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둔동 본당

西屯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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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150-2 소재. 1968년 5월 10일 고등동(高等洞)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한국 순교자. 관할 구역은 서둔동, 금곡동 전 지역과 구원동, 호매실동, 탑동, 화성군 반월면 당수리, 입북리 일부 지역. 〔교 세〕 1968년 1,788명, 1973년 1,583명, 1979년 1,851명, 1984년 1,523명, 1989년 2,344명, 1992년 3,871명, 1996년 3,475명. 〔역대 신부〕 초대 정주성(鄭主成) 요셉(1968. 5~1973. 5), 임시 한의수(韓義壽) 베드로(1973. 5~10), 2대 김창린(金昌麟) 필립보(1973. 10~1978. 11), 3대 손태섭(孫泰燮) 마르코(1978. 11~1981.4) 4대 김춘호(金春鎬) 베드로(1981. 4~1984. 2), 5대 강원유(康元裕) 요한(1984. 2~1986. 4), 6대 한상호(韓相浩) 마르코(1986. 4~1987. 2), 7대 최재필(崔在弼) 안드레아(1987. 2~1995. 2) , 8대 방효익(方孝益) 바오로(1995. 2~1998. 8), 9대 최중혁(崔重赫) 마티아(1998. 8~현재 ) .
[공소 시대] 현 서둔동 본당의 관할 지역에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을 전후해서였다. 그 결과 갓등이(현 旺林) 본당 관할의 '자로목 공소' (화성군 매송면 好梅實里)가 설립되었으며, 한때는 하우현(下牛峴) 본당의 르 각(C. Le Gac, 郭元良) 신부가 공소를 돌보기도 하였다. 르 각 신부의 후임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1914년의 자로목 공소 신자수를 58명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이 공소는 1923년 10월에 수 원(현 北水洞) 본당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노림 공소' 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35년 3월에는 한 동수(스테파노) 회장이 희사한 대지와 공사비로 강당을 신축하였다. 이후 노림 공소는 금곡리 공소를 분리하였는데 이 공소들은 1959년에 고등동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1979년에는 그 인근에 위치한 두암에도 공소가 설립되었다.
〔본당 설립과 성장〕 1966년의 병인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교구별로 순교 복자 기념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의 결정에 따라, 수원교구에서는 노림 공소 금곡리 공소 · 두암 공소를 중심으로 꾸준히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는 이 지역에 순교 복자 기념 성당인 서둔동 본당을 설립하기로 하고 1968년 5월 10일 초대 주임으로 정주성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러자 정주성 신부는 부임 한 달 만인 6월 15일에 현 성당 부지 1,550평을 마련하여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일인 이듬해 9월 16일을 기해 97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어 2대 주임 김창린 신부는 1974년 6월 3일에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를 초청했으며, 1977년 1월 1일에는 부곡(富谷) 본당을 분리한 데 이어 3월 2일에는 '복자유치원' 을 개원하였다.
1980년대 들어 본당에서는 1982년에 수녀원을 증축하였고, 1984년 2월 6일에 대학동(大學洞) 본당이 신설 되자 112세대 443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또 7대 주임 최재필 신부 때인 1988년 9월 6일에 시작된 성당 및 교 육관 신축 공사가 3년 만인 1991년 7월에 완공을 보았으며, 1993년 5월 3일 새 본당 부지로 구운동(九雲洞)에 1,336평을 매입한 데 이어 이듬해 4월 29일에는 칠보 본당 부지로 526평을, 같은 해 10월 21일에는 서호 본당 부지로 534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996년 2월 9일자로 서호 본당과 칠보 본당을 동시에 분리하였다. 한편 최근 들어 본당 신자들은 낙태 행위와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지속적인 가두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 수원교구 ; 고등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北水洞聖堂七十年史》, 천주교 수원 교구 북수동 성당, 1994/ 《수원교구 3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1993.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