에서 연유한 것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원칙을 고수하려는 입장에서 기인한 것이다. 전승들에 관해 보수적이었던 샴마이는 이러한 입장에서 그것을 발전시켜 나갔지만, 항상 완고한 입장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으로 전수된 20개의 할라카(הֲלָכָה, 법) 중에서 약 3분의 2에서는 완고한 견해를 보인 반면에 나머지에서는 관대한 견해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샴마이와 힐렐은 궁극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된 입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기원과 특징〕 탈무드 전승은 1세기에 바리사이파와 그들의 초기 랍비 후계자들이 히브리어로 '베트' (בֵּית, 집)라고 부르는 두 개의 학파로 나누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 두 학파는 창설자인 두 현자의 시대부터 2세 기경까지 존속하였다. 또 탄나임 문학(tannaitic literature), 할라카, 할라카 미드라쉼(halakhic Midrashim), 하가다(הֲלָכָה), 등에는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논쟁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논쟁들의 대부분은 할라카의 세부 실천 항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유대 율법의 엄격하고 문자적인 해석을 옹호하였던 샴마이 학파는 비교적 유연한 해석을 지지하였던 힐렐 학파와 대조를 이룬다. 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샴마이 학파의 이러한 보수적 경향을 그들의 사회적인Ginzberg) 혹은 율법 이론(S. Safrai)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그러한 모든 시도는 매우 협소한 근거에 기초하는 것이며 사변적인 것이다. 또한 두 학파 사이의 모든 논쟁들이 율법적인 문제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힐렐 학파와의 논쟁과 차이점〕 두 학파 사이의 논쟁은 네 가지 부분에서 관련이 되어 있다. 첫째, 판단과 논리적 추론에 기초한 할라카의 세부 실천 사항들의 영역이다. 예컨대 샴마이 학파는 어떤 여인이 남편의 죽음을 입증하는 사람의 진술을 증거로 해서 재혼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힐렐 학파는 그러한 증거에 근거하여 재혼할 수 있다는 견해를 표방하였다. 둘째, 금지 규정의 영역을 정하고 그 금지 규정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의 정도를 결정하는 영역이다. 샴마이 학파는 제사장적 · 레위적인 의무와 관련된 율법을 준수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에게서 향유를 구입한 자에게 십일조 과세를 지우는 데 반해 힐렐 학파는 이를 면제한다. 셋째, 할라카 미드라쉼과 관련된 영역이다. 예컨대 샴마이 학파는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내에게서 부정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내와 이혼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이는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신명 24, 1)라는 성서 구절 때문이라고하였다. 반면에 힐렐 학파는 이 성서 구절이 단순히 아내가 남편의 음식을 망쳐 놓았을 때라도 남편은 개인적으로 아내에게서 부적절한 면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두 학파가 율법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샴마이 학파는 문구에 엄격히 적용한 반면, 힐렐 학파는 좀더 폭 넓은 경우들을 대비시킨 예라 하겠다. 넷째는 하가다의 종교 철학과 윤리 영역이다. 예컨대 샴마이 학파는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힐렐 학파는 인간이 창조된 것이 더 좋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두 학파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 배후에 놓여 있는 기본적인 원칙들을 규명하려고 시도해 왔다. 일반적인 설명은 그 차이들이 두 학파 창설자들의 개인적인 특징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즉 힐렐은 온화하고 친절하나 샴마이는 엄격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힐렐과 샴마이 사이의 개인적인 논쟁은 거의 극소수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은 부적절하다. 또 두 학파의 논쟁을 사회적 · 경제적인 갈등으로 간주하려는 주장도 있다. 즉 샴마이 학파는 상류 혹은 중산층 계급에 속한 반면에 힐렐 학파의 현자들은 사회의 하층 출신이며, 따라서 두 학파의 견해는 각각 이들 계층의 필요와 생활 방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샴마이 학파가 부유한 중산 계층에 속하였다는 증거는 매우 빈약하다. 두 학파의 차이점을 서로 상이한 할라카적인 전망과 개념, 그리고 이해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이론들 역시 수용하기 어렵다. 이 이론들은 샴마이 학파가 할라카에 대한 일관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방법을 채택한 반면에, 힐렐 학파는 특별하고 이질적인 시각을 지닌 것으로 평가하였지만 이 이론들은 객관성이 결여된 논쟁들만 가지고 설명하였다. 아마도 서로 다른 접근 방법과 경향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인과 전승들이 결합되어 양 학파의 상이한 견해가 산출된 것으로 보인다.
두 학파가 태동한 사회적 혹은 개념적인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지라도 성서 본문의 설교적인 주석과 많은 할라카의 논의에 특정한 하나의 흐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샴마이 학파는 성서 구절의 분명하고 때로는 협소한 문자적인 해석의 경향을 띤 반면, 힐렐 학파는 이에 더 넓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할라카에 관한 힐렐 학파의 견해는 율법의 원칙들과 그 원칙들에 따른 이론적인 특징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샴마이 학파의 견해는 문자적이며 심지어 보수적인 접근 방법을 특징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양 학파의 상이한 해석 경향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랍비 문헌들에서 주의 깊게 주목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힐렐 학파가 더 엄격하며, 샴마이 학파가 더 관대한 사례들도 있기 때문이다.
〔영향력과 의의〕 샴마이 학파는 로마 통치에 대항한 열성당원(Zealos)을 후원했으며, 한때는 이 학파의 엄격한 해석들이 유대 공동체 내에서 힐렐 학파의 해석들보다 더 선호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샴마이 학파의 인원이 힐렐 학파 인원보다 많았던 한 랍비 회의에서는 18조목으로 만들어진 샴마이 학파의 엄격한 법령이 채택되기도했다. 그러나 성전 파괴 이후인 90년경에 얌니아(Jamnia)에서 개최된 유대인 회의에서는 힐렐 학파의 판결이 규범적인 것으로 채택되었으며, 샴마이 학파의 견해는 대부분 도외시되었다. 이후로 할라카는 힐렐 학파에 따라 규정되었고, 이러한 결정으로 인하여 힐렐 학파에 따른 규정이 명백한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전승들 대부분의 경우에서 샴마이 학파의 견해가 먼저 언급되고 있으며,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도 종종 그러한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초기에 두 학파의 규모와 영향력이 오히려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 랍비 운동은 결과적으로 힐렐 학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그렇다고해도 샴마이 학파가 모든 면에서 그와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일부 할라카가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였으며, 이 학파의 판결의 흔적들이 탄나임 문학과 심지어 아모라임 문학(amoraic literature, 아모라임은 200~500년의 유대 랍비 권위자를 말함)의 다양한 본문들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한다.
샴마이 학파의 비교적 완고한 해석 경향은 '현자 운동' (hakamic movement)과 랍비적인 유대교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샴마이 학파의 완고한 해석 경향의 영향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현자 운동의 여러 흐름들이 하나의 조류를 이루어 형성될 수 있었다. 또한 이와 동등하게 샴마이 학파의 완고한 해석 경향은 현자 운동의 일부가 율법(토라)의 준수와 거룩함에 대한 개념 정의에 있어서 더욱더 정교한 세부 항목을 제시하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 힐렐 학파 ; → 유대교)
※ 참고문헌 J. Bowker, Jesus and the Pharisees,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73/ L. Ginzberg, The Significance of the Halakhah for Jewish History, On Jewish Law and Lore, Cleveland, 1962, pp. 77~124/ R.Goldenberg, 《ABD》 5, p. 1158/ M.D. Herr, 《EJ》 14, pp. 1291~1292/ E.Lohse, Umwelt des Neuen Testaments,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1/ G.F. Moore, Judaism : In the First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The Age of Tannaim, vol. 1, Cambridge, Harvard Univ.Press, 1927, 1955/ J. Neusner, Judaism in the Beginning of Christicmit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 The Rabbinic Traditions about the Pharisees before 70, Leiden, 1971/ 一, Judaism : The Evidence of the Mishmah, Chicago, 1981/S. Safrai, Bet Hillel and Bet Shammai, 《EJ》 4, pp.737~7421 M. Simon, Jewish Sects at the Time of Jesu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7 [朴俊緒]
샴마이 학파
學派
〔히〕בית שמי · 〔라〕schola Shammai · 〔영〕jschoolofShammai
글자 크기
7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