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소속 본당. 경북 상주시 서문동 50-2 소재. 1936년 5월경 퇴강(退江) 본당 관할 공소인 부원(釜院)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 요셉. 승격 당시 이름은 '상주(尙州) 본당' 이었으나, 1963년 11월에 남성동(南城洞) 본당을 분리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관할 구역은 서문동, 서성동, 무양동, 만산동, 부원동 전 지역과 냉림동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서만 . 낙서 · 남적 · 은척 등 4개소. 〔교 세〕 1969년 3,687명, 1974년 3,146명, 1979년 3,522명, 1984년 4,082명, 1988년 4,786명, 1992년 1,756명, 1996년 1,953명. 〔역대 신부〕 초대 김문옥(金汶玉) 요셉(1936. 5~1937. 6), 2대 박삼세(朴三世) 요셉(1937. 6~1943. 2), 3대 김계룡(金季龍) 베드로(1943. 2~1947. 5), 4대 서정길(徐正吉) 요한(1947. 5~1948. 6), 5대 정행만(鄭行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948. 6~1953. 4), 6대 김유재(金有宰) 그레고리오(1953. 4~1955. 1), 7대 박춘택(朴春澤) 베드로 (1955. 1~5), 8대 콜레(E. Kohler, 경도범) 엘리지오(1956. 7~1963. 6), 9대 랑그(E. Lang, 장휘) 엘마노(1963. 7~1964. 7), 10대 팀테(T.Timpte, 진문도) 토마스(1964. 7~1966.8) , 11대 푸테레(M.Fütterer, 곽미걸) 미카엘(1966. 8~1968.8), 12대 정환국(政桓國) 알로이시오(1968. 8~1969. 7), 13대
베르트랑(P. Bertrand, 안덕화) 베드로(1969. 7~1971. 12) , 14대 가즈탕비드(A. Gaztambide, 한상덕) 안토니오(1971. 12~1979. 5), 15대 이성길(李誠吉) 바오로(1979. 5~1984. 1), 16대 김영필(金榮弼) 바오로(1984. 1~1988. 6), 17대 류강하(柳康夏) 베드로(1988. 6~1993.5 , 18대 오성백(吳盛栢) 요아킴(1993. 5~현재).
〔전사 및 공소 시대〕 상주 지역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때 집안의 박해를 받게 된 서광수(徐光修) 가족이 이안면 양범리(利安面 良凡里)의 배모기로 이주해 오면서부터였다고 하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그러나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이전에 이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은 분명하다. 이 박해로 체포된 전주 출신의 신태보( 申太甫, 베드로)는 한때 잣골(현 이안면 양범리, 혹은 함창 면 척동리)에 거주하였으며, 멍에목(駕項里, 문경시 동로면鳴田里)과 앵무당(상주시 화북면 坪溫里)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 이 박해로 박보록(朴甫祿, 바오로)과 그의 아들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그리고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 안군심(安, 리카르도),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 등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 후 1865년말 평지리(문경시 산양면 平地里)에 살던 서유형(바오로)과 그의 형수 박 루치아가 상주 진영에서 순교하였고, 이듬해 병인년에는 문경 한실(마성면 上乃里)에 거주하던 서광수의 증손 서태순(베드로), 김 아우구스티노 일가, 장서방 부부, 여우목(문경읍 中坪里)의 김 수산나가 상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이어 여우목의 회장 이윤일(요한) 성인도 10월에 체포되어 1867년 1월 21일 대구 관덕당(觀德堂)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박해로 인해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탄생한 상주 지역은 박해가 끝난 뒤 대구(大邱, 현 계산동) 본당에 속해 있다가 1894년에 가실(佳室, 현 낙산) 본당, 1901년에는 김천(金泉, 현 황금동)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다. 김천 본당 관할이었던 1910년에 상주 지역에는 모두 6개 공소에 257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물미 공소(사벌면 退江里)의 신자수가 105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던 중 1922년 9월 24일에 퇴강 본당(1969년에 폐쇄)이 설립되어 상주 전역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인근의 물미 본당 주임 이종필(李鍾弼, 마티아) 신부는 1926년에 '부원 공소' (서문동 본당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이후 부원 공소의 신자들은 염 안드레아 회장의 사가(私家)에서 10여 년 간 공소를 치렀다.
〔본당 승격과 변모〕 1936년 5월 사제 피정이 끝난 직후,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는 상주 본당의 설립을 결정함과 동시에 김문옥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공평리(孔坪里, 현 店村) 본당에서 재임하던 김문옥 신부는 이미 3월 3일에 서문외리 49-2번지의 부지 378평과 서문 외리 50-2번지의 400평을 성당 부지로 매입하고 성당 신축 공사를 하고 있었다. 50평 규모의 이 성당은 2대 주임 박삼세 신부 때인 이듬해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이어 3대 주임 김계룡 신부는 1945년 10월에 요셉회를 조직하였으며, 4대 주임 서정길 신부는 한때 퇴강 본당의 사목까지 담당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 서문동 본당은 이른바 '황 데레사 사건' 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결국 대구교구의 결정으로 1955년 5월 12일에 함창(咸昌)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듬해 7월 14일 상주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8대 주임으로 콜레 신부가 부임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더욱이 신자들은 이 시련을 전교 활동으로 극복하여 195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신자 증가율이 연 평균 33.2%에 달하였고, 1958년에는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만도 620명이나 되었다. 이에 앞서 1956년에 성당 신축 계획을 수립한 본당에서는 현 성당 일대의 부지 1,231평을 매입한 뒤 이듬해 4월 2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0월 13일 13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아울러 콜레 신부는 1959년 6월 19일에 상주군 공겸면 역곡리 621번지 일대의 부지 450평을 매입하여 '성심원' (나환우 정착촌)을 개원했으며, 1962년 1월에는 화령(化寧) 본당을, 이듬해 11월에는 남성동(南城洞) 본당을 분리하였다.
이후 본당 사목은 베네딕도회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번갈아 담당하다가 1969년에 안동교구가 설립되 면서 새 교구로 편입되었고, 1979년 5월에는 본당의 사목이 교구로 이관되었다. 1979년 3월 8일 '파티마 유치원' 이 개원된 지 얼마 안된 그 해 5월 이성길 신부가 15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며, 1987년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해서는 《서문동 성당 50년》을 발간하였다. 또 1990년 7월 14일에는 계림동(溪林洞) 본당을 분리하였으며, 1993년 5월 9일에는 교육관 및 만남의 집을 신축하였고, 최근에는 상주민족학교를 개설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올바른 역사 의식을 정립시키는 데도 노력하고 있다. (⇦ 상주 본당 ; → 안동교구 ; 퇴강 본당 ; 함창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釜山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한국교회사연구소 譯註,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천주교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百年史(1886-1986)》, 천주교 대구대교구, 1986/ 〈西門洞聖堂五十年》, 천주교 서문동 교회, 1987/ 안동교구 25년사 편찬위원회, 《교구 전사》, 안동교구사 자료 4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7. [金成喜]
서문동 본당
西門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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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19일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거행된 성당 봉헌식(왼쪽)과 현재의 성당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