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대이교

西歐大離敎

〔라〕schisma magnum occidentale · 〔영〕western s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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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황들이 73년 동안 머물렀던 아비농(왼쪽)을 떠나 로마로 돌아오는 그레고리오 11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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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교황들이 73년 동안 머물렀던 아비농(왼쪽)을 떠나 로마로 돌아오는 그레고리오 11세 교황.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기에 대립 교황의 출현으로 로마 교회 전체를 크게 분열시킨 사건. 이 당시에 교회는 추기경단의 이중 선거(二重選擧)와 공의회의 교황 선출로 교회의 으뜸임을 주창하는 교황이 2명 또는 3명이 등장한 사태가 벌어졌고, 이러한 문제에 정치권이 개입함으로써 분열과 혼란을 겪었다. 최근에는 이 서구 대이교를 '서방 교회의 대분열' 또는 '교황청의 대분규 라고 일컫기도 한다.
: I . 서방 교회의 분열
〔이중 선거〕 로마 교황청 시대의 시작 : 1377년 1월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는 역대 교황들이 73년 동안 교회를 통치하던 아비농(Avignon) 교황청을 떠나 로마로 돌아와 옛 교황 숙소인 라테란 궁전 대신에 바티칸 궁에 머물렀다. 이로써 교황의 아비뇽 시대가 끝나고 바티칸 궁이 교황의 공관으로 자리를 잡은 새로운 로마 교황청 시대가 열렸는데, 이때 로마에는 아비뇽에 남아 있는 6명의 추기경을 제외하고 16명의 추기경(이탈리아인 4명, 스페인인 1명, 프랑스인 11명)이 있었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돌아온 뒤 14개월 만인 1378년 3월 27일에 사망하자 로마인들은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다시 선출되어 아비농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실상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사망하기 전에 아비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었다. 교황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로마인 또는 적어도 이탈리아인 교황의 선출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선출과 불화 :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이탈리아 바리(Bari)의 대주교이면서 아비뇽 교황청 상서원(尙書院)의 부원장인 프리냐노(Bartholormeo Prignano)를 교황 후보로 정하고 있었다. 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프리냐노는 나폴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으로서 20여 년 동안 아비뇽에 머무르면서 프랑스의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에 젖어 있어 이탈리아 추기경과 프랑스 추기경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같은 해 4월 8일 오전에 추기경들은 프리냐노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추기경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그는 교황 선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리냐노가 도착하여 수락을 발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로마 군중이 선거 장소에 난입함으로써 선거가 중단되고 말았다. 당황한 추기경들은 로마 출신의 연로한 추기경인 테발데스키(Tebaldeschi)에게게 억지로 교황복을 입혀 교황좌에 앉게 한 뒤 로마인 교황이 선출되었다고 거짓으로 알려 군중을 해산시켰다. 다음날 12명의 추기경들이 다시 모여 프리냐노의 선출을 확인함으로써 교황 선거 절차를 끝냈다. 이로써 73년 만에 로마에서 교황 선거가 시행되었고 교황사(敎皇史)에 있어서 프리냐노는 추기경단 밖에서 선출된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 프리냐노는 1378년 4월 18일에 우르바노 6세(1378~1389)로 교황위에 올랐다.
새 교황은 극기의 실천과 행정 능력으로 존경을 받았고 아비농 시대부터 교회를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비뇽 시대 동안 소수 집단이면서도 막강한 행정권을 행사하던 추기경들을 상대로 교황의 절대 군주적인 역할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권 강화와 함께 추기경단의 쇄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독선적이며 타협을 모르는 고집스러운 전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추기경들에게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폭언을 퍼부으면서 그들의 부도덕 · 성직 매매(聖職賣買) · 사치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따라서 추기경들은 기득권이 상실되는 데에서 오는 불만과 함께 우르바노 6세 교황의 과격한 언행에 대해 인격 파탄자로서 교황 직무를 수행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6월 11명의 프랑스 추기경들은 1명의 스페인 추기경과 함께 여름철 휴가(villeggiatura)를 보내기 위해 아나니(Anagni)에 모였는데, 여기에서 이제까지 매우 조심스럽게 논의되던 교황 선거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아나니에서 추기경들은 여러 가지 의견들을 내놓았다. 교황 선거가 군중의 위협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아 무효이므로 우르바노 6세를 퇴임시키고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주장, 공의회를 소집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 우르바노 6세가 교황으로서 품위와 권위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교황의 후견인 제도를 신설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추기경들은 공식 대표를 로마에 보내 우르바노 6세 교황에게 그들의 제안들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지 못한 교황은 사태 파악을 위해 로마에 남아 있던 3명의 이탈리아 추기경들을 아나니로 보냈으나 그들마저 프랑스 추기경들에게 합류하고 말았다. 추기경들은 다시 사절단을 교황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할 보좌 역으로 두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무조건 그의 선출이 유효하였음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8월 2일에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가 무효라고 주장하였고, 8월 9일에는 교황이 해임되어 교황좌가 공석임을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 알렸다. 한편 로마에서는 9월 17일에 이탈리아 추기경들이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르바노 6세 교황은 29명의 추기경들을 새롭게 임명하여 교황청을 재구성하였다.
교황 글레멘스 7세의 즉위와 아비뇽 교황청 설립 : 1378년 9월 중순 나폴리 왕국의 폰디(Fondi)로 옮긴 추 기경들은 요안나 여왕(Joanna, 1343~1382)의 보호를 받으며 토론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공의회 소집을 주장했으나 폰디의 토론은 새 교황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론을 내렸으며, 이때 이 탈리아 추기경들은 자기들이 교황에 선출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재선거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교황 선거인단은 9월 20일에 폰디 주교좌 성당에서 프랑스인도 아니고 이탈리아인도 아닌 제네바의 추기경 로베르(Rober)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기권하였지만 선거에 참석함으로써 선거 결과에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10월 31일에 대립 교황 글레멘스 7세(1378~1394)가 즉위함으로써 교회 안에는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것으로 서구 대이교(1378~1417)가 시작되었다. 대립 교황은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선거에서 지지하였지만 아나니 모임에서 로마 교황을 해임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글레멘스 7세는 나폴리 왕국 요안나의 군대에 도움을 청해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1379년 4월 29일의 마리노(Marino) 전투에서 우르바노 6세 교황의 용병들에게 패하였다. 그리고 그의 추기경들과 함께 나폴리를 거쳐 5월 22일에 아비농으로 가서 행정 기구를 조직함으로써 다시 아비뇽 교황청이 설립되었다.
〔이중 선거 이후의 사태〕 교황청 분규와 혼란 : 이중선거로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우르바노 6세와 글레멘스 7세 중에서 한 교황을 선택하여야 했다. 양측은 자신이 참된 교황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각 나라와 단체에 서신을 보내거나 사신을 파견하여 지지를 호소하는 등 세력 팽창에 나섰다. 따라서 서유럽의 정치권도 분열되어 우르바노 6세가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 지역 ·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 잉글랜드 · 스칸디나비아 · 헝가리 · 보헤미아 · 네덜란드는 로마 교황을 지지하였고, 프랑스 · 나바레 · 나폴리 · 시칠리아 · 스코틀랜드 · 사보이 · 부르군디 ·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틸랴 왕국과 아라곤(Aragon) 왕국은 아비뇽 교황의 편을 들었다. 또한 교황청 분규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양측은 서로 헐뜯고 상대방 교황의 추종자들을 파문하는 등, 이 시기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서유럽 그리스도인 모두가 파문을 받은 시대였다. 교구의 주교좌 성당은 양측 추종자로 분열하였고 수도원은 두 명의 장상과 두 참사회를 갖게 되었으며, 가정 안에서도 분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제 누가 참된 교황인지를 합의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여야 했고 그리스도인 모두가 인정하는 교황(Papa indubitatus)은 없었다. 톨레도(Toledo)의 대주교 테노리오(Pedro Tenorio)는 미사의 성찬 전례 중에 교황을 위한 기도에서 교황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참 교황인 그분을 위하여' (pro illo qui est verus papa)라는 문구를 넣었다.
공의회 우위설의 대두와 영향 : 교황청의 분규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임을 주창하는 공의회 우위설(concili- arismus)을 자극하여 실천에 옮겨지게 하였다. 12세기 말에 교회법학자 피사(Pisa)의 후구치오(Huguccio, +1210)는, 교회는 모든 신앙인의 집합체이며 공의회는 이러한 전체 교회를 대표하며 교황은 신앙 교리를 결정할 때에 공의회 안에서 주교들의 의견을 들으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교황과 함께하는 공의회가 혼자만의 교황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견해는 공의회 우위설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는 교황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성직 계층위에 있고, 교회의 권위는 교황뿐만 아니라 구성원 전체에까지 부여되어 있으며, 구성원들은 추기경들에게 권한을 넘겨줌으로써 교황이 선출되지만 교황이 교회에 피해를 줄 만큼 권리를 남용한다면 양도를 취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로 공의회 우위설은 교황청 분규의 해결 이론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 영향으로 이단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영국에서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4)는 교황청의 세금 징수를 비판하면서, 교황을 포함하여 군주는 하느님의 통치 은총을 받지만 임무에 성실하지 못한 군주는 은총을 받지 못하는데 교황청은 이러한 불성실한 교황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보헤미아에서 후스(Jan Huss, +1415)에 의해 더 발전되었고, 그는 교계 제도를 공격하였다.
〔결과 및 평가〕 교황 선거가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로마 군중의 위협에 대한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 교황은 선거 다음날 있은 추기경들과의 개인 면담에서 투표가 자유롭게 진행되었음을 확인하고 추기경들의 서명과 함께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였으며, 추기경들은 두 달 동안 새 교황을 인정하고 협력하였다. 비록 교황 선거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고 해서 선거 자체가 교회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추기경단에서 두 명의 교황을 선출한 행위가 교회법에 대한 위반 사항이며 강압에 의한 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추기경들의 행위를 옹호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재선거는 불법 행위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추기경들은 우르바노 6세 교황이 인격 파탄자이며 무능한 지도자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새 교황은 이미 아비뇽 시대에 신뢰할 만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았고 추기경들은 오랫동안 그를 잘 알고 지냈었다. 따라서 추기경들이 교황이 품위를 갖추고 있지 못하여 교황으로서의 직무에 걸맞게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투표를 취소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이중 선거의 직접적인 원인은 영성(靈性)과 도덕성을 지니지 못한 추기경단 안에 있다고 보여진다. 추기경단은 부유하고 야망이 강한 출세가들로 구성된 소수 집단으로 전락되어 있었고 사회적인 환경과 사상적인 배경이 서로 비슷하면서도 민족적인 불화와 개인적인 반목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분규는 두 교황 사이에 있었다기보다는 파벌과 권력층으로 구성된 추기경단의 구성원 사이의 집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나왔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II . 화해와 종식
〔교회 일치의 시도〕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분열한 이후로 교회 일치의 시도는 꾸준하게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분열의 위기에 대응하여 공의회 우위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어서 공의회가 최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 공의회가 당장 소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공의회의 소집 권한은 교황에게 있었으므로 일치 공의회가 열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1789년 10월 15일에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하였을 때 글레멘스 7세는 로마 교황 선거인단에서 자신을 교황으로 인정함으로써 분규가 해결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로마 추기경들은 토마철리(Pieto Tomacelli)를 교황 보니파시오 9세(1389~1404)로 선출하였다.
파리 대학교의 화해 방안과 실패 :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 대학교는 분규 종식을 위해 세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교황들이 모두 자진 사임하는 방법(via cessionis)이며, 둘째는 사법적 독립 기구를 구성하여
누가 사임해야 하는지를 협상하는 방법(via compromissi)이고, 셋째는 공의회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법(via concilii)이었다. 파리 대학교는 첫째 방법을 선호하였고 따라서 파리 대학교의 주도로 프랑스의 사회 분위기는 분규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두 교황이 함께 사임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강력히 확산되었다. 그래서 아비농의 교황 글레멘스 7세는 사임 압력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던 반면에, 우르바노 6세 교황과의 불화로 글레멘스 7세에게 충성하던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로마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글레멘스 7세에게 사임하면 그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겠다고 제의하였다.
1394년 9월 16일에 글레멘스 7세가 사망한 다음 아비뇽 추기경들이 후계자를 선출하지 않으면 분규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10일 후에 프랑스 국왕은 아비뇽 추기경들에게 투표 연기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추기경들은 9월 28일에 투표에 들어갔다. 이들은 선출된 교황이 분규 종식에 노력하고 사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면 물러날 것임을 서약하도록 하면서, 스페인 출신 페드로 데 루나(Pedro de Luna)를 선출하였다. 그가 아비뇽의 두 번째 교황인 베네딕도 13세(1394~1423)였다. 파리 교회 회의와 프랑스 정부의 제안 : 이후 프랑스에서는 일치 회복을 위한 방법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1395년 2월 3~8일 파리에서 개최된 첫 교회 회의에서는 교회 분열의 유일한 해결책은 두 교황의 퇴임이라고 결정하고 대표단을 아비뇽에 보내 결정을 전달하였다. 이때 베네딕도 13세는 회의의 결정을 거절하였지만 추기경들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8월 16일부터 9월 15일까지 개최된 두 번째 파리 교회 회의에서 베네딕도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사임을 권고하기로 결정하였다. 1398년 5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진행된 제3차
파리 교회 회의 중에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 정부와 함께 베네딕도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7월 27일에 는 이에 대한 교령이 반포되어 대부분의 추기경들이 교황을 떠났다. 프랑스 정부는 교황청 운영비 지급을 중단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아비뇽 궁을 점거하고 교황을 4년 동안 연금(軟禁)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정부가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를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1403년 5월 12일에 베네딕도 13세는 교황 궁에서 탈출하여 프로방스(Provence)로 피신하였으나 1404년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사회와 교회의 상황이 악화되자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길은 베네딕도 13세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5월 29일에 그들의 교황을 방문하여 지지를 선언하였고, 베네딕도 13세는 군주들의 중재로 국왕과도 화해하고 아비농으로 돌아와 그 해 9월에 로마로 사신을 보내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세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는 두 교황의 정상 회담이었고, 둘째는 전권 대사(全權大使)의 협상이었으며, 셋째는 동반 사임이었다.
협상의 시도와 파기 : 그러나 아비농의 교황청 사신이 로마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보니파시오 9세 교황이 사망 함으로써 접촉은 중단되었고, 미글리오라티(Cosimo Migliorati)가 인노첸시오 7세(1404~1406)로 로마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1406년 11월 6일에 새 교황이 사망하자 로마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에서 선출된 교황은 분규 종식을 위해 아비농 교황이 사임하면 물러난다는 서약을 하게 하고서 코레르(Angelo Correr)를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로 교황에 선출하였다. 교황은 아비뇽 교황과 협상에 들어가기로 하고 1407년 4월 21일에 체결된 '마르세유(Marseille) 조약' 에 따라 9월 29일 아니면 늦어도 11월 1일에 사보나(Savona)에서 회동하기로 하였 다. 그러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자 회담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실망과 분노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고, 급기야 프랑스 정부는 1408년 5월에 베네딕도 13세의 교황 직무 수행을 정지시키고 지지를 철회하면서 중도 입장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체포의 위험을 느낀 베네딕도 13세는 페르피낭(Perpignan)으로 피신하였다.
〔일치 공의회〕 교황들이 시도하였던 재일치는 성공할수 없었는데, 그것은 일치 계획을 주도하는 교황이 언제나 상대방의 퇴임을 요구하는 방안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교황들의 자진 사임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파리 대학교는 분규의 해결 방법으로 공의회를 제시하였다.
피사 · 로마 교회 회의 : 1408년 6월 29일 양측의 추기경들은 교황들의 사퇴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1409년 3월 25일에 피사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 분규를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교회 일치에 대한 열망을 세속 군주들에게 표명하였다. 그들은 교황 베네딕도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를 피사 교회 회의(1409~1410)에 초청하였다. 그러나 두 교황은 사임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면서 교회 회의 소집이 교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그들 자
신의 교회 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아비농 교황은 1408년 11월 1일에 페르피낭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로마 교황은 1409년 6월 6일에 치비달레(Cividale)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교회 회의가 소집된 지역인 아퀼레이아(Aquileia)의 총대주교가 피사교회 회의를 지지하면서 적대감을 보이자 제8 회기 또는 제9 회기를 끝으로 9월 6일에 중단하고 가에타(Gaeta)로 피신하여 나폴리 국왕의 보호를 받았다. 한편 1409년 3월 25일에 시작된 피사 교회 회의는 양측 추기경단의 공동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6월 5일에 열린 제15 회기에서는 아비뇽 교황과 로마 교황을 교회 분열 · 이단 · 위증으로 단죄 · 해임하고 교황좌가 공석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양측 합동 선거에서 만장 일치로 그리스 출신이며 밀라노의 대주교인 필라르기(Pietro Philarghi)를 알렉산델 5세(1409~1410)로 교황에 선출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공의회 교황' 이 선출되었지만 분규는 해결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3명의 교황 즉 로마 교황 · 아비뇽 교황 · 피사 교황이 등장하는 결과만 낳게 되었다.
1410년 7월 7일 피사 교회 회의의 추기경들은 5월 3일에 사망한 알렉산델 5세의 후계자로 볼로냐에 머무르고 있던 코사(Baldassare Cossa)를 만장 일치로 요한 23세(1410~1415)로 선출하고 곧 교회 회의를 폐회하였다. 새 교황은 윤리적으로 부적격한 인물이었으나 성직 매매의 방법을 통해서 교황이 되었다. 추기경들은 그를 지지하는 앙주(Anjou)의 루이 2세(1384~1417)의 압력과 요한 23세의 무력을 통한 협박이 두려워 그를 선출하였던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로마로 가서 자리를 잡고 피사 교회 회의의 결정에 따라 1412년 4월 1일에 로마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이 교회 회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교황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로마 교회 회의는 참석자가 적어 위클리프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8월 7일에 제1 회기로 끝마쳤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교황은 장소와 날짜에 대한 언급이 없이 새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413년 6월 초 정치적 곤경에 빠진 요한 23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피렌체에 은신해 있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 1411~1437)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독일 황제의 개입과 콘스탄츠 공의회 : 그 동안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재일치 회복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황제는 교황청 분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의회 소집과 교회 개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교황 요한 23세를 도와 주는 대가로 콘스탄츠(Konstanz)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12월 9일에 콘스탄츠에서 1414년 11월에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이후 교황청 분규 문제는 교회에서 세속 군주에게로 넘겨졌다. 1414년 10월 28일 요한 23세 교황은 콘스탄츠에 도착하여 11월 5일에 공의회(1414~1418)를 개회하였다. 교황이 콘스탄츠에 온 이유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을 해임한 피사 교회 회의의 결정을 확인하고 그의 교황직을 보장받으면서 공의회를 해산하기 위해서였으나, 공의회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415년 2월 15일에 독일 · 프랑스 · 영국은 세 교황을 공동 퇴임시키기 위해서는 각 주교들에게 한 표를 행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선거법을 개정하였다. 그래서 독일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잉글랜드는 한 표씩 행사하는 국가별 투표 방식을 도입하기로 합의하였고, 3월 1일 교황 요한 23세는 다른 두 교황들이 퇴임하면 사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의 사임 문제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3월 20~21일 밤 사이에 궁내관(宮內官)으로 변장하고 피사를 빠져 나와 프라이부르크(Trebbmg)로 피신하였다. 그는 자신이 피신함으로써 공의회가 중단되기를 희망하였다. 한편 4월 6일에 열린 공의회 제5 회기에서는 공의회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고 공의회는 교황 우위에 있다는 교령 <사크로상타>(Sacrosancta)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 6일 공의회는 교황이 부재중이라도 분규가 치유되고 교회 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공의회는 계속 진행된다고 선언하였다. 보호자를 잃은 교황은 콘스탄츠로 불려가 5월 29일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재판에서 그는 성직 매매 · 비윤리적인 생활 · 분열 조장 · 위증 · 직권 남용과 같은 많은 죄목으로 해임 당하였다. 요한 23세는 해임을 받아들이고 독일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가 1419년에 피렌체로 옮겨져 마르티노 5세와 화해하였다.
공의회의 해결안 : 분규 해결을 주도하던 지기스문트 황제는 아비뇽 교황과 로마 교황과의 협상에 나섰다. 그 레고리오 12세 교황은 요한 23세가 소집한 공의회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공의회 소집을 공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사임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고, 공의회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1415년 7월 4일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의 특사는 공의회 소집을 선언하고 교황의 사임을 발표함으로써 추기경단도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그레고리오 12세를 포르토(Porto)의 주교와 안코나(Ancona)의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다. 이어 지기스문트 황제는 공의회 대표단을 이끌고 페르피낭으로 베네딕도 13세를 찾아가 명예롭게 물러날 것을 종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의회는 1417년 7월 26일 궐석 재판에서 베네딕도 13세를 해임하고 교회에서 축출하는 결정을 내린 뒤 교황을 즉시 선출할 것인지 아니면 교회 개혁이 성취될 때까지 선거를 연기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다. 지기스문트 황제를 포함하여 세속 군주들은 교황이 먼저 선출되면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토론 끝에 공의회는 먼저 교황 선거를 실시하되 선출된 교황으로부터 개혁을 단행하겠다는 보장을 받기 위해 교황들은 앞으로 정기적인 공의회를 소집한다는 교령 <프레구엔스>(Frequens)를 10월 9일 통과시켰다. 그리고 11월 8일에 추기경단은 각 국가의 6명의 대의원들과 함께 선거에 들어가 11월 11일에 콜론나(0do Colonna)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는데, 그가 마르티노 5세(1417~1431)였다.
〔결과 및 평가〕 그러나 교황청 분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한 23세가 마르티노 5세 교황과 화해하고 1419년에 사망한 이후로 피사에는 후계자가 없었다. 아비농의 교황 베네딕도 13세는 자신을 지지해 주던 세속 군주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페르피낭에서 지지자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아라곤 국왕의 영토인 발렌치아(Valencia)의 페니스콜라(Peniscola) 성에서 1423년에 사망할 때까지 머무르면서 합법적인 교황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어서 아비뇽의 교황직을 계승한 글레멘스 8세(1423~1429)는 1429년에 교황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추기경단에서 마르티노 5세를 교황으로 다시 한번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이중적인 교황 선거로 시작된 서구 대이교는 끝이 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황청 분규는 공의회 우위설의 원칙에 바탕을 두고 세속 군주의 개입으로 해결되었고, 교황권은 재정립되었지만 교황의 권위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공의회주의와 세속 군주의 교회 문제 개입은 바젤(Basel)에서 소집된 공의회(1431~1439)에서 반(反)교황 운동이 일어나 다시 한번 대립 교황을 등장하게 하였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 세계를 완전히 분열시킨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최근까지 서구 대이교 중에 있었던 세 교황들의 이어지는 계열(系列)이 복잡하여 합법성 문제에 대해서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만일 추기경단이 소집한 피사 공의회가 불법 공의회라면 그레고리오 12세의 해임은 무효이며, 따라서 이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델 5세와 요한 23세는 대립 교황이다. 과거에는 두 교황이 모두 합법적인 교황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지만 1958년 10월 28일에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가 교황에 선출되면서 교황명을 요한 23세( 1958~1963)로 선택함으로써 피사의 교황 요한 23세는 교황사(敎皇史)속에서 사라졌고, 로마 교황의 정통성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델 5세의 선출에서도 합법성이 발견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자진 사퇴와 아비뇽의 교황 베네딕도 13세와 피사의 교황 요한 23세의 해임으로 마르티노 5세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다. (→ 공의회 우위설 : 아비뇽 ; 이교 ; 콘스탄츠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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