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파뉴, 필리프 드

Champaigne, Philippe de(1602~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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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뉴가 그린 <리슐리외 추기경)(왼쪽)과 <1 662년의 서약)(루브르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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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뉴가 그린 <리슐리외 추기경)(왼쪽)과 <1 662년의 서약)(루브르 박물관 소장) .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초상 · 역사 · 종교 화가. 프랑스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샹파뉴는 생동 력 있는 실재감을 재현하기 위해 고전주의 이론을 전개한 소위 아카데미 화가의 제1 세대에 해당하는 거목이었으며, 그의 회화는 이탈리아 영향에서 거의 벗어난 고전주의 특성을 프랑스에 정착시켰다. 또한 일찍이 프랑스 화단에 큰 영향을 준 플랑드르 출신의 림뷔르흐 형제들(Les Frères Limburg : Pol · Herman · Jean de)의 전통을 계승시켜나간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및 작품 활동〕 1602년에 앙리(Henri de Cham-paigne)와 엘리자벳(Elisabeth de Troch) 사이에서 태어나 그 해 5월 26일 브뤼셀의 생트 귀뒬(Sainte-Gudule)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조상은 프랑스계였지만, 오래 전부터 브라반트(Brabant)에 정착하여 살아왔었다-1606년 이래 브뤼셀의 화가 조합에 속한 장인이었던 부이용(Jean Bouillon)의 아틀리에에서 1614년부터 1618년까지 미술 수업을 받은 후 세밀화의 전문가 미셀드 보르도(Michel de Bordeaux)의 지도를 받다가 1619년에 몽스(Mons)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브뤼셀로 돌아와 루벤스(P.P. Rubens, 1577~1640)의 친구인 풍경화가 푸르키에스(Fourquière)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생애에 있서 매우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루벤스를 따라 안트베르펜(Antwerpen)으로 가지 않고 1621년에 파리로 향한 것이었는데, 아마도 이때 푸르키에르를 동반한 것 같고, 파리를 거쳐 이탈리아로 갈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에는 오래 전부터 주로 센 강 왼쪽 강둑에 플랑드르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동향인인 상파뉴를 매우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1623년부터 '몽테뉴 생트-주느비에브' (Montaigne Sainte-Geneviève) 성당에 속한 '라옹 신학원' (Collège de Laon)에서 살던 그는, 푸생(N.Poussin, 1594~1665)을 만나 자신이 그린 풍경화를 선사하였으며, 1627년에는 브뤼셀을 잠시 방문한 후 프랑스 왕의 모친인 마리아 메디치(Maria Medici)의 부름을 받고 그 해 1월 10일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샹파뉴는 마리아 메디치를 위한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으며 국왕의 집사로 종사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궁정 화가로서의 활동 :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파 사이의 다툼으로 정치적인 혼란기였다. 마리아 메디치는 샹파뉴가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에 매우 만족해 하여 상당히 후한 대우를 해주었으며, 뤽상부르 궁전(Palais Luxembourg)을 장식하는 일 이외에도 1628~ 1630년에는 파리의 외곽 도시 생-자크(Saint-Jacque)에 위치한 가르멜 수녀회의 성당을 위해 6점의 그림과 벽화를 제작하게 해주었다. 그 후 샹파뉴는 파리의 샤퐁 가(Rue Chapon)에 있는 가르멜 수녀회와 뤽상부르 궁전 근처에 위치한 베네딕도 수녀회를 위한 작품들을 제작하면서부터 국왕 루이 13세와 섭정이자 추기경인 리슐리외(A.J. du P. Richelieu, 1585~1642)의 주목을 받게되었다. 그는 루이 13세를 위한 여러 점의 초상화를 제작한 후 1635년에는 리슐리외 추기경을 위해 추기경 궁전 안의 두 개의 방을 장식하였고 또 리슐리외 추기경의 초상화도 여러 점 제작하였는데, 이 중 한 점은 루브르 미술관에, 또 한 점은 런던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641~1644년에는 리슐리외 추기경을 가장 흡족하게 하였던 작품인 소르본느 성당의 돔 천장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그가 제작했던 어떤 작품들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여 주는 내부 장식으로서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샹파뉴는 1648년에 프랑스에 창립된 '왕립 회화 · 조각 아카데미' (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의 조직 구성 위원이 되었다.
종교 화가로서의 활동 : 한편 1643년부터 얀센주의에 몰두하였던 샹파뉴는 부인과 아들이 먼저 사망하자 1648년에 두 딸을 얀센주의 성향이 짙은 '포르 루아얄데 상 (Port-Royal des Champs) 수녀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샹파뉴는 이 수녀원과 매우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1655년에 둘째 딸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첫째 딸 카트린느(Catherine de Champaigne)가 포르 루아얄 수녀원에 입회하자 종교적이 고 깊은 신앙심을 지녔던 샹파뉴는 이 수녀회를 위해서 많은 회화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포르 루아얄의 수녀원장을 그린 <안젤리크 수녀원장>(Mère Angélique), <아녜스 아르노>(Agnès Arnaud), 그리고 수녀복을 입은 딸의 초상화 등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거작으로 꼽히는 것은 1662년에 자신의 딸을 대상으로 그린 <1662년의 서약>(Ex voto de 1662 : La Mère Catherine-Agnès Arnaud et la Soeur Catherine de Sainte-Suzanne Champaigne, 1662)이다. 샹파뉴의 딸 카트린느가 의자 두 개에 몸을 의지해 다리를 편 채 앉아 있고 그녀 옆에 수녀원장 아네스 아르노가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이 그림은, 딸 카트린느의 몸이 마비되자 수녀원장이 그녀를 위해 9일 기도를 바쳐 카트린느가 정상으로 돌아온 기적적인 치유를 묘사한 것이다.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이 사망한 후 루이 14세가 어린 나이로 등극하고 마자랭(J. Mazarin, 1602~1661)의 섭정 시대가 오면서 또 다른 화가 르 브륑(C. Le Brun, 1619~1690)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자 상파뉴는 더 이상 궁정 화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적이며 시민적인 감수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상파뉴는 푸생과 계속해서 친분을 갖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높이 평가해 주었는데 그들의 그림은 여러 면에서 비견되는 점이 많다. 샹파뉴는 푸생의 고전주의적 양식을 익히려고 많은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에게는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이 너무 크게 잔존하고 있어서 이탈리아의 위엄이 넘치는 푸생의 고전주의가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었다. 1653년부터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였던 상파뉴는, 1668년 1월 7일에 아카데미에서 푸생의 그림 <엘리제와 레베카>를 놓고 푸생을 극찬하였지만 "낙타는 성서가 전하고 있는 대로 표현하지 않고 빠져 있다" 고 책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샹파뉴는 같은 주제에서 자주 등장하는 낙타를 그린 루벤스를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1671년 6월 6일에는 아카데미에서 푸생주의자와 루벤스주의자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상파뉴는 채색을 중요시하는 루벤스주의자보다는 젊은 푸생주의자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샹파뉴는 1674년 8월 12일 파리의 에쿠프(Ecouffes)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장례 미사는 생 제르베(Saint-Gervais) 성당에서 포르 루아얄 데 상 수녀들의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작품 세계 및 평가〕 루이 13세의 궁정 화가였던 상파뉴는 자신의 플랑드르 선조로부터 깊은 신앙심을 물려받았고, 그에 못지않은 뛰어난 현실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또 화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 동안에는 비록 루벤스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지만 부에(S. Vouet, 1590~1649)가 활발히 전개시켜 놓은 프랑스 바로크의 성향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얀센주의에 몰두한 이후로는 이전의 바로크 기법을 거부하고 루이 13세 시대 회화의 특징이었던 종교적 주제에 깊이 몰두하였다.
샹파뉴의 가장 감동적인 역작은 당대의 저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게 심리를 묘사한 초상화들이다. 그는 초상화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재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 정착하였을 때는 프랑스는 회화의 위기를 맞고 있을 때였으며, 회화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흔들리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프랑스적 특성이라는 것은 화면의 단순한 구도뿐이었다. 반면에 인물이 입고 있는 의상의 옷감 혹은 금속성이나 장신구에 대한 정교한 재현력은 바로 플랑드르 화풍이 지닌 전형적 특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향임을 보
여 주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플랑드르 · 프랑스 · 이탈리아풍의 요소들이 혼합된 이러한 특징들은 화려한 색채 감각과 기념비적인 표현의 인물상, 절제된 구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초상화 양식은 루벤스와 반 데이크(A. van Dyck, 1599~1641)의 영향도 보여 준다. 상파뉴는 그의 작품에서 특히 소묘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를 떠들썩하게 만든 선과 색에 관한 논쟁의 시초가 되었다. (→ 회화)

※ 참고문헌  Kindlers Malerei Lexikon, Bd. 15, dtv, 1982, Miinchen, Bd. 2, pp. 342~346/ Norbert Schneider, Porträtmalerei, Köln, 1994, pp.134~136/ Malerei Lexikon von A bis Z, Lingen-Verlag, Köln, 1986, p. 128/Lawrence Gowing, Die Gemäldesammlung des Louvre, Köln, 1988, p. 462. 〔洪珍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