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신. 학자. 자(字)는 자선(子先) ,호(號)는 현호(玄扈), 시호는 문정(文定), 세례명은 바 오로. 서양의 학문과 과학 기술을 중국에 수용한 중서 문화 교류(中西文化交交流)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이지조(李之藻, 1565~1630) · 양정균(楊廷筠, 1577~1627) 등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3대 지주로서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뿌리내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생애와 활동〕 1562년 3월 21일 중국 강소성(江蘇省) 상해(上海)에서 태어나, 농업과 수공업을 생계 수단으로 하는 곤궁한 집안 생활 가운데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1581년에 금산위(金山衛)의 수재(秀才)가 되었다. 그러나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낙방하여 한동안 광동성(廣東省) 소주(韶州)에서 교사를 하였는데, 1596년에 그곳에 체류하던 예수회 선교사 카타네오(Cattaneo, 郭居靜, 1560~1640)를 만나 서양의 학술과 천주교 교리를 처 음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순천(順天) 향시에 수석 급제한 그는 1600년에 회시(會試)에 응시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가다가 남경에 들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를 만났다. 이때 서광계는 리치에게서 천주교 교리와 서양의 자연 과학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의 학문적 조예에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1603년에 다시 그는 남경으로 리치를 방문하였으나 그는 이미 북경으로 간 후여서 대신 로차(Rocha, 羅如望, 1566~1623) 신부로부터 리치의 한역 교리서인 《성교요리》(聖教要理)를 얻어 하루 만에 독파한 후,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604년에 서광계는 회시에 급제하여 한림원 서길사 翰林院庶吉士)가 되었는데, 당시 리치도 북경에 상주하 였으므로 이들은 거의 매일 왕래하였고, 서광계는 리치로부터 천주교 교리뿐만 아니라 서양의 학술을 배워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606년에는 북경에서 그의 부친과 아들 기(驥)를 영세시켰으며, 이듬해에는 한림원 검토(翰林院檢討)로 임명되었으나 곧 부친상을 당하고 말아 상해로 귀향하게 되었다. 상해로 가는 도중 남경에서 카타네오 신부를 만나 상해 개교에 도움을 청한 그는, 상해로 돌아와 곧바로 자기 집에 설교소(說敎所)를 열고 전교에 주력한 결과 1608년 말에는 카타네오 신부로부터 200여 명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서광계는 설교소 서쪽에 상해 최초의 성당을 건립하고 두 번이나 마카오에 가서 예수회 본부와 교회를 탐방하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611년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그 해에 흠천감(欽天監)에서 일식을 오추(誤推)하자 서양 역법에 의한 수력(修曆)을 예부에 건의하여 인준을 받고, 이때부터 이지조, 판토하(Pantoja, 龐迪我, 1571~1618), 우르시스(Ursis, 態三拔, 1575~1620) 등과 함께 역법 개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같은 서광계와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의 고관들은 환영하였으나 일부 사대부들과 직위에 위협을 느낀 홈천감원들은 선교사들의 중국 거류, 수력, 서학 서의 번역 등을 비판 · 공격하였다. 이에 서광계는 부득이 칭병하고 1613년 10월부터 1616년 7월까지 천진(天津)에서 둔전(屯田)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서광계는 농업에 종사하며 농업 분야를 연구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의 대표적 실학 저서인 《농정전서》(農政全書)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1616년에 다시 출사하였으나 예부시랑(禮部侍郎) 심각(沈淮)이 그 해 남경에서 제1차 천주교 박해 사건을 일으켰다. 서광계는 호교 상소문 <변학장소>(辨學章疏)를 올리는 한편 교난을 막으려고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 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좌춘방좌찬선 겸 한림원 검토(左春坊左贊善乘輿林院檢討)에 임명된 그는, 1619년에는 만주족의 침입에 대한 타개책으로 인재 급구 · 정병 훈련 · 무기 조달 · 성곽 축조 외에도 서광계 자신이 직접 조선에 가서 청병하겠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9월에는 첨사부소첨사 겸 하남도감찰어사(詹事
府少詹事乘河南道監察御史)가 되어 연병 업무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북경 부근의 통주(通州)에 연병장을 설치한 뒤 마카오로부터 서양 대포 4대를 주문하는 동시에 서양인 포수 여러 명을 채용하여 중국 병사들을 교련 하였으나 조선 청병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서광계는 이때 자신이 청병 사신이 될 경우, 당시 북경에 체류하던 선교사 삼비아시(F. Sambiasi, 畢方濟, 1582~1649)를 대동하여 조선을 개교할 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사정에 맞도록 각종 예비서와 전교 서적의 저술 및 인쇄에 착수하였던 것인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 7월 만력제(萬曆帝)와 태창제(泰昌帝)가 잇따라 서거하고 나이 어린 천계제(天啓帝)가 즉위하자 전 권은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위임되었다. 이때 제1차 교난을 일으켰던 심각이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禮部尙 書兼東閣大學士)로 입각하여 위충현과 결탁하고 자신을 배척하자, 그는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요양(遼陽)이 만주족에게 함락되면서 복직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연병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자, 다시 사직 하고 상해로 돌아가 삼비아시와 함께 교리서 《영언여작》(靈言蠡勺) 2권을 저술하는 등 전교에 열중하여 큰 성과 를 거두었다.
1622년 산동에서 백련교(白蓮敎)의 난이 일어나자 심각 일파는 천주교와 백련교가 같은 사교라 하며 제2차 교난을 일으켰다. 이에 서광계는 삼비아시와 더불어 다시 변소(辨疏)를 작성하였으나 심각이 사직함으로써 교난은 곧 끝이 났다. 교난 후인 1624년 2월에 서광계는 예부우시랑 겸 한림원시독학사협리첨사부사 겸 찬수신 侍郎兼翰林院侍讀學士協理詹事府事兼篡修神宗實錄總裁)에 임명되었지만 이듬해 위충현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당하고, 1628년까지 천진과 북경을 왕래하며 농업 분야와 과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농정전서》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1627년 2월 천계제가 서거하고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자 서광계는 원직에 다시 복귀했으며, 1629년 5월 에는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郎)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흠천감에서 또 일식을 오추하자 새로운 서양 방 식의 도입을 통한 역법 개정을 건의하였다. 숭정제의 허락을 받아 9월 22일에 역국(曆局)을 개설한 서광계는 이곳에서 역법 개정을 감독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지조를 비롯하여 롱고바르디(Niccolo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 테렌츠(J. Terrenz, 鄧玉函, 1576~1630), 아담 살(Adam Schall, 湯若望 , 1592~1666) , 로(J. Rho, 羅雅各, 1593~1638) 등의 선교사들이 수력에 참여하여 숭정 4년부터 7년 사이에 136권의 《숭정력서》(崇禎曆書)를 5차에 걸쳐 황제에게 진정하였다.
1630년에 서광계는 예부상서 겸 한림원학사협리첨사부사(禮部尙書 兼翰林院學士協理詹事件府事) 1632년에는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禮部尙書兼東閣大學士)로 임명되었고, 1633년 7월에는 본관에 태자태보문연각대학사(太子太保文淵閣大學士)가 더해졌다. 그러나 그 해 9월 이후 병세가 심해지자 서광계는 10월 5일 상소를 올려 아담 샬을 비롯한 선교사들을 계속 수력에 종사시킬 것과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 이천경(李天經)을 역국의 후임으로 천거한 후, 10월 9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상과 주요 저서〕 명나라 말의 대표적 학자이자 유가(儒家) 지식인이었던 서광계는 42세의 장년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를 수용하였는데, 1612년에 간행된 《태서수법》(泰西水法)의 서문에서 그는 '보유 역불' (補儒易 佛)이라는 표현으로 유교와 불교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을 처음으로 공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보유론적인 견해는 1616년에 올린 <변학장소>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변학장소>를 통하여 천주교 교리의 진정함이 공자(孔 子)의 유학과 부합되어 호국 보유(護國補儒)할 수 있으며, 성현지도(聖賢之徒)인 선교사들과 서양 학술을 채용해서 나라를 태평하게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는 전래된 지 1,800여 년이 지났으나 도가 와 더불어 교법이 미비해서 백성을 감화시키는 데 실패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서광계는 또한 선교사를 시험하는 법〔試驗之法〕과 처치하는 법(處置之法)을 각각 3조씩 제안하였다. 시험하는 법으로는 첫째 선교사들을 수도에 불러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저술하게 하여 조정 신하들이 그 내용을 판단하도록 하고, 둘째 선교사들을 불교 승려들과 토론하게 하여 그들 사이에서 결론이 얻어지면 유학자들로 하여금 그 결론의 시비를 판정하게 하고, 셋째 선교사들의 모든 한역 저술을 바치게 하여 황제가 친히 읽어 그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처치하는 법으로는, 첫째 선교사들을 국가에서 베푸는 전량(錢糧)과 원조로만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여 선교사의 연금(煉金)이나 서양 상인과의 연계를 의심하는 자들의 의혹이 사실인가를 확인하고, 둘째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지방을 10가(家) 혹은 20가씩 묶어 일종의 보(保)를 조직해서 교화시키게 한 후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셋째 지방 사민(士民) 중 천주교 신자들에게 인신(印信)과 문부(文簿)를 주어 혹 죄목이 있으면 기록하게 하여 3년마다 이것을 조사함으로써 선행과 악행을 구분하여 보자는 제안이다. 이는 보유 역불을 공공연히 내세우며 교회와 선교사에 대한 중국의 대응 정책을 제시한 공식 상소문으로서, 중국 천주교회사와 서광계의 호교를 거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술이다. 이와 함께 그의 역불 사상을 보여주는 저술로는 《벽망》(闢妄)이 있다. 서광계는 당시 불교측에서 출간한 주굉(袾宏)의 《죽창삼필》(竹窓三筆)과 보윤(普潤)의 《주좌집 연기》(誅左集緣起) 등 반천주교 저서에 대한 반격과 호교를 목적으로 《벽망》을 저술하여 중국 천주교의 기본 사상인 반불의 입장에서 불교 교의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종교 사상 저술 이외에 서광계의 중요한 저술로는 중국 고대로부터 명나라 말까지의 고금 농가(農家)의 설을 집대성하고 평가한 《농정전서》 60권이 있다. 1639년에 간행된 이 책은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장되었는데 서광계의 실학(實學)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방대한 저서로서 큰 의의가 있다. 이 밖에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과 공저 · 공역한 전교서나 과학서 등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천주 교 동전 문헌》(天主教東傳文獻)과 《천학초함》(天學初函) 등에 수록되어 있다. (→ 리치, 마테오 ; 벽망 ; 살폰 벨, 요한 아담 ; 상해 ; 《숭정력서》)
※ 참고문헌 徐光啓, 《徐文定公集》, 臺北, 中華書局, 1962/ 王重民輯校, 《徐光啓集》, 上海, 古籍出版社, 1981/ 梁家勉 編著, 《徐光啓年譜》, 上海, 古籍出版社, 1981/ 羅光, 《徐光啓傳》, 臺北, 傳記文學出版 社, 1982/ 張貞蘭 徐光啓 研究-그의 護敎를 中心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71/ A. Hummel ed.,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vols. 2, Washingon D.C.,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43~1944. 〔張貞蘭〕
서광계 (1562~1633)
徐光啓
글자 크기
7권

서광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