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전례

西方 典禮

〔라〕liturgia occidentalis · 〔영〕western litur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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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전례의 첫 성무 집전서인 《베로나 성무 집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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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전례의 첫 성무 집전서인 《베로나 성무 집전서》.

서방 교회 즉 로마 교회의 예식. 전례는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특히 4세기 전반에 그리스도교 제국의 보호 아래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발전하였으나, 이러한 자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심리적인 법칙에 따라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에 맞추어 서로 다른 양식으로 제도화되었다. 따라서 서방 전례는 동방 전례와는 달리 지방적인 풍습과 전통의 차이에서 이루어졌다. 서방 전례는 근본적으로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Gallican nite)라는 두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더 세분하면 로마 전례·갈리아 전례(프랑스 지역) · 암브로시오 전례(밀라노) · 스페인 전례(모자라빅 비시고딕 전례) · 켈트 전례(아일랜드)로 구분할 수 있다.
I . 로마 전례
로마 전례는 전 서방 전례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서방 교회의 거의 유일한 전례가 되어 갔고, 마침내 전세계의 전례가 되었다.
〔순수 고전 로마 전례〕 기원과 전례서의 변천사 : 4~8세기는 로마 교회가 신학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귀중하고도 풍부하며 성숙한 형태를 갖추기까지 자신의 예배를 훌륭히 발전 · 형성시킨 기간이었다. 참된 의미의 전형적인 로마 전례는 교황 다마소 1세(366~384) 때부터 성립되었으며, 이때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전례 언어가 바뀌었다.
로마 전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소위 '로마 미사 전문' (Canon Missae Romae)이라고 불리는 성찬 기도문에 나타나 있다. 로마는 단 하나의 성찬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 년 내내 몇 부분만 빼고는 항상 같은 것이었다. 이때 사실상 유일하게 존재하였던 이 성찬 기도문 외에도 여러 기도문들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본기도 · 봉헌기도 · 감사송 · 영성체 후 기도 · 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만들어졌으며, 또한 이러한 종류의 기도들은 수많은 기도문 형태들로 자유롭게 작성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형태의 기도문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이 기도문들이 많이 애용되고 반복되고 또 기도문들의 수집과 복사가 이루어짐에 따라서 점차로 성사 집행에 필요한 기도문들을 모아 놓은 《소성무 집전서》(Libellus Sacramen-torum)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소성무 집전서들은 재차 다시 모아졌다. 처음에는 개인이 정한 순서에 따라, 그 후에는 외적인 기준(매달 순서)에 따라, 더 후대에는 일 년 주기에 맞춰 신학적인 기준을 따라서 조직적으로 모아졌다. 그리하여 이 모음집들은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를 이루게 되었다.
성무 집전서에는 사제가 연중에 걸쳐 성사 집행에 필요한 모든 것(특히 기도문)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성무 집전서들은 서로 다른 양식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첫 성무 집전서인 《베로나 성무 집전서》(Sacrmentarium Veronense, 혹은 Sacramentarium Leonianum)는 어느 개인이 기도문을 모아 놓은 책으로, 그 핵심 내용은 아마도 교황 레오 1세(440~461) 때와 5~6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뒤를 잇는 《젤라시오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 Gelasianum)와 《그레고리오 성무 집전서》(Sacramentarium Gregorianum)는 《베로나 성무 집전서》보다 더 공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서, 그 핵심 내용은 5~6세기의 로마 기도문들이다. 이 성무 집전서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로마 교회 전례 기도문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다.
성무 집전서들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사제가 청원과 찬미의 기도를 바치고 나면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선포되는데, 이 선포를 위해 성서 본문들이 들어 있는 독서집을 큰소리로 읽는다. 원래 독서는 성서에서 자유로이 취해졌다가 이후에 성서 안에 그날 읽어야 할 성서 구절을 표시하였고, 마침내 이 같은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게 되었다. 이 목록집을 "카피톨라리'(Capitolari)라고 부른다. 이후 이같이 지정된 성서 구절을 베껴서 이 구절들을 따로 묶은 독립된 책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복음 봉독을 위해서는 《복음집》(Evangeliarium)이, 독서자를 위해서는 《서한집》(Epistolarium)이 만들어졌으며 이 두 권의 책은 미사를 위한 《독서집》(Lectio-narium)으로 합쳐졌다. 이런 종류의 본문을 전해 주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6~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전례곡은 대부분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의 시기보다 후대의 것들이지만, 미사와 시간 전례를 위한 곡과 가사를 모아 놓은 《성가집》도 6~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례를 어떻게 거행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로마 규범서》(Ordo Romanus)들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현존하는 《로마 규범서》는 대부분 로마에 순례 왔던 프랑크-게르만 사람들이 기록한 일종의 보고서이다. 그들은 로마 전례의 관행을 흠모하여 자신의 고장에서도 이것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자기네 나라에 소개하였는데, 이때 그들은 자기 조국의 관습과 로마의 관행을 연결시키거나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0개의 로마 예식 중 몇 가지는 프랑크-게르만 요소와 섞이지 않은 순수 고전 로마 전례를 상당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 규범서》 제1권은 7세기경의 로마의 대미사에 대해 뚜렷이 보여 주고 있고, 제11권은 예비 신자 교육 기간과 입교 성사에 대해 잘 보여 주고 있다.
특성 : 이 시대의 미사 전례는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즉 참석한 모든 이가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개인 기도(즉 낮은 목소리로 하는 기도)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개인 신심은 전례 안에서 이루어졌다.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로 이루어진 성가대의 노래를 듣거나 독서를 들음으로써 그리고 봉헌물을 제대 앞으로 운반함으로써 전례에 참여하였으며, 모든 이가양형 영성체를 하였다. 주교(주례자)는 다른 주교들 그리고 사제들과 이외의 하급 성직자들(부제 · 차부제 등)에 둘러싸여 전례를 거행하였다. 이렇듯 모든 것이 위엄과 성대함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그 당시의 문화적인 섬세함을 반영하는 요소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순수 로마 전례의 고유한 특성으로 외형적인 요소로는 정확성, 단순성, 간략성, 수다스럽지 않음, 덜 감정적임, 종교적 · 인간적 · 영적인 위대함, 큰 가치를 지닌 문학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로마 전례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특성이다. 무엇보다도 초기 교회가 지켜 온 기도 양식에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즉 로마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기도를 드렸는데, 이는 히포 교회 회의(393)와 카르타고 교회 회의(397) 등 북부 아프리카 교회가 정한 방식이었다.
로마 전례의 기도문 안에는 성체와 성혈에 대한 신심이 드러나 있는데, 이 신심의 특징은 봉헌 기도 · 감사송 · 성찬 기도 · 영성체 후 기도 안에 합당한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봉헌은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이 봉헌물에 대해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 즉 그의 죽음과 부활 및 승천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거룩한 것(성체와 성혈)에 대한 외적인 공경은 찾아볼 수 없고, 성체와 성혈의 실재에 대해서 신학적 · 사변적인 논증으로 설명하려는 어떤 시도들도 찾아볼 수 없다. 성찬례는 지역 교회 공동체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 순회 미사 때 교황을 중심으로 사제와 부제 및 모든 신자들이 함께 모여 거행하였으며, 주교와의 일치의 표시로서 주교로부터 성체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로마 전례는 기도와 신앙이 잘 조화된 것으로 진리의 특은을 지닌 것이었다.
〔중세기의 전례〕 기원 : 7세기에 알프스 북쪽 지방에서 옛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가 합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로마 전례서들은 상당히 이른 시기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 전해졌다. 이 중에서 《젤라시오 성무집전서》 · 《그레고리오 성무 집전서》 · 《로마 규범서》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새로운 지역에서 이미 수 세기전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해 왔고 꽃피워 왔던 갈리아 전례와 만나게 되었다. 다방면에서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면서 형성된 혼합 형태의 전례가 로마로 재도입되었으며, 이후 몇 가지 토착화 과정을 거친 후에 중세의 로마 전례로 발전되었다.
전례의 특성과 변모 : 이 시대의 예식의 특징은 우선 기도 양식에 있다. 전례 기도의 맺음 양식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Per Christum Dominum Nostrum)로 이루어지는 것이 로마의 기도 양식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 때문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갈리아적인 기도를 도입하여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Qui vivis et regnas in saecula saeculorum)로 기도를 끝맺게 되었다. 그리고 전례 중에 사적인 기도가 많아졌으며 큰 소리로 하거나 손을 들고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미사 집전자는 신자들에게 등을 돌린 채 미사를 거행하였고 개인 미사가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신자의 참여에 대한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채 미사는 사제 혼자서 바치는 것이 거의 독립적인 가치를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모든 것이 사제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사제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신자들은 단지 수동적으로 예식에 참여하는 반면에 사제만이 유일한 미사의 주체자(행동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기도문 · 독 서 · 후렴 등 미사의 모든 부분을 함께 볼 수 있는 책이 요구되어 13세기에 《총 미사 경본》(Missale Plenarium)이 나오게 되었다.
12~13세기의 로마 전례는 신자들이 참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면을 보완하기 위한 대책으로 또 다른 형태의 전례 관행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전례 속에 거행된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있기를 바라는 신자들의 신앙과 원의를 어떤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거나 대치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바로 특별한 축성 순간에 신자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 도입한 새로운 공경의 예식인 '거양 성체' (elevatio)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에 개인적으로 인사하면서 바치는 기도들, 즉 종의 사용 · 초의 사용 · (성체를 쪼개고 나서) 사제가 성체 앞에서 절을 하는 자세 등을 비롯하여 성체를 만진 손가락을 경의의 표시로 계속 맞붙이는 관습도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또한 신자의 개인적인 지향이나 신심을 위해서 공동체 없이 사제 홀로 지내는 사적인 미사 형태가 생기기도 하였다.
중세 말기인 14~1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런 상태가 더욱 극에 달해 새로운 형태의 기원 미사와 여러 종류의 미사들이 생겨났고, 미신적인 사고와 함께 주보 성인을 공경하는 예식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여러 신심 단체들이 만들어져서 종교 생활은 더욱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트리엔트 공의회〕 중세 말기의 전례의 혼란과 여러가지 남용 속에서 그에 대한 반감으로 종교 개혁(1517)이 일어나 교회 안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에 대처하기 위하여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많은 반증의 자료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쇄신 공의회로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자들의 참된 신앙 생활을 위해 교의적인 면에 확신을 주는 것, 신앙 고백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는 것, 특히 전례 면에서 성사에 대한 개념의 정의 및 각 성사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내려 주는 것이었다. 이에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1563년 12월 4일의 마지막 회기를 통하여 성사와 전례 면에서 정의를 제시함에 따라 새로운 전례서를 편찬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어 이미 시행해 오던 전례서를 정리해서 새롭게 개정 · 편집하였다. 이때 개정되어 나온 전례서들이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 《로마 성무 일도》(Breviarium Romanum) · 《로마 주교 예식서》(Pontificale Romanum) · 《주교 예식집》(Ceremoniale Episcoporum) ·
《로마 예식서》(Rituale Romanum) 등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교황들의 개혁 작업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었지만 제한된 작업일 뿐이었다. 이는 그 당시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례를 확립하려고 시도한 것이었지만 현실 생활과 전례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하였고, 신자들의 신심과 더욱 괴리되어 신자들이 전례 대신 대중 신심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바로크 시대〕 이 시기, 즉 17세기는 초대 교회의 생동적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전례 정신이 희박한 시대였다. 이 시대는 전례의 보조 역할을 해야 하는 예술이 주가 되고 전례가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종교 문화는 특히 축제의 문화였다. 이 시대는 더 높은 이상들을 쾌활하고 관능적인 분위기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축제를 통하여 수렴하고자 하였다. 연극적인 표현들과 대중 놀이 등이 대단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모든 음악적인 방편들(오르간 · 폴리포니아 · 민속음악)이 동원되었으며 순례나 행진도 많이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축제인 '주의 성체 대축일'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는 최상의 화려함과 극적인 표현들 · 화려한 복장 · 깃발들 · 군인들 · 불꽃놀이 등으로 이루어진 행렬(성체 거동)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많은 신심 행위의 형태들도 추구되었다. 또 제대 위에 감실을 안치하여 마치 왕좌처럼 아름답게 장식하고, 미사는 하나의 축제처럼 오케스트라와 다성 음악으로 미사 분위기를 한창 돋구어 거행되었으며, 더욱이 성변화때는 악대까지 동원하여 신나게 종소리를 울려 대고 심지어 폭죽까지 터뜨리며 그 기쁨을 마음껏 표현하였다.
〔계몽주의 시대〕 인간의 지위와 자유를 부르짖고 일어난 18세기 말의 계몽주의는 종교사적인 면에서 볼 때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동시에 잘 보여 주는 시대였다. 즉 인간을 과대 평가하는 인간 만능주의의 주창으로 인하여 신비에 대한 것, 특히 교회의 신비성에 대한 진의(眞意)를 과소 평가하였다. 전례에 있어서도 인간의 교육과 인간 지성의 향상만을 위주로 하는 반면에, 하느님께 대한 경신례라든가 존경과 영광은 경시되었다. 그러므로 전례를 예식으로써 거행하고 그리스도의 구원 행동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보지 않고 오히려 윤리적 · 교육학적인 관점에서 개인의 성장 과정의 한 방법으로 보았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경향에 의하여 자극을 받아서 전례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전례 개혁의 근본 취지는 전례의 간소화와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전례에 대한 이해였다.
〔전례 운동과 개혁〕 침체된 로마 교회 안에서 베네딕도회를 중심으로 전례 부흥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베네딕도회의 솔렘 연합회 수도원장인 게랑제(P.L.P. Guéranger, 1805~1875)였다. 그 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전례 제도》(Institutions Liturgiques, 1840~1851)와 《전례력》(L'anée Liturgique, 1841~1866)에서 전례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명백히 나타내려고 하였으며, 오랫동안 갈리아 전례에 대항하면서 로마 전례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게랑제 아빠스의 업적과 그의 전례에 대한 사랑을 이어받아 독일에서도 그를 따르는 후계자들이 등장하였는데, 베네딕도회 보이론(Beuron) 연합회의 창설자인 마오로와 플라치도 볼터(Placidus Wolter) 형제 아빠스가 그들이다. 1873년에 창설된 보이론 수도원은 전례 거행과 전례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또한 보이론 연합회에서 분가된 여러 새 수도원 안에 이와 같은 정신이 퍼져나갔다. 이 중에서 벨기에의 마레수(Maredsous) 수도원(1872)과 독일의 마리아 라흐(Maria Laach) 수도원(1892) , 그리고 루벵 근처의 몽 세자르(Mont César) 수도원들이 20세기 전례 운동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세기에 시작된 게랑제 아빠스의 전례 운동에 대한 사상이 20세기에 전파되어 저명한 지식층의 인사들이 이 새로운 사상에 가담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이 사상은 20세기의 전례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전례 쇄신을 열망하기에 이르렀고, 경신례는 교회의 중대한 행위로서 교회 자신의 표현 및 완성임을 천명하였다. 전례 쇄신이란 곧 교회의 쇄신이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 공의회야말로 전례에 있어서 제1급의 쇄신 공의회로서 평가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전례 헌장>이 제시한 기본적인 정신 안에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1970)과 《미사 독서집》(Lectionarium Missae, 1969), , 《시간 전례서》(Liturgia Hora-rum, 1971) 등 개정된 새로운 전례서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II . 갈리아 전례
갈리아 전례는 갈리아 남쪽에서 형성되어 6세기 초에 카알 대제(Charlemagne, 768~814)에 의해 로마 전례의 도입과 함께 로마-프랑크 제국 전체에 퍼졌는데, '갈리아'라는 명칭은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 환경에서 개정된 로 마 전례에 붙여진 이름이다. 갈리아 전례는 같은 기초에 토대를 두면서 동 시대의 역사적인 현상의 결과로 이루어진 스페인 전례와 함께 탄생되었다.
로마 전례와의 유사성 : 갈리아 전례와 스페인 예식에서 시도된 것들은, 5세기에 로마 전례가 처음부터 고유 환경 안에서 고유한 방법으로 시도한 것들과 유사하다. 즉 갈리아 전례나 스페인 예식도 성찬례 거행을 위한 여러 기도문, 성사 거행(세례 · 견진 · 혼인 · 성품)을 위한 기도문, 아침 · 저녁 기도(시간 전례)에 규정된 기도 등을 시도하였다. 처음의 의향은 고유한 환경에서 고유한 방법으로 기도문들을 새로 만들려는 것이었으나 거의 로마 전례를 모방하였다. 갈리아 전례 기도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고딕 미사 경본》(Missale Gothicum)이 있는데, 이것은 성찬례를 위한 갈리아 기도문들을 담으려 하였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성무 집전서들(sacramentarii)과 매우 흡사하다. 또 다른 것으로는 《보비오 미사 경본》(Bobbiense Missale)이 있는데, 이것은 단지 감사송 끝에서만 갈리아 미사의 구조를 보존하고 그 밖의 것은 <로마 미사 전문>(Canon Missae Romanae)을 적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 전례와의 차이점과 고유성 : 갈리아 전례가 로마 전례와 다른 점은 특히 세 가지 부분, 즉 성찬례 · 세례 · 성품성사에서 나타난다. 성찬례에서 평화의 인사는 성찬 기도 전에 하고, 성찬 기도 자체는 로마 전례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성찬 기도는 '거룩하시도다' 와 성찬 제정에 관한 주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각 부분이 매일 달라진다. 성찬 기도문의 구조는 "감사송(Contestatio) · 거룩하시도다 · 거룩하시도다 후의 기도문(Post Sanctus) · 축성 기도문(Mysterium) · 축성 기도문 후의 기도문(Post-Mysterium)" 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례의 경우 어떤 갈리아 세례 예식들은 발 씻김 예식까지 하며, 성품성사의 경우에는 로마 전례에는 없던 도유 예식 (예를 들면 손의 도유)을 하였는데, 이 예식은 후에 로마 전례 안에 도입되었다. 그리고 《주교 예식서》의 한 부분에 나타나는 것처럼 축복 기도에서 축복 기도의 내용을 미리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권고문이 있다는 것이다.
갈리아 민족은 감정에 치우치는 점이 많고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로마 전례에 비해 다채롭고 화려한 전례를 선보였다. 또한 각 주교좌 성당과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유한 전례 기도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전례의 기도 형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성부께 올리는 데 반해 갈리아 전례는 반아리우스주의의 영향으로 직접 그리스도를 향하는 기도 형태가 많다. 그리고 예식들은 동방 전례 예식의 영향을 받아 극적이다.
Ⅲ . 암브로시오 전례
밀라노 전례(Milanese rite)는 밀라노 교회 전 지역과 그 주위에서 오늘날도 시행되고 있다. 밀라노 전례는 성 암브로시오(340~397)의 업적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암브로시오 전례라고도 불린다. 암브로시오 전례는 대부분 로마 전례와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세례 성사 때 침수(浸水)로 세례를 주며 발 씻김 예식을 한다 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보편 지향 기도가 부제에 의해 노래로 불려지며, 봉헌 행렬과 봉헌이 신앙 고백 전에 이 루어진다.
비록 암브로시오 전례가 《로마 미사 경본》과 《시간 전례서》의 많은 부분들을 따르고 있지만 제2차 바티칸 공 의회의 정신에 따라 1976년에 《미사 경본》이, 1983~1984년에 《시간 전례서》가 개정되었다. 이러한 개혁 안 에서 로마 전례의 여러 특성들을 반영시키고 있지만, 반면에 밀라노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도 하 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례 때에 세례 방법으로서 침수와 발 씻김 예식을 거행하고, 보편 지향 기도가 부제에 의해 노래로 불려지며, 봉헌 행렬과 봉헌이 신앙 고백 전에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암브로시오 전례 형태의 많은 특별한 것들은 성 암브로시오의 《신비와 성사들에 대해서》(De Mysteriis e de Sacramentis)에 언급되어
있다.
IV . 스페인 전례
기원과 발전 : '모자라빅' (Mozarabic) 또는 '비시고딕' (Visigotic)이라고도 하는 스페인 전례는 6세기부터 스페인에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재임기에 일어났던 탄압 때까지 효력이 있었던 토착 전례였다. 7세기 비시고딕 왕국이 크게 확장되었을때 스페인 전례는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 전역과 갈리아 일부 지역에서 거행되었다.
무슬림 지배하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자라빅' 이라는 형용사는 속국(屬國)을 의미하는 아랍어 모하이데스(mohaides)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용어는 톨레도(Toledo)에서 처음 사용된 듯하나 정확히 는 아랍 점령의 마지막 시기부터 사용되었다. 1085년에 톨레도가 독립하였을 때에는 옛 스페인 전례는 이미 사 라졌는데, 이러한 결정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계속적인 요청에 의하여 부르고스(Burgos) 교회 회의(1080)에 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스스로 전 스페인의 황제로 선포한 알풍소 6세(1040~1109)는 모자라빅들에게 많은 특혜를 주었는데, 그 특혜 가운데 하나가 아직 존재하는 본당들에 옛 예식을 보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5세기 말에 톨레도의 대주교인 시멘스 드 치스네로(Ximense de Cisnero) 추기경이 두 가지 주요한 전례서인 《미사 경본》과 《시간 전례서》의 편집을 명령하였을 때까지도 옛 본당들에서는 그 예식이 아직도 지속적으로 활발히 거행되었었다. 전례서의 편집을 감독한 오르티즈(Alfonso Ortiz) 참사 위원은 이것을 "혼합 미사 경본" (Missale mixtum secundum regulam beati Isidori, dictum mozarabes)이라고 하였다.
특성 및 의의 : 아마도 10~11세기 사이에 정복된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가리키기 위해서 아랍인들에 의해 생겨난 '모자라빅' 이라는 이름은 사실상 이미 5~7세기동안 여러 수도 교구에서 이루어졌던 예식을 지칭하기에는 부족하고, 비시고딕 시기의 스페인 교회들의 풍부한 문화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결실로 보아야 하므로 또 다른 이름인 '비시고딕 전례' 가 역사적으로 보다 정확한 명칭이라고 하겠다. 동방 제국과 프랑크 왕국에 저항하였던 비시고딕 왕국의 견고함과 정치적인 토착화가 하나의 견고한 토착 전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전례는 이전의 전례 유산의 토대에서 발전하였다. 톨레도의 성 일데폰스(S. Ildefonso di Toledo, +667)를 제외하고 스페인 전례의 저자들은 비시고딕의 종족에 속하지 않았었고, 라틴 문화에 특별히 지역 언어와 문학에 뿌리를 두고 형성된 스페인-로마 저자들이었다.
스페인 전례는 갈리아 전례와 같은 시대, 같은 토대에 기초를 두고 생겨났지만 일반적으로 전례 기도문들은 갈리아의 기도문들보다 더 풍부하고 다채롭다. 세빌라의 이시도로(+636)는 《교회 예식들에 대해서》(De ecclesi-asticis officiis)에서 스페인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전례 기도문들을 언급하였다.
Ⅴ. 켈트 전례
기원과 형성 : 켈트 전례는 아일랜드 교회와 수도원에서 6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카롤링거 왕조 시대까지 거행 되었던 전례이다. 6~7세기에 아일랜드 교회 공동체는 아직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으므로, 이탈리아 · 갈리아 · 스페인 교회들과는 달리 라틴-그리스도교 문화에 충분히 뿌리를 박지 못하였었다. 켈트 전례의 역사적인 자료 즉 그 기원과 형성 및 발전에 대한 충분한 자료들은 없지만, 성찬례 거행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로마 전례를 반영한 8세기 말의 《스토브 미사 경본》(Missale Stowe)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것으로는 7세기 중엽에 모나코 디 바비에라(Monaco di Baviera)에 의해 쓰여진 필사본《성무 집전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고유한 갈리아 성무 집전서의 아일랜드 복사본이다.
특성 : 아일랜드 전례서들의 내용은 때때로 로마 전례 · 밀라노 전례 · 갈리아 전례와 연관성을 두고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초적인 요소들에다가 아일랜드 전례의 고유한 기도문이 첨가된 것이다. 켈트 전례의 특성은 결코 미사여구의 양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교회가 확립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수도원 운동이었는데, 확실히 수도회들은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켈트 전례의 고유성은 대부분 수도회의 환경에서 온 것이다. (⇦ 갈리아 전례 ; 라틴 전례 ; 스페인 전례 ; 켈트 전례 ; 로마전례 ; → 동방 전례 ; 전례 ; 전례 운동)
※ 참고문헌  AA.VV., An Anàmnesis 2 : La liturgia, pamorama storico generale, Marietti, 1978/ E. Cattaneo, Il culto cristicmo in occidente, Roma, 1978/ B. Neunheuser, Storia della liturgia attraverso le epoche culturali, Roma, 1983/ J.P. Lang, 《DL》, pp. 27, 223, 441, 556~557. 〔鄭義哲〕