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탈, 잔 프랑수아즈 드 Chantal, Jeanne-Francoise de(1572~1641)

글자 크기
7
잔 프랑수아즈 드 샹탈 성녀.
1 / 2

잔 프랑수아즈 드 샹탈 성녀.


성녀. '방문 수도회' 라고도 불리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 (Institut de la Visitation Sainte-Marie)를 프란치 스코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567~1622)와 공동으로 설립한 인물. 축일은 12월 12일.
〔생 애〕 초기 생애 : 1572년 1월 23일 프랑스 디종(Dijon)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나 1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폭 넓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20세 때 크리스토프 드 샹탈(Christophe de Chantal) 남작과 결혼한 상탈은 충실한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요 검소하고 알뜰 한 주부로서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으며, 가정을 훌륭히 꾸려 나갔을 뿐만 아니라 성(城)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다른 성의 신심 활동을 도입하여 소개하면서 자선 활동도 열심히하였다. 그들 부부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둘은 유아 때 사망하였다.
1601년에 사냥 나간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상탈은 4명의 자녀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는데, 이듬해 시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몽틀롱(Monthelon)으로 오지 않으면 손자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몽틀롱으로 간 그녀는 약 7년 동안 그곳에서 하인의 통제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기도와 인내와 겸손의 덕을 실천하면서 그리고 자녀 교육에 힘쓰면서 이 기간을 견디어 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의 만남 : 1604년 사순 시기 동안 친정 아버지를 만나기 위하여 디종을 방문한 상탈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제네바의 주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주교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기를 열망하였는데, 살레시오 주교는 처음에는 다소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성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상탈은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과 살레시오 주교에게 순종할 것을 서원하였다.
살레시오 주교는 처음부터 샹탈에게 그녀가 처한 입장에서 해야 할 도리와 의무에 충실하도록 가르쳤으나, 디종의 갈멜 수녀들과의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상탈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영적인 정화 단계를 거쳐 관상 기도에 다다르는 영적 성숙을 보였으며, 수도자가 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살레시오 주교는 인내를 갖고 기다릴 것을 권고하면서 하느님의 의지에 순종하는 길과 겸손의 길로 그녀를 인도하고자 하였다.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공동 설립 : 1607년에 살레시오 주교는 샹탈에게 영성적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엘리 사벳을 방문하였을 때에 드러내었던 덕들을 따르고, 활동적으로는 노인들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을 하는 봉쇄되지 않은 수도 공동체를 세우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에 동조한 상탈은 주교의 도움으로 자녀들의 장래 문제와 집안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한 뒤 안시(Annecy)로 떠났는데, 그곳은 살레시오 주교가 계획한 새로운 수도회를 세우고 싶어하던 장소였다. 1610년 6월 6일 삼위 일체 대축일에 살레시오 주교는 안시 수도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상탈은 2명의 동료들과 함께 축성식 미사에 참석하여 살레시오 주교로부터 정식으로 회칙을 받았으며, 1년 후에 이들은 모두 수도 서원을 하였고 상탈은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회의 이름과 회헌은 여러 번 바뀌어 오다가 마침내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 가 공식 명칭으로 확정되었다.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 수녀들은 1612년 1월부터 병자 방문을 시작하였는데, 이 활동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지 못한 추문에 휩싸이게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들을 '제네바 주교의 후궁들' 이라고 야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추문은 곧 사라졌고 수도원은 이후 당시의 유명한 수도자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상탈은 시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받고 부르고뉴로 돌아가 자녀들의 재산 관리권과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부터는 자신과 동료들의 영성적인 성숙에 힘쓰면서 동시에 수도회의 새로운 분원 설립에 주력하였다.
분원의 설립 및 시련 : '갈릴레이의 집' 이라고도 불린안시의 수도원은 현재 성 요셉 수도원' 에 합병되어 있고, 1614년에 새로 설립된 수도원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초기 수도원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새 수도원이 안시 수도원을 본따서 리용(Lyon) 대교구장인 마르쿠몽(Denis Simon de Marquemont) 추기경의 배려로 리용에 설립된 '봉헌회' (Institut de la Présentation)이다. 하지만 설립된 지 몇 개월 안되어 수도원 존립이 위기에 처하자 1615년에 상탈은 이 수도원을 회복시켜 제2의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리 용의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계획하였던 수도원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의 수도원을 고집하였다. 리용의 대주교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의 훈령에 따라 세속과 인연을 끊은 봉쇄 수도원 형태를 강요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도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봉헌회를 봉쇄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살레시오 주교는 자신의 계획을 존중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리용의 대주교는 자신의 결정이 교회법과 시민법에 근거한 것이라며 철회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1618년 4월 23일에 이 수도원은 리용 대주교의 의도대로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에 의해 정식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한편 상탈은 이 같은 외적인 시련과 함께 가까운 친척들의 잇따른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시련을 당하여야 했으며, 죽기까지 혹독한 영적인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레시오 주교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급속히 확장해 나갔으며, 많 은 여성들이 이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확장은 육체적인 고행보다는 겸손과 온화함을 강조한 살레시오 주교의 가르침과 상탈의 신중함과 헌신 덕분이었다. 1619년에 샹탈은 파리 분원을 설립하면서 빈천시오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o)를 만나게 되었는데, 빈천시오 아 바오로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초기 정신과 활
동 방향을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살레시오 주교가 사망한 후에는 상탈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었다. 주교가 사망하던 1622년에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분원은 13개였다.
상탈은 살레시오 주교가 남긴 서한 · 설교집 · 영성적인 작품들을 수집하고, 그가 구두(口頭)로 가르쳤던 회칙의 주석을 집필하였다. 1626년에 안시 수도원의 원장 임기를 마쳤을 때 많은 수도자들은 다시 재임해 주기를 바랐으나 상탈은 이를 거절했다. 1627년에 상탈의 아들이 전쟁터에서 전사했는데, 이는 샹탈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아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바쳤다. 이처럼 내적 · 외적인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상탈은 계속해서 수도회의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 가며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628년에 흑사병이 번졌을 때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 수도자들도 많이 사망하자 이로 인해 그녀는 다시 안시로 되돌아가 1629~1632년까지 장상을 역임하였다. 1637년에 다시 안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재선된 상탈은 164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가 자신이 늙고 지쳐 있음을 깨닫고, 1641년에 파리로 가서 마지막으로 빈천시오 아 바오로를 만나 보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느베르(Nevers)에서 병을 얻어 물랭(Moulins)의 분원에 몸져 누웠으며, 1641년 12월 13일 물랭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분원은 약 86개였다. 그녀의 시신은 안시로 옮겨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무덤 곁에 묻혔으나 그녀의 심장만은 물랭 수도원에서 보관하기로 하였다.
〔시성과 공경〕 1722년에 상탈의 시복을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고, 1751년 11월 21일에는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에 의해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또 1767년에는 글레멘스 13세 교황(1758~1769)에 의하여 시성되 었으며 성녀 상탈의 축일은 1769년부터 로마 전례력에 삽입되었다. 성녀 상탈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가 쓴 《신심 생활 입문》(The Introduction to the DevoutLife)에 잘 나타나 있으며, 정식으로 그녀의 전기가 쓰여진 것은 17세기에 소지(Chaugy) 수녀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1863년에 부고(Bougaud)가 《성녀 상탈의 전기》(Histoire de Sainte Chantal)를 집필하였는데, 이 작품은 매우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빈천시오 아 바오로 ;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 참고문헌  E.J. Carney, 《NCE》 3, p. 451/ R. Pernin, The Catholic Encyclopedia, by New Advent. Inc., 1996/ H. Waach, 《LThK》 2, pp.1013~1014/ Richard P. McBrien ed., The HarperCol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San Francisco, Harper Co., 1995, p. 298/ J. Marilier, 《Cach》 6, pp. 675~679/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3rd ed., 1992, pp. 95~96/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New York, 1992, pp. 391~392.[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