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신부.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1889년에 인천(仁川)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박 마리아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모친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게 된 그는 성장하면서 차츰 성직에 뜻을 두게 되었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1925년 6월 6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 서품을 받은 서기창 신부는, 황해도 장연(長淵) 본당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충북 장호원(長湖院, 현 감
곡) 본당 보좌로 임명 되었다. 1928년 5월 해주(海州)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어 소년 · 소녀회와 부인회를 조직하였으며, 그 이듬해 성당 신축을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그 해 5월 백동(柏洞, 현 혜화동)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고 말았다. 이곳에 부임한 뒤 그는 옛 베네딕도회 수도원 내의 목공소와 철공소를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여 9월 8일 봉헌식을 거행한 데 이어 성당 안에 성상과 종각을 설치하였고, 안나회 · 여성 성가대 등 여성 단체들의 활동을 장려하는 한편, 1933년에는 혜화동 소년회를 조직하였다.
1936년 5월 10일 약현(藥峴, 현 중림동) 본당 관할의 영등포(永登浦)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서기창 신부는, 이곳에서도 성당 신축에 힘써 이듬해 1월 31일 새 성당을 완공하였으나 성당이 자주 침수하는데다가 신자수도 많이 늘어나 1940년 5월 도림동 산 53번지의 부지를 새로 매입한 뒤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6월 초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 신부 겸 서포 본당 6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신자들의 교리 교육에 환등기와 영사기를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주마창(走馬瘡)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불구가 되고 말았다.
1944년 9월 황해도 송화(松禾) 본당으로 전임된 서기창 신부는 사제관을 신축하는 등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 하였으나, 8 · 15 광복 후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6 · 25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 8월 31일 성당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송화면 홍암리 쇠골〔金洞〕에 사는 임능익(林能益, 베드로)의 과수원 별채에 은거하던 중 10월 6일 북한 공산군에게 강제 연행되어 10월 16일 피살되었으며, 유해는 10월 19일 신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쇠골 뒷산에 묻혔다. (→ 송화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90호(1983. 1), 한국교회사연구소, p.2/《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편, 《天主教平壤教區史》, 1981/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천주교 도림동 교회, 《모랫말 반세기》, 1986/ <백동 70년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교회, 1997. [李裕林]
서기창 (1889~1950)
徐起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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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서기창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