샵베타이 즈비

Shabetaizew(1626~1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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샵베타이 즈비.

샵베타이 즈비.

17세기에 유대교의 메시아임을 자칭한 인물. 삽베타이의 자칭 메시아 선포를 믿고 따르던 무리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메시아 운동이 삽베타이주의(Shaobatarimin)였으며, 이 운동은 17~18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폭 넓게 확산되었던 유대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메시아 운동이었다.
〔생애와 활동〕 1626년에 현재 터키의 이즈미르(İzmir)인 항구 도시 스미르나(Smyma)에 정착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율법을 공부한 삽베타이는, 스미르나에서 가장 유명한 랍비 요셉 에스카파(Joseph Escapa)의 지도를 받고 18세에 율법학자가 되었다. 아울러 그는 《카발라》(Kabbalah)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문헌을 탐독하여 그 내용에 심취하였는데, 1642~1648년에는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자폐증 환자와 같은 성격을 드러냈다. 그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인 '야훼' 를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되는데도 감히 부르고 있다고 비난하였으며, 마귀들과 겨룬다는 이유로 외진 곳으로 가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의 끊다시피 하며 살았 다.
한편 1648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수만 명이 학살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라(Sarah)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인 처녀가 단신으로 피신하여 이탈리아 만토바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성(性) 관계가 난잡한 것 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었다. 샵베타이는 1664년에 카이로에서 이 처녀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이 결혼을 통하여 창녀와 결혼한 호세아 예언자를 본받으려 했던 것 같다.
메시아 사상의 전개 : 그 후 샵베타이는 데살로니카 · 이스탄불 · 예루살렘을 거쳐 1665년 4월 중순에는 가자 (Gaza)로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인 나단 벤 엘리사(Nathan Ben Elisa)를 만났다. 나단은 샵베타이를 메시아 로 추대하였고, 그 해 5월 31일에 샵베타이는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하였다. 샵베타이는 말을 타고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추종자들을 이스라엘 12지파의 사도로 임명했으며, 나단은 샵베타이의 예언자로 행세하였다. 그 해 9월 라파엘 요셉 첼레비(Raphael Joseph Chelebi)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단은, 샵베타이가 역사상 가장 큰 죄
인인 예수조차도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호언하였다. 또한 1665년 가을이 되면 샵베타이는 터키 술탄의 왕관을 물려받아 황제로 군림할 것이고 술탄은 그의 시종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하였다.
시리아 알레포(Aleppo)를 거쳐 1665년 9월 초순에 자기가 태어난 이즈미르에 도착한 샵베타이는 그 해 12월 12일 안식일에, 자신은 야곱의 하느님이 보낸 메시아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속량자라고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의속량일이 1666년 6월 18일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미래에 자신이 터키 술탄의 왕관을 차지하리라고 예언하였다. 한편 그를 반대하던 율법학자 하임 벤베니스테(Hayyim Benveniste)가 샵베타이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요구하자 샵베타이는 즉각 그를 파문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이름 '야훼' 를 발설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그 안식일이 지나자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율법학자 하나를 이스탄불로 급파하여 자신의 내림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665년 12월 30일 그가 뽑은 사도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스미르나에서 출항하여 이스탄불로 향하던 샵베타이는 이듬해 2월 6일 마르마라 내해에서 터키 당국에 붙잡혀 이스탄불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어 4월 19일에는 다르다넬스 해협 서안에 있는 갈리폴리(Gallipoli)의 아비도스(Abydos) 요새로 이송되었다.
배교와 죽음 : 그 해 9월 샵베타이는 아비도스 요새에서 이스탄불 서쪽 228km 지점에 있는 아드리아노폴리스 (Adrianopolis) 곧 지금의 에디르네로 이송되어 9월 15일에 술탄 메흐메드 4세(Sultan Mehmed Ⅳ)의 임석하에 재판을 받았는데, 여기서 그는 사형을 받든지 즉석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요구를 받고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그는 황제의 후한 급료를 받아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러나 그는 사이비 개종자이며 성생활이 방탕한 자라는 죄목으로 1672년 8월에 다시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이 듬해 1월 알바니아의 둘치뇨(Dulcigno)로 유배되었다. 1674년에 아내 사라가 죽자 데살로니카의 율법학자 요셉 필로소프(Joseph Filosof)의 딸 에스델(Esther)과 재혼한 그는 자신의 50회 생일을 맞은 지 두 달 만인 1676년 9월 17일 속죄의 날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평생 샵베타이를 메시아로 신봉하고 선전한 나단 벤 엘리사는 마케도니아의 스코플예(Skoplje)에서 1680년 1월 11일에 사망하였다.
〔샵베타이주의〕 샵베타이가 사망한 후에도 이 종파는 계속 번성하였는데, 추종자들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메시아 즉 삽베타이가 죽지 않았다고 확신하기까지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신념은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의 재강생 교리로 더욱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배교한 뒤의 샵베타이를 그대로 추종하는 무리로 남을 것인지 즉 샵베타이를 따라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인지 아니면 유대교의 구조 안에 머무를 것인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들 중 일부는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터키의 배교자 단체인 돈메(Doenmeh)를 형성하였다. 샵베타이 즈비가 선포한 자칭 메시아 주장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 대부분의 충실한 삽베타이주의자들은 그의 영적 권위와 그의 배교 사이의 괴리를 메우려고 노력하였고, 그의 배교를 메시아적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하고 그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배교의 행동을 했을 경우에도 그가 내적으로 유대인이기만 하면 그러한 외적 행동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배교를 하지 않고서도 성실한 샵베타이주의자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샵베타이주의의 허무주의적인 경향은 18세기에 야곱 프랑크(Jacob Frank of Galicia, 1726~1791)에게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비밀 축제에서 난교(亂交)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샵베타이주의의 영향은 지금까지 계속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교 일각에서 메시아 사상을 기피하는 구실도 마련하였다. 오늘날 메시아 사상은 오히려 한국 프로테스탄트에서 성행하고 있는데,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휴거(공중 들 림) 사건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던 다미 선교회와 그 대표 이장림 목사가 단적인 사례이다.
※ 참고문헌  Gershom Scholem, 《EJ》 14, pp. 1219~1254/ Michel Clévenot, Les Hommes de la Fraternité, vol. 9, Paris, 1990, pp. 151~156/M.J. Stiassny, 《NCE》 13, pp. 155~156.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